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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pnumsa Mar 28. 2021

[학교] 풍자 수업

풍자 단원에서 풍자를 표현하는 수행평가


풍자 단원을 배우고 풍자를 표현하는 수행평가를 한다면, 학생 입장에서 모든 것을 창작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그래도 굳이 풍자를 표현하도록 만들겠다면 ‘패러디’ 정도가 적당할 것이다.


[1] 이것은 진지한 글이다.

과학 논문을 읽고 이해하는 방법: 비과학자를 위한 안내서

1. 시작하기 전에: 몇 가지 일반적인 조언
과학적 논문을 읽는 것은 과학에 대한 블로그나 신문기사를 읽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과정이다. 단순히 다른 순서로 정리된 섹션을 읽는 것뿐만 아니라 읽으며 필기하고,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 더 자세한 내용을 보기 위해 다른 논문도 아마 살펴봐야 할 것이다. 처음에는 논문 하나 읽는데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인내심을 가져라. 경험이 늘어날 때마다 이 과정은 더욱 빨라진다.
대다수의 주요 연구 논문은 초록(Abstract), 서론(Introduction), 절차, 결과, 그리고 결론/해석/토론으로 구성된다. 이 순서는 어느 저널에서 출간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저널에서는 연구에 대한 중요 내용이 포함된 추가 파일을 요구한다. (온라인 정보 부록 Supplementary Online Information 이라 부른다.) 만약 이런 저널에 온라인으로 출간할 때는 논문에 포함되어야 한다. (이 파일을 건너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논문 읽기를 시작하기 전에 저자와 협회를 기록한다. 협회에 따라 제출자를 잘 존중하기도 하지만 (e.g. University of Texas) 어떤 협회는 법적으로는 연구 협회지만 실제로는 의제 중심인 경우도 있다. (e.g. Discovery Institute) 팁: “Discovery Institute”를 구글에서 검색해보면 여기에서 나온 논문이 진화론과 관련해 과학적 권위를 갖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저널이 어디에서 출간되었는지도 기록한다. 좋은 평판의 (생물의학) 저널은 Pubmed와 같은 곳에 색인이 있다. 물론 생물의학 저널이 아니라면 Pubmed에 없다. 더 넓은 과학 영역에서의 저널 색인은Web of Science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불확실한 저널은 주의한다.
읽는 동안, 이해할 수 없는 모든 단어를 적고 확인해봐야 한다. (그렇다, 모든 단어다. 이게 완전 고통스럽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어휘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 논문을 이해할 수 없다. 과학에서 쓰이는 어휘는 극단적으로 정확한 의미를 담고 있다.)
2. 주요 연구 논문을 읽는 단계별 방법
2.1. 초록이 아닌 서론부터 읽기 시작한다
초록은 밀도 높은 첫 단락으로 논문에서 가장 앞에 위치한다. 많은 비과학자가 논문에서 이 부분을 먼저 읽고 과학적인 논의를 시작한다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최악의 관례다.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읽기 위한 논문을 고를 때, 제목과 초록의 조합에 기초해 내 흥미와 연관성이 있어 보이는 논문을 고른다. 하지만 깊게 읽기 위해 조합된 여러 논문 묶음이라면, 나는 항상 초록을 가장 마지막에 읽는다. 이런 방식을 사용하는 이유는 초록이 전체 논문의 내용을 간결하게 요약한 것으로 이것을 먼저 읽는 것으로 연구 결과에 대한 저자의 해석을 무의식중에 택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2.2. 큰 질문을 확인한다
“이 논문은 무엇에 대한 것인가” 식의 질문이 아니라 “이 전체 영역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문제는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이 질문은 왜 이 연구가 수행되는가 하는 점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주제에 대한 연구에 어떤 동기부여가 있었는지 그 증거를 자세히 확인한다.
2.3. 다섯 문장 또는 그보다 적게 논문의 배경에 대해 요약한다
여기 도움이 될 만한 질문이 있다:
이 분야에서 큰 질문에 답변하기 이전까지 완료된 연구는 무엇인가? 그 연구에서의 제약은 무엇인가? 저자에 따르면 다음 완료되어야 할 연구는 무엇인가?
이 다섯 가지 질문에 대한 것은 좀 제멋대로인 경향이 있지만, 연구의 맥락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간결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강제성을 준다. 연구를 이해하기 위해 왜 이 연구가 완료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2.4. 세부적인 질문을 확인한다
저자가 이 연구를 통해 정확히 답변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엔 여러 답이 있을 수도 있고 단 하나의 답이 있을 수도 있다. 그 질문을 적어본다. 만약 그 연구를 한번 또는 그 이상 점검해서 비어있는 가설(귀무가설)이 있는지 확인한다.
비어있는 가설이 어떤 의미인지 확신이 없다면 이 글을 읽어본다. 내가 앞서 작성한 포스트에서 언급한 글(이런 글)을 읽고 어떤 부분이 비어있는 가설인지 확인한다. 물론 모든 논문에 대해서 비어있는 가설을 확인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2.5. 접근 방식을 확인한다
저자가 세부적인 질문들에 대해 어떻게 답변하려고 하는가?
2.6. 이제 절차(methods)를 읽는다.
각각의 실험에 대한 다이어그램을 그리고 저자가 정확히 무엇을 했는지 표현한다.
내 뜻은 말 그대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 연구에 대해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세부적인 내용을 포함한다. 다음 그림은 내가 오늘 읽은 논문의 절차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Battaglia et al. 2013: “The first peopling of South America: New evidence from Y-chromosome haplogroup Q”) 이 그림은 물론 당신이 필요로 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 논문은 내 분야에 해당하고 나도 이런 절차를 항상 사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이 내용을 읽다가 “네트워크를 통해 감소-미디안 절차로 데이터를 처리한다”가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면 찾아봐야 한다.
이 연구의 세부적인 내용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절차에 대해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 일은 논문 리뷰어가 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기초적인 절차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정도가 되지 않는다면 결과를 읽을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2.7. 결과를 읽는다.
각각의 연구, 수치 그리고 표에서 나타나는 결과를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문단으로 요약한다. 아직 그 결과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 결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만 작성한다.
일반적으로 좋은 논문이라면 가장 결과의 중요한 부분은 수치와 표에 요약되어 있다는 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을 유의해서 보자. 몇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 온라인 정보 부록을 확인해야 할 수도 있다.
만약 이 논문에서 사용된 통계적 질의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충분한 배경지식이 없다면 이 부분이 어려워질 수 있다. 이 포스트에서 통계에 대해 가르칠 수 없지만 다음 글(123)에서 기초적인 부분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 내용에 대해 친숙해질 것을 강력하게 권한다.
3. 결과에서 주의깊게 봐야 할 부분
“유효한 significant”나 “유효하지 않은 non-significant” 같은 표현은 언제든 사용할 수 있다. 이 단어는 명확한 통계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내용은 이 글을 참고한다.
그래프가 있다면 거기에 오차 막대가 포함되어 있는가? 특정 분야 연구에서는 자신감 결여로 큰 차이가 발생하는데 주요한 적신호로 볼 수 있다.
표본 규모. 이 연구의 대상이 10명인가, 10,000명인가? (연구 목적에 따라 10명 규모의 표본도 충분할 수 있지만, 대다수의 연구는 많을수록 좋다.)
3.1. 결과를 활용해 세부적인 질문에 답할 수 있는가? 결과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부분에 대해 생각하기 전까지 다음으로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저자의 해석에 따라 자기 생각을 바꿀 생각이라면 괜찮다. 이런 분석에 관해 초보자라면 이 고민 없이 넘어갈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견해를 읽기 전에 자기 자신의 해석을 형성하는 것은 정말 좋은 습관이다.
3.2. 결론/토론/해석 섹션을 읽는다.
결론에 대해 저자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는가? 저자의 해석에 대해 어떤 대안이 있는가? 저자의 그 연구에서 확인할 수 있는 약점이 없는가? 저자가 놓친 부분은 없는가? (절대 틀릴 일 없다고 가정하지 않는다!) 다음 단계에 대해 어떤 제안을 하는가? 그 제안에 대해 동의하는가?
3.3.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서 초록을 읽는다.
저자가 논문으로 얘기하는 부분과 초록이 일치하는가? 논문을 읽고 생각한 해석과 초록이 일치하는가?
3.4. 마지막 단계: (이 단계를 등한시하지 말 것) 다른 연구자가 이 논문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 하는가?
(자칭이든 타칭이든) 이 분야에서 전문가는 누구인가? 그 전문가가 이 연구에 대해서 비평할 때 이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하는가 아니면 전반적으로 지지하는가?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방법은 구글을 활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은 마지막에 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미리 준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단계는 어떤 분야의 논문을 읽는가에 따라 다른 부분이다. 나에게는 아주 중요하다! 인용된 문헌을 확인해서 저자가 어떤 논문을 인용했는지 확인한다. 이 과정은 이 분야에서 중요한 논문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내 글이 인용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 이건 농담이다. 이 과정으로 유용한 아이디어, 기술의 원천을 찾는 데 도움이 된다.
이제 더 큰 일에 도전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 주에는 쟁점이 많은 논문을 읽을 때 위 방법을 활용해보자. 어떤 식으로 읽고 싶은가? 지난주에 게시한 논문을 함께 읽고 비평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만약 예제를 보고 싶으면 예제: 어떻게 예방접종 안전에 대한 연구를 읽는가를 확인한다.

