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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축가 이영재 Jul 09. 2018

일본건축기행 2-3

구라시키 미관지구 (倉敷美観地区)_2

[ 1 일차 ] _ 구라시키(倉敷)와 대상인 오하라(大原) 집안의 선견


지역의 대지주였던 오하라 집안은 메이지유신 이후 영국의 산업혁명시기와 더불어 공업화로 업종을 전환하면서 방적공장을 구라시키에 세운다.

그가 소이치로의 할아버지인 오하라 코우시로(大原孝四郞,1833-1910)였다. 그의 아들인 오하라 마고사부로(大原孫三郞,1880-1943)는 셋째 아들로 두 형이 요절로 집안을 잇게 된다. 하지만 그는 방탕한 생활로 도쿄전문학교(와세다 대학 전신)를 중퇴 후 구라시키로 돌아와 근신을 하게 된다. 근신 중 이시이주지(石井十次, 1865-1914, 아동복지의 아버지로 불림)를 알게 되고 그의 활동에 감동하여 사회 복지 사업과 문화 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구라시키 방적 내 직공들을 대상으로 직공 교육부를 만들고 이후 소학교를 설립한다. 쿠라상업보습학교를 설립하여 직공들의 교육을 지원하고 장학회를 만들고 구라시키 방적의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노동 환경 개선을 도모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하게 된다.


오하라 미술관 그리고 구 오하라 저택


경영진 그리고 주주들과의 마찰에서는 "독수리의 눈은 수십년 앞이 보인다"하여 그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옳았다. 그는 사회적 책임을 다했다. 제국주의 일본의 행보는 내부에서도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러일전쟁 등으로 많은 고아들이 생겼고, 고아원에 수백억엔 이르는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코지마 토라지로(兒島虎次郞, 1881-1929, 이시이주지의 장녀와 결혼)와의 인연은 코지마가 동경미술학교(도쿄예술대학 전신) 재학 당시 오하라 장학생이 되면서 시작되었다. 그에게 경제적 원조를 아끼지 않았으며, 벨기에 겐트미술아카데미를 수석 졸업한 코지마는 화가 겸 컬렉터로 활동을 하게 된다. 유학시절 당시 화단을 이끌던 인상파 화가들과의 교류로 코지마는 인상파 화풍을 받아들였으며, 일본에 서양화 기법을 전파한 1세대 서양화가로 자리 매김 한다. 마고사부로의 의뢰로 모네와 엘그레코, 로댕, 샤갈, 고갱, 피카소, 르누아르 등의 세계적인 거장의 작품을 들여왔으며, 이 작품들은 일본 최초의 사립 서양미술관인  「오하라 미술관」 의 초석이 되었다.


오하라 미술관은 1929년 앞서 세상을 떠난 친구인 코지마 토라지로를 위하여 마고사부로가 건립하였으며, 아이비 스퀘어 부지내의 창고를 개조하여 「코지마 토라지로 기념관」을 개관


오하라 마고사부로의 장남인 오하라 소이치로(大原總一郞,1909-1968)는 1941년 구라시키 방적의 사장으로 취임한다. 소이치로는 20세기 접어들어 자본주의 경제에서 은행,철도,부동산 등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이루어 놓은 토대 아래 국제적인 사업가로 부상한다.


「구라시키(倉敷)」의  지명은 구라마을(倉敷村)에서 유래되었다. 중세 지배 지역의 연공미(조세,쌀)이나 조공을 영주에게  보내기 위해 일시적으로 모아 두는 장소인 쿠라시키지(倉敷地)였던 이곳은, 창고 딸린 저택을 의미하는 쿠라야시키(蔵屋敷) 건물이 수로를 따라 늘어서 있었고, 쿠라야시키(蔵屋敷)가 와전되어 현재의 구라시키(倉敷)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지역은 사람, 물자의 집결지로 상업도시였고 교통의 요충지 였다. 번성할 당시 거상들의 창고와 상가, 저택이 메이지 시대 이후 수운업이 쇠퇴한 이후에도 에도(江戸)시대부터 메이지(明治), 다이쇼(大正), 쇼와(昭和) 초기까지 다양한 시대의 건물이 혼재하고 있다.

