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것에 대하여.
겨울의 러닝이 힘들까, 여름의 러닝이 힘들까.
나는 '본인이 좀 더 좋아하는 계절에 달려있다' 라고 생각한다.
여름을 유난히 좋아하는 나는 여름의 달리기가 힘든 적이 별로 없었다. 여름은 스포츠던 여행이던 늘 가장 큰 메리트를 가지고 있다. 우선은 짐이 가볍다. 집에 있던 옷차림으로 여차하면 바로 나가도 상관이 없다. 한번은 제주도로 일주일간 여행을 간 일이 있는데 비행기 출발 전 급히 싼 짐에 운동화 두 켤레와 운동복 상하의 세벌을 챙기고 일반적인 옷은 비행기를 타고 갈 때 입은 옷 한벌 뿐인 것을 도착 후 깨달은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주일치 짐은 뒤로 매는 가방 하나와 옆으로 매는 스포츠 가방-그 두개로 다 해결되었다. 도착해서 운동복 외에는 일상복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살짝 당황했으나 별로 오래가지 않았다. 여름은 어떤 옷이든 한나절만에 마르게 만들어버리는 생명력이 넘치는 계절이었다. 여름의 달리기도 마찬가지다. 여름의 달리기는 무겁지 않고 흘러내리지 않는 적당한 선글라스와 갈아입어야 할 셔츠 하나 정도였다.
겨울의 달리기는 생각보다 많은 아이템이 필요했다.
기온이 떨어져갈 때 달려보며 내 몸을 테스트해보았다. 반바지는 아직은 괜찮았다. 생각보다 상체가 추웠다. 특히 팔목사이로 들어오는 바람과 노출된 목덜미가 변수였다. 그리고 신체의 모든 돌출의 종착역들이 가장 연악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코끝. 손가락. 귀. 신발안에 있지만 모든 기온을 온전히 밟아내고 맞이하는 발가락.
생전 처음으로 사는 것들이 생겼다.
귀돌이를 샀다. 비니를 사고, 늘 모자를 쓸 수는 없을 것 같아서 귀마개로도 사용할 수 있는 헤어밴드를 샀다. 난생처음 긴 기모팬츠를 사고, 히트X을 샀다. (나는 내복이라 생각해서 단 한번도 사지 않았다.) 너무 비싼 옷은 데일리런에 비효율적이므로 가성비템을 찾아 경량 패딩을 구매했다.
한번에 이뤄진 일은 아니다. 그냥 겨울에도 달리기 위해서는 필요할 것 같은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최저가로 모았다. 장착 후 겨울은 생각보다 내게 두렵지 않은 계절이 되었다. 다만 패션을 포기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어떻게 보이는가보다 내가 여전히 큰 불편함이나 두려움없이 달리 수 있다는 것에 초점을 밎추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맞다, 달리수만 있다면 갖춰진 아이템들에 감사하는 마음뿐이었지 내가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 딱히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위궤양과 공황을 겪으며 일하던 시절.
지금의 내가 내 스스로를 돌아보아도 인생의 여러의미에서 리즈시절이었던 그 때. 그때의 나는 업무에서는 늘 투피스 정장차림이었고 힐은 늘 7에서 9센티의 굽이었다. 나는 그 신발을 신고 급한 상황에서는 얕은 산을 오르기도 했고 (30만원짜리 구두였다. 그 산행 후 버려야했다.) 필요한 모든 순간에 뛸 수도 있었다. 집 앞의 마트를 갈 때도 화장을 했고 상대가 누구던 만나는 모든 장소와 순간에서 정제되고 가꾸어진 모습으로 임했다. 샤워 후 장소가 어디고 상황이 어떻든 무조건 머리카락을 바짝 말려야만 밖에 나가는 것이 철칙이었던지라 한여름에도 나는 드라이기를 최소 몇십분은 틀고 머리를 말렸다. 한번은 운동하는 체육관의 에어컨이 고장이 났다. 서로 얼굴정도 알고 지내는 분과 여자 탈의실에서 같이 머리를 말리는데 샤워하고 나오자마자 땀이 주룩주룩 흐르는 날이었다. 여자분은 머리밑만 간단히 말린 후 화장을 하고 옷을 입으려는데 곁에 서있던 내가 땀때문에 더 마르지 않는 머리를 끝까지 말리며 서있으니 점점 뜨거워지고 습해지는 공기를 참지못하고 짜증을 내며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재밌는 사실은, 그 때 문을 열고 나가있던 그 여자분의 표정이 서로 예의를 차리는 사이임에도 너무 솔직했고 나는 그 당시 더위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나는 온 몸에 긴장과 힘이 들어가 있었다.
누군가 내가 미처 말리지 못한 머리카락을 본다면, 나를 게으르고 자기관리 못하고 품위없는 사람으로 볼 것이라는 생각이 나로 하여금 그 여자분을 바라보며 '뭐'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의 기온을 체크한다. 현재의 시간과 달리기를 시작할 때의 시간을 따라 기온의 변화를 본다. 얼마나 맞는 확률일까 약간의 심리적 방어선을 가진 상태로 본다. 구름이 있거나 바람이 얼마나 변수를 주는지도 살펴본다. 내가 얼마나 추울까와 내가 춥지 않으려면 무엇을 챙겨주어야 할까를 생각하는 시간이다.어떤 의미에서는 자연과 내가 소통하는 시간인 것이다. 오늘은 생각보다 기온이 더 낮아진 상태라서 내가 가진 모든 아이템을 총동원해서 출발 전 씌우고 쓰고 입고 덮어본다.
그랬더니 어릴 때 좋아했던 서태지의 스노우보드 패션이 완성된 것 같은 느낌이라 혼자 빵터져본다.
정말 촌스러웠다.
가성비로만 산 옷들이라 색은 모두 검거나 회색이고, 드문드문 구매한 아이템들이 종합되느라 목을 보호하는 도구는 마스크와 겹치고, 비니의 꼭두머리는 탈출할 듯이 솟아 있고 묶지 못해 푼 상태로 있는 머리에 선글라스를 쓰니 정말 우스꽝스러웠다.
편의점을 갈 때도 헤어를 신경쓰고, 메이크업은 반드시 하고, 옷을 두세번 갈아입던 내가 맞나 싶어 웃음이 나왔다.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말이 있던가. 미감이 타고나거나 신체가 선천적으로 아름다운 비율을 갖지 않은 이상 그것은 맞지 않는 말인 것 같다. 확실히 신경쓰고 꾸며야 아름답다. 하지만 자연스러움이 주는 가장 큰 아름다움은 자긍심이다. 자긍심. 겨울이 힘들다고 여름이 오기를 기다리며 보내는 그 원망과 허송의 시간은 거짓이다. 겨울일 때 겨울임을 받아들이고 내가 스스로 적극적 포옹을 하는 -그것이 비록 끔찍한 패션일지라도- 그 태도는 확실히 거울 속 나를 보며 미소짓는 일이 더 많게 만들었다. 우스운 패션을 보면서도 혼자 웃을 수 있는 상황은 내가 타인의 시선과 비판에 너무 민감했던 시절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어차피 달릴 때는 혼자다.내가 따뜻하고 안전한 것이 최고의 우선순위다.
그리고 내가 인생을 달릴 때도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너무나 혼자라는 것을 들키기 싫어서 아마도 나는 누군가가 볼 것이란 생각을 하며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