[2] 이것은 풍자이다.

과학기술논문을 바르게 해석하는 법

- “Scientific Jargon” by Dyrk Schingman, Oregon State University
After several years of studying and hard work, I have finally learned scientific jargon. The following list of phrases and their definitions will help you to understand that mysterious language of science and medicine.
수년간에 걸친 노력 끝에 나는 드디어 과학계의 전문용어들을 익혔다. 다음의 인용문과 그 실제의 뜻에 대한 해설은 과학/의학분야에서 사용하는 신비한 언어들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줄 것이다.
“IT HAS LONG BEEN KNOWN”… I didn’t look up the original reference.
“오래전부터 알려져 왔던 대로…” — 원전을 찾아보지 않았다.
“A DEFINITE TREND IS EVIDENT”…These data are practically meaningless.
“뚜렷한 경향이 드러나듯이…” — 이 데이터는 아무 의미없다.
“WHILE IT HAS NOT BEEN POSSIBLE TO PROVIDE DEFINITE ANSWERS TO THE QUESTIONS”… An unsuccessful experiment, but I still hope to get it published.
“이런 의문점들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구한다는 것에 어려움이 따르지만…” — 실험은 실패했지만 그래도 논문으로 내야겠다.
“THREE OF THE SAMPLES WERE CHOOSEN FOR DETAILED STUDY”…The other results didn’t make any sense.
“샘플 중에서 세 개를 선택하여 분석하였습니다…” — 나머지 샘플은 해석불가능했다.
“TYPICAL RESULTS ARE SHOWN”… This is the prettiest graph.
“대표적인 결과값들을 표시하였습니다…” — 이 그래프가 제일 이쁘죠.
“THESE RESULTS WILL BE IN A SUBSEQUENT REPORT”… I might get around to this sometime, if pushed/funded.
“그것에 대한 결과는 차후의 논문에서 다루어질 것이며…” — 연구비 제대로 받으면 언젠가 쓸 생각입니다.
“THE MOST RELIABLE RESULTS ARE OBTAINED BY JONES”… He was my graduate student; his grade depended on this.
“가장 신뢰할만한 결과는 Jones의 실험에서 얻어진 것으로…” — 그는 내 밑에 있는 대학원생이었고, 학점을 받으려면 그 실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IN MY EXPERINCE”… once
“제 경험에 따르면…” — 한번.
“IN CASE AFTER CASE”… Twice
“여러 사례를 보면…” — 두 번.
“IN A SERIES OF CASES”… Thrice
“일련의 사례들을 보면…” — 세 번.
“IT IS BELIEVED THAT”… I think.
“…라고 추정되어지며…” — 내 생각에는.
“IT IS GENERALLY BELIEVED THAT”… A couple of other guys think so too.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듯이…” — 나 말고도 몇 명 더 그렇게 생각한다.
“CORRECT WITHIN AN ORDER OF MAGNITUDE”… Wrong.
“오차를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참이며…” — 틀렸다.
“ACCORDING TO STATISTICAL ANALYSIS”… Rumorhas it.
“통계학적 분석에 따르면…” — 소문에 따르면,
“A STATISTICALLY ORIENTED PROJETION OF THE SIGNIFICANCE OF THESE FINDINGS”… A wild guess.
“이 실험결과를 통계학적 관점에 따라 해석해 보면…” — 적당히 때려맞춰 보면.
“A CAREFUL ANALYSIS OF OBTAINABLE DATA”… Three pages of notes were obliterated when I knocked over a glass of beer.
“데이터 중에서 입수 가능한 것들을 조심스럽게 분석해 보면…” — 맥주를 엎지르는 바람에 데이터를 적은 노트 3장을 날려먹었다.
“ITIS CLEAR THAT MUCH ADDITIONAL WORK WILL BE REQUIRED BEFORE A COMPLETE UNDERSTANDING OF THIS PHENOMENON OCCURS”… I don’t understand it.
“이 현상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후속적인 연구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바이며…” — 이해할 수 없었다.
“AFTER ADDITIONAL STUDY BY MY COLLEAGUES”… They don’t understand it either.
“동료 학자들에 의한 추가적 연구가 이루어진 다음에…” — 그들도 역시 이해하지 못했다.
“THANKS ARE DUE TO JOE BLOTZ FOR ASSISTANCE WITH THE EXPERIMENT AND TO ANDREA SCHAEFFER FOR VALUABLE DISCUSSIONS”… Mr. Blotz did the work and Ms. Shaeffer explained to me what it meant.
“실험에 도움을 준 Joe Blotz와 의미있는 토론에 동참해 준 Andrea Schaeffer에게 감사드립니다…” — 실험은 Blotz군이 다 했고, 그 실험이 도대체 뭐하는건지 Schaeffer 양이 모두 설명해 주었다.
“A HIGHLY SIGNIFICANT AREA FOR EXPLORATORY STUDY”… A totally useless topic selected by my committee.
“탐구할만한 가치를 갖는 매우 의미있는 분야라고 생각되며…” — 학회에서 정해 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연구주제.
“IT IS HOPED THAT THIS STUDY WILL STIMULATE FURTHER INVESTIGATION IN THIS FIELD”… I quit.
“저의 논문이 이 분야에 있어서의 추가적 연구들에 자극이 되기를 바랍니다…” — 저는 그만둘래요.

