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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온 May 14. 2024

베개

#6/28 짧은 글 에세이_사물의 입장에서 글쓰기

나는 매일 밤 그의 꿈을 안고 그의 비밀을 듣는다. 

나는 쓰임새가 아닌, 이야기의 시작이다.




 나는 꽤나 부드럽고, 깊고 진한 색을 지녔다. 그는 나를 촉감으로도, 색감으로도 충분히 느끼고 편안해한다.

'늪에 빠진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그 늪을 연상시키는 '다크그린', '딥그린'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색을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 나는 잠에 늪에 빠지게 하는 매력이 있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아침, 출근 시간 이후의 삶은 마치 숲에 있는 높은 나무들 사이로 내리쬐는 태양빛 같이 평화롭다. 바깥은 나가보지 않았지만 꽤나 시끄럽다고 한다. 뉴스에서 매일 같이 나오는 전쟁과 화재 소식이 들려오고 정치판이 어떻다는 얘기들로 꽉 차있다. 틈틈이 창문 밖으로 들리는 경적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들린다. 이따 나를 베고 자는 그가 바깥의 온갖 시끄러운 소리를 다 듣고 퇴근해서 집에 오면 또 피곤에 절어있는 얼굴로 누울지, 운동할지 망설이겠지. 그래도 기특하게 바로 눕는 날보다 운동하거나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날이 훨씬 많다. 아무리 봐도 칭찬해 줄 만하니 보상은 그가 편히 잘 수 있게 그저 내 자리를 지켜내는 것 말고는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아쉽다.


가끔 그가 잠꼬대를 한다. 그의 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그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그가 꿈 속을 헤메이며 흘려하는 말이 얼핏 들린다.


"가지마"


외마디 비명과 함께 꿈에서 깨고 나서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고 다시 잠에 들려고 뒤척이기도 하는데어쩔 땐 무서워서 깬 듯 땀을 한 바가지 흘리며 거실로 물을 마시러 나가기도 한다. 그러고는 폰을 켜고 메모장에 꿈꿨던 내용들을 몇 번 적기도 했다. 잠을 잘 못자던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 아! 잠을 잘 못자서 이야기를 쓰는건가? 어쩌면 나로인해 이야기가 시작 되는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럼 난 어떡하지? 재워야 하나 재우지 말아야 하나 선택의 기로에 놓여진 순간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그에게 고맙다. 나는 그의 선택으로 이 집에 들어왔다. 누군가의 눈에는 평화롭고 또 다른 누군가의 눈에는 지겨울 수 있는 내 일상에 치열하게 사는 인간의 삶을 그가 보여주고 있다.

아침 일찍부터 어떤 날은 누군가와 같이 책을 읽고 또 다른 날은 노트북으로 글을 쓴다. 회사에서 글을 쓰는 일을 하는지, 어떻게 매일 그렇게 쓸 수 있는지 신기하다. 내가 온 첫날은 그러지 않았다. 놀기 좋아하고

가끔 공부하는 모습만 봤는데 작년부터 그가 변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무슨 심경에 변화가 생겼을까?

나뿐만 아니라 나와 같이 온 이불과 매트리스커버도 같은 생각이었다. 아! 내 친구 소개를 잠깐 하려고 한다.


처음 온 날, 딱 봐도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집에 택배로 나와 이불과 매트리스 커버가 같이 왔다. 잠시 후 매트리스도 도착했다.

우리는 서로 어색한 눈인사만 나눈 채 동거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색이 똑같아서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알고 보니 같은 공장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어쩐지 피부도 서로 똑같아서 놀랬다. 이 집에는 나랑 비슷한 피부를 가진 사람이 별로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를 이 집에 데려온 그가 나와 비슷한 색의 옷과 양말 심지어 책까지 하나, 둘 데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느꼈다. 그는 나를 좋아한다. 아니 나와 같은 시크하고 따뜻하면서 진한 초록색을 좋아한다.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그래서 나에게 기댈 때면 더 포근하게 그를 감싸 안았다. 숲에 가면 나무로부터 흘러나오는 깊고 시원한 숲내음이 나서 그 향에 대한 마니아층이 있듯, 그의 머릿속에 나라는 색과 감각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고 가득 채워서 매일 생각나는 마니아로 만들고 싶은 욕망이 있다. 원래 좋아하면 갖고 싶고 갖기 위해 더 잘해주는 법 아니겠는가. 서로가 좋아하는 기적 같은 일이

내게도 곧 이뤄질 것 같다. 아직 그로부터 표현을 못 들어서 그저 기다릴 뿐이다.


가끔은 그의 동생이 나를 찾기도 한다. 잠이 더 잘 온다나 뭐라나 하는 그런 이유로 말이다. 이 몸의 인기를 나열하기에 입이 아플 테니 이쯤 그만두겠다. 어쨌거나 꽤나 쓰임이 있는 존재다. 쓰임새가 아닌 이야기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결국 나 혼자서만 한 건 아님을 알고 있다. 나랑 같이 온 이불도 한 몫을 했다. 이불의 말도 들어봐야 하는데 그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이불은 분명 나랑 통하는 게 많을 거다.

인간들은 태어난 장소, 시간, 자라난 환경에 따라 성격과 인생이 어떻게 된다는 사주라고 하나?

그걸 따진다던데 우리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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