도시의 쇠퇴는 재개발이란 명명아래 거대 자본이 투입되어 새로운 도시로 발돋움 할려는 움직이기 일기 마련이지만 오랜 봉건체제로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독립되어 있던 시대상황은 그 흐름을 빗겨날 수 있었고, 1940년대 후반부터 싹트리 시작한 경관보존에 대한 의식과 1988년부터 시작된 구라시키재생공방(倉敷再生工房)의 활동은 도시의 경관을 보존할 수 있었다.



개인적인 견해 지만 이 시기( 메이지 시대 말엽과 다이쇼 시대 초기)는 20세기 초였고 수운업의 쇠퇴로 발생한 잉여 노동력은 새로운 경제 활동이 필요했을 것이다. 당시 오하라 집안이나 다른 부유한 거상들이 단지 지역의 대지주로만 남았다면 지금 이 도시의 보존은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 대지주에서 방적공장으로 그들은 빠르게 산업화로 모습을 변화시켰고, 그 결과로 인해 필요한 노동력을 시대적 쇠퇴로 발생한 잉여 노동력에서 흡수하게 되었다. 또한 발생한 경제적 부를 축적하여 독점하지 않았으며, 지역의 사회복지 사업과 문화 운동에 재투자 됨으로 인해 도시의 운명이 바뀌게 되었을 것이다. 새로운 동력으로 재개발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12시 25분이다. 아무튼 배가 고프다.

여행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음식이다. 그 지역을 대표하는 특징적인 음식은 가능한 먹어봐야 한다. 음식은 문화의 아이콘이다. 건축만큼이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점심은 「료관 구라시키_旅館くらしき」 의 레스토랑에서 「四季の散歩道御膳_사계절 산책로 밥상」 으로 즐겼다.  御膳(어선)은 임금에게 진공하는 음식을 뜻한다. 그 이름 답게 1,850 엔이다. 메뉴를 보기전 배고픔에 털썩 주저 않았으니, 가격에 놀라 다시 나갈수도 없고, 다른 메뉴인 「旅館くらしき御膳_료관 구라시키 밥상」은 2,500 엔이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


료관 구라시키_旅館くらしき 의 四季の散歩道御膳_사계절 산책로 밥상_사진:석정민


사계절 제철 식재료를 활용하여 생선회, 구이, 튀김, 무침과 조림 등을 요리해 내어 놓는다. 6칸의 2단으로 12가지 작은 그릇에 담겨져 나오는 작은 가이세키라고는 하나 그 양이 나에겐 많이 부족했다.

허기진 여행자는 보기 좋은, 맛나는 음식만큼이나 주린 배를 채울 만큼의 양도 중요하다. 오감으로 만족한 점심 식사가 얼마나 버텨 줄까. 우리의 일정에서 가장 화려한 식사였다.


또한 식후 커피 만큼이나 중요한 끽연이 남았다. 점원에게 흡연할 수 있는 장소가 어디 있는지 물어봤다. 직원은 나를 이끌고 입구에서 가까운 방으로 데리고 갔다. 이것 저것이 재떨이라고 친절히 알려주고는 물러났다. 일본도 한국 만큼이나 흡연 인구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지난 여행에도 그랬고 이번 여행에서도 느끼는 것이지만 길 거리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사람을 잘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흡연을 위해 마련한 장소 이외에서는 흡연을 하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흡연실을 보곤 여기서 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을 했다. 이렇게 잘 마련된 흡연 공간을 여지껏 본 적이 없다. 이 정도라면 한 갑을 모두 피우고 나가야 할 듯 하다. 비흡연자에 대한 배려 만큼이나 흡연자에 대한 배려도 신경을 쓴 곳이다.


료관 구라시키에 마련된 흡연실
료관 구라시키의 정원
카페 엘 그레코_Café El Greco_사진:석정민


식사 후 우리는 100년 된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최소장님께서 20년 전 다녀갔었다고 한다. 당시 80년 되었다고 들었으니 이제 100년이 된 셈이다. 커피가 손에 들렸고, 이 카페가 얼마나 되었는지 점원에게 물어보니 카페로 사용된지 60여년 되었다고 한다. 갑자기 회춘한 카페 엘 그레코(Café El Greco). 오하라 미술관의 사무실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라고 한다. 오하라 미술관이 1930년에 지어졌으니, 카페 엘 그레코가 같은 시기에 지어졌다면 88년 된 건물이다. 어쨌든 여러모로 따져도 12여년은 회춘한듯 하고, 그리고 60여년에 걸맛게 커피맛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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