[3] 이것은 패러디+풍자이다.

<사례1> 공적영역에서의 언어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

<사례2> 교수어 번역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학교어 사전” 등을 만들어 보게 할 수 있다. (이제는 서비스 끝난 학교어 사전), “백괴사전”, “악마의 사전” 등의 일부를 참고할 만하다.

원본 풍자가 한번 만들어지면 패러디 풍자는 수도 없이 나온다. 가장 흔한 것이 윤오영의 ‘방망이 깎던 노인’이다.


[4] 이것은 풍자가 아니다.

방망이 깎던 노인 - 윤오영

벌써 40여 년 전이다. 내가 갓 세간난 지 얼마 안 돼서 의정부에 내려가 살 때다. 서울 왔다 가는 길에, 청량리역으로 가기 위해 동대문에서 일단 전차를 내려야 했다. 동대문 맞은편 길가에 앉아서 방망이를 깎아 파는 노인이 있었다. 방망이를 한 벌 사 가지고 가려고 깎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 것 같았다.
“좀 싸게 해 줄 수 없습니까?”
했더니,
“방망이 하나 가지고 에누리하겠소? 비싸거든 다른 데 가 사우.”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값을 흥정하지도 못하고 잘 깎아나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깎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깎는 것 같더니, 저물도록 이리 돌려 보고 저리 돌려 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깎고 있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타야 할 차 시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 깎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 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이 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살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깎는다는 말이오?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먼. 차시간이 없다니까요.”
노인은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서 사우. 난 안 팔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차 시간은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깎아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깎다가 놓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깎던 것을 숫제 무릎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곰방대에 담배를 피우고 있지 않는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방망이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다 됐다고 내 준다. 사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방망이다.
차를 놓치고 다음 차로 가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장사를 해 가지고 장사가 될 턱이 없다. 손님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값만 되게 부른다. 상도덕(商道德)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노인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동대문 지붕 추녀를 바라보고 섰다. 그 때, 바라보고 섰는 옆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노인다워 보였다. 부드러운 눈매와 흰 수염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노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減殺)된 셈이다.
집에 와서 방망이를 내놨더니 아내는 이쁘게 깎았다고 야단이다. 집에 있는 것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의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아내의 설명을 들어 보니, 배가 너무 부르면 옷감을 다듬다가 치기를 잘 하고 같은 무게라도 힘이 들며, 배가 너무 안 부르면 다듬잇살이 펴지지 않고 손에 헤먹기 쉽단다. 요렇게 꼭 알맞은 것은 좀체로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죽기(竹器)는 혹 대쪽이 떨어지면 쪽을 대고 물수건으로 겉을 씻고 곧 뜨거운 인두로 다리면 다시 붙어서 좀체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요새 죽기는 대쪽이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예전에는 죽기에 대를 붙일 때, 질 좋은 부레를 잘 녹여서 흠뻑 칠한 뒤에 볕에 쪼여 말린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 한 뒤에 비로소 붙인다. 이것을 소라 붙인다고 한다. 물론 날짜가 걸린다. 그러나 요새는 접착제를 써서 직접 붙인다. 금방 붙는다. 그러나 견고하지가 못하다. 그렇지만 요새 남이 보지도 않는 것을 며칠씩 걸려 가며 소라 붙일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약재(藥材)만 해도 그렇다. 옛날에는 숙지황(熟地黃)을 사면 보통 것은 얼마, 윗질은 얼마, 값으로 구별했고, 구증구포(九拯九暴)한 것은 세 배 이상 비싸다. 구증구포란 아홉 번 쪄내고 말린 것이다. 눈으로 보아서는 다섯 번을 쪘는지 열 번을 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말을 믿고 사는 것이다. 신용이다. 지금은 그런 말조차 없다. 어느 누가 남이 보지도 않는데 아홉 번씩 찔 이도 없고, 또 그것을 믿고 세 배씩 값을 줄 사람도 없다. 옛날 사람들은 흥정은 흥정이요 생계는 생계지만, 물건을 만드는 그 순간만은 오직 아름다운 물건을 만든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을 기울여 공예 미술품을 만들어 냈다.
이 방망이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 노인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장사를 해 먹는담.” 하던 말은 “그런 노인이 나 같은 젊은이에게 멸시와 증오를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물건이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노인을 찾아가서 추탕에 탁주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일요일에 상경하는 길로 그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노인은 있지 아니했다. 나는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맞은편 동대문의 지붕 추녀를 바라보았다. 푸른 창공에 날아갈 듯한 추녀 끝으로 흰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 그 때 그 노인이 저 구름을 보고 있었구나. 열심히 방망이를 깎다가 유연히 추녀 끝에 구름을 바라보던 노인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무심히 “채국동리하(採菊東籬下) 유연견남산(悠然見南山)!” 도연명(陶淵明)의 싯구가 새어 나왔다.
오늘 안에 들어갔더니 며느리가 북어 자반을 뜯고 있었다. 전에 더덕, 북어를 방망이로 쿵쿵 두들겨서 먹던 생각이 난다. 방망이 구경한 지도 참 오래다. 요새는 다듬이질 하는소리도 들을 수가 없다. 만호도의성(萬戶擣衣聲)이니 위군추야도의성(爲君秋夜擣衣聲)이니 애수를 자아내던 그 소리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문득 40년 전 방망이 깎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5] 이것은 풍자+패러디이다.

