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현금을 거의 쓰지 않고 신용카드로만 쓰다보니 현금이 없을 때가 많다. 오늘 집에 오다가 문득 밀면이 먹고 싶어져서 평소엔 무심히 지나치던 집 앞 밀면집에 들어가보았다.
들어가자마자
"밀면 하나요." 하고 자리에 앉는데, 차림표에 소4500원 대5500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보통, 곱배기'였으면 그냥 보통을 먹었을 건데 '소, 대' 이렇게 되어 있으니 '소'를 먹으면 왠지 양이 적을 것 같았다.
얼른 주방에 가서
"대자로 주세요."하고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장님은 할아버지처럼 보이는데 허름한 남방에 반바지를 입고 불룩한 전대를 허리에 단단히 차고 느리게 움직이는, 말투도 어눌한 분이었다.종업원도 없이 혼자서 홀에서 서빙하고 카운터까지 맡고 있었다. 주방에는 사모님으로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음식도 만들고 설거지도 하고 있었다. 가게 안은 좁고 허름한데 장식도 별로 없어서 정식 식당이라기보다는 마치 배달 전문 치킨 집에 구색 맞추려고 탁자 몇 개 갖다 놓은 듯한 그런 분위기였다.
갑자기 신용카드를 써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급하게 가방을 뒤져 보았다. 앞주머니에서 천 원짜리가 하나씩 나와서 네 장. 지갑을 열어보니 현금은 하나도 없고, 가방 안을 샅샅이 뒤지니 천 원짜리가 하나 더 나와서 오천 원이 되었다. 그리고 백 원짜리 하나와 십 원짜리 하나.
얼른 주방에 뛰어가서 "소자로 바꿀게요."하고 오천 원을 소중한 듯이 한 손에 꼭 쥐고 자리에 앉았다.
할아버지 사장님이 물을 갖다 주러 자리에 오면서 그 광경을 보셨는지 물을 주고 주방 쪽으로 가더니 할머니에게
"밀면 좀 많이 뽑히면 남기지 말고 그냥 다 담아 줘."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내가 밀면 대자 먹고 싶었는데 돈이 모자라서 소자를 먹어야 하는 가난한 학생쯤으로 보였나보다. 나는 애써 못 들은 척했다.
잠시 후 사장님이 먹음직스러운 밀면을 가져다 주면서
"좀 많이 뽑았으면 많이 줬을 텐데, 미안해요."라고 말하였다.
나는 일본 소설 '우동 한 그릇'이 떠올랐다. 그리고 몇 년 전에 부산역 앞 보리밥 집에서 있었던 일도 생각났다.
그 때도 저녁 무렵에 배가 고파서 보리밥 집에 갔는데,
"카드 됩니까?" 이러니까 이모님이 단호하게
"안 됩니다." 하였다.
터덜터덜 돌아나오다가 호주머니와 가방을 뒤져 보았더니 백 원짜리, 오십 원짜리, 오백 원짜리 다 모아서 이천오백 원이 되었다.
나는 보리밥 집으로 되돌아 가서
"보리밥 하나 주세요." 하고는 자리에 앉아 동전 무더기를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쌓아 두었다.
이모님이 그 모습을 보았는지 보리밥을 산더미처럼 담아 와서는
"학생 많이 먹어. 사장님 보기 전에 얼른 먹어."라고 하였다(물론 나는 그때 학생은 아니고 선생이었지만).
그리고 밥 먹는 내 모습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이모님의 눈길을 느끼면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대한 허겁지겁 달고 맛있는 듯이 먹어치웠다. 배가 미친듯이 불렀다.
오늘 밀면도, 할아버지 사장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국물까지 남김없이 먹어 치우고 싶었지만, 양이 너무 많았다. 아마 단순한 소자는 아니었으리라.
내가 밥을 많이 먹게 생긴 건지, 굶고 다니는 사람처럼 보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참 고마운 사람들이다. 이런 따뜻하고 인정 넘치는 사회를 아이들에게 물려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