<사례1>마우스 깎는 노인

벌써 6개월 전이다. 내가 온게임넷에 취직한지 얼마 안되어 메가웹에 들어가 게임 진행요원으로 일할 때다. 마침 프로리그가 열리는 참이라 메가웹에 가서 진행요원 옷을 입고 일단 경기를 진행시켜야 했다.
왼쪽편 경기석 의자에 앉아서 마우스를 셋팅하던 노인이 있었다. 게임을 진행 시키기위해 마우스를 빨리 세팅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컴퓨터 운영체제로 98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냥 닥치고 XP에서 하면 안되냐고 했더니,
“운영체제 하나 가지고 그리 고집이시오? 싫다면 다른 데 가리다.”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더 고집 부리지도 못하고 98을 깔아주며 마우스 셋팅이나 해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차코 열심히 마우스를 셋팅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제어판에 들어가서 이리저리 만져보는가 싶더니, 저물도록 마우스를 이리 돌려보고 저리 돌려 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이내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셋팅하고 있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시작해달라고 해도 못 들은 체한다. 게임시간이 바쁘니 빨리 시작 해달라고 해도 통 못들은채 대꾸가 없다. 점점 중계진은 지쳐가고, 방송시간은 늘어만 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인제는 초조할 지경이다.
더 셋팅하지 아니해도 좋으니 그만 경기 시작해 달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레어를 타야 하이브가 되지, 해쳐리가 제촉한다고 하이브가 되나?”
하면서 오히려 야단이다. 나도 기가 막혀서,
“마우스 잘만 움직이는 데 무얼 더 셋팅한단 말이오?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려, 경기시간이 없다니까.”
노인은
“다른 선수 알아보시우. 난 안 하겠소.”하는 퉁명스런 대답이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경기 시간은 어차피 늦은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수 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셋팅해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볼이 빠지고 끈이 꼬인다니까. 셋팅이라는건 제대로 해놔야지. 셋팅하다가 놓으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투다.
이번에는 셋팅하던 것을 숫제 무릎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화이트보드에다 유성매직으로 무언가를 쓰고 있지 않은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중간광고로 블러드 캐슬만 다섯번 연달아 내보냈다. ‘서지훈, DDR만 안하면…’ 쓰던 매직을 도로 내려놓고, 노인은 또 다시 마우스를 셋팅하기 시작한다.
저러다가는 마우스 볼이 닳아 없어질 것만 같았다. 또 얼마 후에 마우스를 들고 볼을 이리저리 손가락으로 굴려 보더니, 다 됐다고 게임 방으로 들어온다. 사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마우스다.
경기가 마치고 밤 11시쯤에 퇴근해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셋팅을 해 가지고 방송이 될 턱이 없다. 시청자 본위가 아니라 자기 본위다.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노인이다.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퇴근준비를 하다 뒤를 돌아다보니, 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고있다. 그 때, 노인이 갑자기 미소를 얼굴에 가득 머금으며 영구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어딘지 모르게 간지나 보이는, 그 바라보고 있는 옆 모습, 그리고 금방이라도 영구업ㅂ다~ 가 터져나올것 같은 눈매와 입모양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노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심도 조금은 덜해진 셈이다.
집에 와서 오늘 경기 어땠느냐고 물었더니, 아내는 최고의 명경기였다며 야단이다. 그저 흔한 경기들보다 훨씬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별로 대단한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아내의 말을 들어 보면, 양 선수가 서로 공격도 안하고 대치중이면 지루하기만 하고, 서로 치고박고 해도 실수를 서로 연발하면 짜증만 날뿐이며, 그저 관광경기라면 관광당한 선수만 불쌍하다는 것이고, 요렇게 서로 치열하게 공격을 주고 받으면서도 실수하나없이 팽팽한 명경기는 좀처럼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옛날에 친구들과 했던 스타 한판은, 30분 적어도 10분까지는 서로 쳐들어가지 않고 자원을 캐는데 여념이 없어 경기 시간은 항상 1시간씩 되었다. 그러나 요사이 배틀넷에서 스타 한판하려 치면, 개나 소나 벙커링을 하지 않나, 4드론 저글링을 하지 않나 해서 경기시간이 채 10분을 넘지 못한다. 예전에는 게임을 시작할때, 서로 30분까지는 쳐들어가지 말자고 약속을 한다음에 비로소 게임을 시작한다. 이것을 “30분 노러쉬.”라고 한다.
맵만 해도 그렇다. 옛날에는 무한 맵이 대세라, 보통의 것은 미네랄 하나당 10000씩 일렬로 쫘악 늘어서 있고, 그보다 나은것은 미네랄 하나당 50000씩 꽉꽉 들어차 있으며, $$$$$$$$$$$ 아이스 헌터 $$$$$$$$$$$$ 라고 한것은 미네랄이 두 줄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도 있었다.
그만큼 많은 자원을 바탕으로 장시간의 플레이를 약속한것이다. 30분 노러쉬라는 말을 믿고 자원만 죽어라 캐는 것이다. 신용이다. 지금은 그런 말조차 없다. 일단 저그가 앞마당 먹을라 치면 테란은 죽자사자 마린 SCV우르르 달려나와 벙커링에 치즈러쉬다.
플토가 더블넥 하려 치면 저그는 죽자사자 저글링을 왕창 뽑아 넥서스를 날릴려고 안달이다.
옛날 게이머들은 승패는 승패요, 전적은 전적이지만, 게임을 하는 그 순간만은 오직 상대와 게임을 즐긴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순수하게 오랜 시간을 투자해 게임을 즐기며 드라군 8부대 대 히드라 10부대, 캐리어 15대 대 배틀 15대등의 최고의 빅게임을 만들어 냈다. 오랜 기다림덕에 그런 멋지고 화려한 장면이 나왔던 것이다. 그냥 무작정 빨리 경기를 하고 빨리 승패를 가르길 원하는 지금과는 달리 순수하게 게임 그 자체를 즐긴 것이다.
이 마우스 셋팅도 그런 심정에서 셋팅 했을 것이다.
나는 그 노인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무슨 프로게이머를 해 먹는담.” 하던 말은 “그런 노인이 나 같은 일개 진행요원에게 멸시와 증오를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최고의 명경기가 탄생할 수 있담.” 하는말로 바뀌어 졌다.
나는 그 노인을 찾아가 라면이라도 한 박스 사가지고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프로리그 하는 시간에 메가웹에 출근하는 길로 그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노인은 와 있지 아니했다. 주변 사람에게 물어보니 이미 팀을 옮긴지 오래라는 것이다. 짊어지고 있던 라면 한박스를 땅에 떨어트린체 나는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라면 한박스가 금새 온데 간데 없어지는 사이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맞은편 한 서점의 잡지 코너를 바라다 보았다.
수많은 잡지들중 esFORCE 창간호가 눈에 띄었다. 아, 그 때 그 노인이 저렇게 웃고 있었구나. 열심히 마우스를 셋팅하다가 모니터를 바라보던 노인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오늘, 메가웹에 들어갔더니 선수들이 빨리 조인했다고 야단이다. 전에 경기준비가 늦어져 해설자들이 시간때울려고 뻘뻘 흘리던 생각이 난다. 그 때 하던 해설자들의 농담따먹기를 들은지도 참 오래다. 요사이는 전적 5:5 이야기도 들을 수가 없다. 애수를 자아내던 ‘쓰리디 알피지의 리더~” 라는 소리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문득 6개월 전, 마우스를 셋팅하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사례2> 타이어 끼는 노인

벌써 40여 년 전이다. 내가 갓 빡스 깐 지 얼마 안 돼서 남산에 올라가 살 때다. 남산 왔다 가는 길, 왕십리 역으로 가기 위해 퇴계로서 일단 바이크를 내려야 했다. 퇴계로 맞은편 허름한 센타에 앉아서 타이어를 끼는 노인이 있었다. 타이어를 한 짝 갈아가지고 가려고 끼워 달라고 부탁했다.
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 것 같았다. 좀 싸게 해 줄 수 없느냐고 했더니,
“타이어 하나 가지고 에누리하겠소? 비싸거든 다른 데 가 끼시우.”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더 깎지도 못하고 잘 껴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끼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끼는 것 같더니, 저물도록 타이어와 휠을 이리 돌려보고 저리 돌려 보고 꿈뜨기 시작하더니, 이내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쑤셔넣고 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공기 넣어달라고 해도 못 들은 척이다. 시간이 바쁘니 빨리 끼워달라고 해도 통 못들은 척이다. 사실 시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인제는 초조할 지경이다.
“더 끼우지 아니해도 좋으니 그만 달라.”
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끼울 만큼 끼워야 밥이 되지, 신코가 재촉한다고 미쉐린 되나.”
나도 기가 막혀서
“낄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낀다는 말이오.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먼. 시간이 없다니까.”
센터노인은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 끼시우. 나는 안 끼겠소.”
하고 내 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시간이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끼워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휠 망가지고 늦어진다니까. 타이어란 제대로 껴야지 하다가 안끼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끼던 것을 숫제 무릎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곰방대에 담배를 담아 피우고 있지 않은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 센터노인은 또 끼기 시작한다. 저러다가는 타이어는 다 닳아 없어질 것만 같았다.
또, 얼마 후에 타이어와 휠을 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다 됐다고 내준다. 사실 다 끼기는 아까부터 다 껴 있던 휠이다.
시간이 바빠 과속해야 하는 나는 불유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장사를 해 가지고 될 턱이 없다. 손님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값만 눈탱이친다. 상도덕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센타다.’
생각할 수록 화증(火症)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니 센타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퇴계로 도로만 바라보고 섰다.
그 때, 그 바라보고 섰던 옆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센타사장 다워보이고 기름때묻어 드러운 손과 검은 목장갑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워졌다. 눈탱이센타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減殺)된 셈이다.
집에 와서 바이크를 내놨더니 아내는 이쁘게 잘꼇다고 야단이다. 동네에 있는 센타것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저의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아내의 설명을 들어보면, 타이어 어설프게 끼면 힘들어. 라이딩할때 휠벨런스도 안맞고, 같은 타이어라도 그립이 다르며, 공기가 너무 적으면 타이어가 펴지지 않고 슬립해먹기가 쉽다. 요렇게 꼭 알맞는 타이어는 좀체로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센타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바이크는, 카울이 깨지면 빠대를 대고 뜨거운 히팅건으로 말려서 도색을 하면 다시 붙어서 좀처럼 깨지지 않는다. 그러나 요사이 바이크는, 카울이 한번 깨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예전에는 카울에 빠대를 바를 때, 질 좋은 퍼티를 잘 녹여서 흠뻑 칠한 뒤에 비로소 붙인다. 이것을 “빠대친다.”고 한다.수리만 해도 그렇다. 옛날에는 바이크를 사면 국산은 얼마, 그보다 나은 외산것은 얼마의 값으로 구별했고, 두카티같은 유럽산은 3배 이상 비쌌다. 눈탱이 거품이란, 이빨을 까고 구라까기를 아홉 번 한 것이다. 눈으로 보아서는 다섯 번을 깔았는지 열번을 깔았는지 알 수가 없다. 말을 믿고 사는 것이다. 신용이다. 지금은 그런 말조차 없다. 남이 보지도 않는데 무사고일 리도 없고.., 또 말만 믿고 3배나 값을 더 줄 사람도 없다. 
옛날 사람들은 흥정은 흥정이요 생계(生計)는 생계지만, 바이크를 고치는 그 순간만은 오직 훌륭한 물건을 만든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心血)을 기울여 재생 바이크를 만들어 냈다. 이 타이어도 그런 심정에서 꼇을 것이다. 나는 그 노인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장사를 해 먹는담.” 하던 말은 “그런 노인이 나 같은 라이더에게 눈탱이과 구라를 까는 세상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바이크가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센타노인을 찾아가 추탕에 탁주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일요일에 남산에 올라가는 길로 그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그 센타가 있었던 자리에 노인은 와 있지 아니했다. 나는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맞은쪽 센타문의 바이크를 바라다보았다. 푸른 남산으로 달려갈 듯한 바이크 머플러 끝으로 매연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 그 때 그 노인이 저 매연을 보고 있었구나. 열심히 타이어를 끼다가 유연히 머플러 끝의 매연을 바라보던 노인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오늘, 안에 들어갔더니 며느리가 야매정비를 하고 있었다. 전에 VF를 철근으로 용접해서 승천쇼바 만들던 생각이 났다. 바이크를 구경한 지도 참 오래다. 요사이는 엔진 조지는 소리도 들을 수가 없다. 애수(哀愁)를 자아내던 그 소리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문득 사십여 년 전, 타이어 끼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사례3> 과자 포장하던 노인

벌써 40여 년 전이다. 내가 갓 세간난 지 얼마 안 돼서 의정부에 내려가 살 때다. 서울 왔다 가는 길에, 청량리역으로 가기 위해 동대문에서 일단 전차를 내려야 했다. 동대문 맞은편 길가에 앉아서 과자를 맹글어 파는 노인이 있었다. 과자를 한 봉지 사 가지고 가려고 포장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 것 같았다.
“좀 싸게 해 줄 수 없습니까?”
했더니,
“과자 한 봉지 가지고 에누리하겠소? 비싸거든 수입 과자 사우.”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값을 흥정하지도 못하고 잘 만들어나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질소를 넣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넣는 것 같더니, 저물도록 이리 돌려 보고 저리 돌려 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넣고 있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타야 할 차 시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 넣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 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넣을 만큼 넣어야 과자가 성하지, 중력이 재촉한다고 저절로 줄어드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살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넣는다는 말이오?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먼. 차시간이 없다니까요.”
노인은 퉁명스럽게,
“수입 과자가게 가서 사우. 난 안 팔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차 시간은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넣어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넣다가 놓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포장하던 것을 숫제 무릎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곰방대에 담배를 피우고 있지 않는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과자봉지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다 됐다고 내 준다. 사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과자이다.
차를 놓치고 다음 차로 가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장사를 해 가지고 장사가 될 턱이 없다. 손님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값만 되게 부른다. 상도덕(商道德)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노인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근로자 임금을 내려다보고 섰다. 그 때, 바라보고 섰는 옆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재벌다워 보였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흰 수염에 나는 더욱 울화통이 치밀었다. 노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가 일어난 샘이다.
집에 와서 방망이를 내놨더니 아내는 이쁘게 포장했다고 야단이다. 먹던 과자보다 참 온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의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아내의 설명을 들어 보니, 질소가 너무 적거나 내용물이 너무 많으면 과자가 으레 깨지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요렇게 꼭 알맞은 것은 좀체로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엣날부터 내려오는 죽기(竹器)는 혹 대쪽이 떨어지면 쪽을 대고 물수건으로 겉을 씻고 곧 뜨거운 인두로 다리면 다시 붙어서 좀체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요새 죽기는 대쪽이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예전에는 죽기에 대를 붙일 때, 질 좋은 부레를 잘 녹여서 흠뻑 칠한 뒤에 볕에 쪼여 말린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 한 뒤에 비로소 붙인다. 이것을 소라 붙인다고 한다. 물론 날짜가 걸린다. 그러나 요새는 접착제를 써서 직접 붙인다. 금방 붙는다. 그러나 견고하지가 못하다. 그렇지만 요새 남이 보지도 않는 것을 며칠씩 걸려 가며 소라 붙일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약재(藥材)만 해도 그러다. 옛날에는 숙지황을 사면 보통 것은 얼마, 윗질은 얼마, 값으로 구별했고, 구증구포한 것은 세 배 이상 비싸다, 구증구포란 아홉 번 쪄내고 말린 것이다. 눈으로 보아서는 다섯 번을 쪘는지 열 번을 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말을 믿고 사는 것이다. 신용이다. 지금은 그런 말조차 없다. 어느 누가 남이 보지도 않는데 아홉 번씩 찔 이도 없고, 또 그것을 믿고 세 배씩 값을 줄 사람도 없다. 옛날 사람들은 흥정은 흥정이요 생계는 생계지만, 물건을 만드는 그 순간만은 오직 건강에 좋은 과자를 만든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을 기울여 공예 미술품을 만들어 냈다.
이 과자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 노인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장사를 해 먹는담.’ 하던 말은 ‘그런 노인이 나 같은 젊은이에게 멸시와 증오를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물건이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노인을 찾아가서 마켓오 과자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일요일에 상경하는 길로 그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노인은 있지 아니했다. 나는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맞은편 동대문의 소비자들을 바라보았다. 수입과자 사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 위로 흰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 그 때 그 노인이 저 구름을 보고 있었구나. 열심히 방망이를 깎다가 유연히 추녀 끝에 구름을 바라보던 노인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무심히 ‘채국동리하(採菊東籬下) 유연견남산(悠然見南山)!’ 도연명(陶淵明)의 싯구가 새어 나왔다.
오늘 안에 들어갔더니 며느리가 수입과자 포장을 뜯고 있었다. 전에 고기보다 비싼 포카칩 먹던 생각이 난다. 국산과자 구경한 지도 참 오래다. 요새는 과자 봉지 터지는 소리도 들을 수가 없다. 만호도의성(萬戶擣衣聲)이니 위군추야도의성(爲君秋夜擣衣聲)이니 애수를 자아내던 그 소리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문득 40년 전 질소를 주입하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사례4> 과제 깎던 선배

벌써 3개월 전이다. 내가 입학한 지 얼마 안 돼서 용지관에 살 때다. 도서관 왔다 가는 길에, 팔달관으로 가기 위해 성호대교 앞을 지나야 했다. 성호대교 맞은편 길가에 앉아서 과제를 해주는 4학년이 있었다. 수학1 손과제를 끝내려고 문제를 풀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 것 같았다.
“좀 싸게 해 줄 수 없습니까?”
했더니,
“과제 하나 가지고 에누리하겠소? 비싸거든 다른 데 가시오.”
대단히 무뚝뚝한 선배였다. 값을 흥정하지도 못하고 잘 풀어나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문제를 풀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푸는 것 같더니, 저물도록 Disk Method로 풀어 보고 Shell Method로 풀어 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다시 풀고 있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가야 할 수업시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 풀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 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쪼갤만큼 쪼개야 미분이 되지, 회전체가 재촉한다고 적분이 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과제 주인이 좋다는데 무얼 더 푼다는 말이오? 선배, 외고집이시구먼. 수업시간에 늦었다니까요.”
선배는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시오. 난 안 풀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수업시간은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풀어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풀이가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과제란 제대로 끝내야지, 풀다가 놓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풀던 것을 숫제 무릎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컵밥을 먹고 있지 않은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과제를 놓고 이리저리 넘겨 보더니 다 됐다고 내 준다. 사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과제다.
수업을 놓친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장사를 해 가지고 장사가 될 턱이 없다. 손님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값만 되게 부른다. 솔루션(率累宣)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선배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니 선배는 태연히 허리를 펴고 게시판의 돌겜 대회 포스터를 바라보고 섰다. 그때, 바라보고 섰는 옆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선배다워 보였다. 부드러운 눈매와 수염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선배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減殺)된 셈이다.
기숙사에 와서 과제를 내놨더니 동기는 이쁘게 풀었다고 야단이다. 자기가 한 것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동기의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동기의 설명을 들어 보니, 풀이가 너무 길면 길다고 학점이 깎이며, 풀이가 너무 짧으면 짧다고 학점이 깎인단다. 요렇게 알맞은 것은 좀체로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선배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옛날부터 과제(課題)는 교수가 내주는 날에 시작하면 좀체로 못 끝낼 법이 없다. 그러나, 요새 과제는 한 번 미루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예전에는 과제를 할 때, 질 좋은 A4에 3색 볼펜으로 풀이를 쓴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 한 뒤에 비로소 제출한다. 이것을 삽질한다고 한다. 물론 날짜가 걸린다. 그러나 요새는 족보를 써서 그대로 옮긴다. 금방 제출한다. 그러니 견고하지가 못하다. 그렇지만 요새 남이 보지도 않는 것을 며칠씩 걸려 가며 삽질할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시험(試驗)만 해도 그러다. 옛날에는 기말고사(期末考査)를 보면 공부하면 몇 점, 공부 안하면 몇 점, 점수로 구별했고, 복습(復習)한 것은 세 배 이상 높다. 복습이란 수업 내용을 다시 공부하는 것이다. 눈으로 보아서는 다섯 번을 공부했는지 열 번을 공부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문제를 풀고 점수를 받는 것이다. 신용이다. 지금은 그런 것조차 없다. 어느 누가 남이 보지도 않는데 아홉 번씩 복습할 이도 없고, 또 그것을 믿고 세 배씩 학점을 줄 교수도 없다. 옛날 대학생들은 학점은 학점이요 재수강은 재수강이지만, 시험을 보는 그 순간만은 오직 아름다운 문제를 푼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을 기울여 학점을 받아 냈다.
이 과제도 그런 심정에서 끝냈을 것이다. 나는 그 선배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장사를 해 먹는담.” 하던 말은 “그런 선배가 나 같은 새내기에게 멸시와 증오를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과제가 탄생할 수 있담.”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선배를 찾아가서 수원통닭이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월요일에 1교시 수업 가는 길로 그 선배를 찾았다. 그러나 그 선배가 앉았던 자리에 선배는 있지 아니했다. 나는 그 선배가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맞은편 게시판의 돌겜 대회 포스터를 바라보았다. 떨어져 나갈 듯한 돌겜 포스터 밑으로 대기업 하계 인턴십 포스터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 그 때 그 선배가 저 포스터를 보고 있었구나. 열심히 과제를 하다가 유연히 돌겜 포스터 아래 인턴십 포스터를 바라보던 선배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무심히 “아주 나이스(亞洲 娜利秀)!” 세븐틴(十七)의 싯구가 새어 나왔다.
오늘 기숙사에 들어갔더니 동기가 과제를 하고 있었다. 전에 수학, 영어 과제를 하던 생각이 난다. 족보 없는 과제 구경한 지도 참 오래다. 요새는 전공서 넘기는 소리도 들을 수가 없다. 애수를 자아내던 그 소리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문득 3개월 전 과제하던 선배의 모습이 떠오른다.

<사례5> 강의 하던 노인

벌써 30여 년 전이다. 내가 갓 군대를 제대한 지 얼마 안 돼서 전공과목을 집중수강할 때다. 취업 준비하는 과정에, 4학년 때 학점부담을 덜기 위해 2~3학년 때 전공과목을 많이 들어야 했다. 전공과목 시간표를 짜다 보니 마침 원하는 시간표에 딱 맞는 전공과목을 강의하는 노인이 있었다. 전공학점 좀 쉽게 따 가려고 잘 가르쳐 달라고 부탁을 했다. 쉬운 내용을 굉장히 어렵게 가르치는 것 같았다.
“좀 쉽게 해줄 수 없습니까?”
했더니,
“전공과목 하나 가지고 거저 먹겠소? 어렵거든 다른 과목 들으시우.”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학점을 흥정하지도 못하고 잘 가르쳐나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가르치고 있었다. 처음에는 쉽게 가르치는 것 같더니, 저물도록 이리 가르쳐보고 저리 가르쳐보고 어려워지기 시작하더니, 마냥 어렵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되겠는데, 자꾸만 더 깊이 가르치고 있었다.
인제 다 알겠으니 그냥 넘어가자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중간고사를 봐야 할 시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 깊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하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이 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배우는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가르친다는 말이오?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먼. 시험이 코앞이라니까요.”
노인은 퉁명스럽게,
“다른 교수한테 재이수 하시우. 난 학점 못주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듣고 있다가 그냥 포기할 수도 없고, 시험은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가르쳐 보시오.”
“글쎄, 불평을 하면 점점 어려워지고 늦어진다니까. 배우려면 제대로 배워야지, 하다가 대충 넘어가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가르치던 것을 숫제 수식(數式)으로 바꾸더니 태연스럽게 외계어를 하고 있지 않는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수식들을 이리저리 변형해보더니 다 됐다고 수업을 마쳐준다. 사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수업이다.
시험을 망치고 재이수를 기약해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강의를 해 가지고 폐강이 안 될 턱이 없다. 학생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고생만 되게 시킨다. 강의평가(講義評價)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노인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강의실 창밖 하늘을 바라보고 섰다. 그때, 바라보고 섰는 옆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노인다워 보였다. 부드러운 눈매와 흰 수염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노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減殺)된 셈이다.
졸업을 하고 취업을 했더니 회사는 전공지식이 출중하다고 야단이다. 다른 학교 출신보다 참 깊이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른 학교 출신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회사의 설명을 들어 보니, 이론에만 너무 매몰되어 있으면 실무감각이 떨어지고 같은 업무라도 오래 걸리며, 직관에만 너무 매몰되어 있으면 실무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고 확장이 잘 안 된단다. 요렇게 꼭 알맞은 인재는 좀체로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엣날부터 내려오는 서적(書籍)은 혹 페이지가 떨어지면 실로 꿰매면 다시 붙어서 좀체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요새 서적은 페이지가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예전에는 제본을 할 때, 몇 장씩 실로 꿰어 묶음을 만든 뒤 이 묶음을 다시 실로 엮어 책을 만든다. 이렇게 하기를 수십 번 하고 나서 비로소 두꺼운 표지를 붙인다. 이것을 양장제본이라 한다. 물론 날짜가 걸린다. 그러나 요새는 접착제를 써서 직접 붙인다. 금방 붙는다. 그러나 견고하지가 못하다. 그렇지만 요새 남이 보지도 않는 것을 며칠씩 걸려 가며 양장제본한 책이 많을 것 같지 않다.
중고서적(中古書籍)만 해도 그렇다. 옛날에는 헌책을 사면 보통 것은 얼마, 윗질은 얼마, 값으로 구별했고, 한 번도 안 읽은 것은 세 배 이상 비싸다. 한 번도 안 읽은 책이란 새로 사서 첫 페이지도 넘겨본 흔적이 없는 것이다. 눈으로 보아서는 한 번을 읽었는지 열 번을 읽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말을 믿고 사는 것이다. 신용이다. 지금은 그런 말조차 없다. 어느 누가 남이 보지도 않는데 정직하게 팔 이도 없고, 또 그것을 믿고 세 배씩 값을 줄 사람도 없다. 옛날 사람들은 흥정은 흥정이요 생계는 생계지만, 물건을 파는 그 순간만은 오직 정직하게 물건을 판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을 기울여 헌책을 돌려보았다.
이 과목도 그런 심정에서 가르쳤을 것이다. 나는 그 노인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가르쳐서 무슨 강의를 해 먹는담.’ 하던 말은 ‘그런 노인이 나 같은 젊은이에게 멸시와 증오를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강의가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노인을 찾아가서 추탕에 탁주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해 스승의 날에 모교를 방문하는 길로 그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그 노인이 가르치던 자리에 노인은 있지 아니했다. 나는 그 노인이 가르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강의실 창밖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른 창공에 흰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 그 때 그 노인이 저 구름을 보고 있었구나. 열심히 강의를 하다가 유연히 하늘 위 구름을 바라보던 노인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무심히 ‘채국동리하(採菊東籬下) 유연견남산(悠然見南山)!’ 도연명(陶淵明)의 시구가 새어 나왔다.
오늘 안에 들어갔더니 딸내미가 동영상 강의를 보고 있었다. 전에 전공과목들을 캠퍼스에서 들었던 생각이 난다. 대학 구경한 지도 참 오래다. 요새는 스승에게 인사하는 소리도 들을 수가 없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니 교학상장(敎學相長)이니 애수를 자아내던 그 소리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문득 30년 전 강의 하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5] 피천득의 ‘은전 한 닢’도 자주 패러디된다.

은전 한 닢- 피천득

내가 상하이에서 본 일이다. 
늙은 거지 하나가 전장에 가서 떨리는 손으로 일 원짜리 은전 한 닢을 내놓으면서,
“황송하지만 이 돈이 못쓰는 것이나 아닌지 좀 보아 주십시오.”하고 그는 마치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과 같이 전장 사람의 입을 쳐다본다. 전장 주인은 거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돈을 두들겨 보고
“좋소.”
하고 내어 준다. 그는 ‘좋소’라는 말에 기쁜 얼굴로 돈을 받아서 가슴 깊이 집어 넣고 절을 몇 번이나 하며 간다. 그는 뒤를 자꾸 돌아보며 얼마를 가더니 또 다른 전장을 찾아 들어갔다. 품 속에 손을 넣고 한참 꾸물거리다가 그 은전을 내어 놓으며,
“이것이 정말 은으로 만든 돈이오니까? “ 하고 묻는다. 전장 주인도 호기심 있는 눈으로 바라보더니,
“이 돈을 어디서 훔쳤어?” 거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러면 길바닥에서 주웠다는 말이냐?”
“누가 그렇게 큰돈을 빠뜨립니까? 떨어지면 소리는 안 나나요? 어서 도로 주십시오.”
거지는 손을 내밀었다. 전장 사람은 웃으면서
“좋소.”
하고 던져 주었다. 그는 얼른 집어서 가슴에 품고 황망히 달아난다. 뒤를 흘끔흘끔 돌아다보며 얼마를 허덕이며 달아나더니 별안간 우뚝 선다. 서서 그 은전이 빠지지나 않았나 만져 보는 것이다. 거친 손가락이 누더기 위로 그 돈을 쥘 때 그는 다시 웃는다. 그리고 또 얼마를 걸어가다가 어떤 골목 으슥한 곳으로 찾아 들어가더니 벽돌담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돈을 손바닥에 놓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열중해 있었는지 내가 가까이 선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누가 그렇게 많이 도와 줍디까?”
하고 나는 물었다. 그는 내 말소리에 움찔하면서 손을 가슴에 숨겼다. 그리고는 떨리는 다리로 일어서서 달아나려고 했다.
“염려 마십시오, 뺏어가지 않소.”
하고 나는 그를 안심시키려 하였다.
한참 머뭇거리다가 그는 나를 쳐다보고 이야기를 하였다.
“이것은 훔친 것이 아닙니다. 길에서 얻은 것도 아닙니다. 누가 저 같은 놈에게 일 원짜리를 줍니까? 각전(角錢) 한 닢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동전 한 닢 주시는 분도 백에 한 분이 쉽지 않습니다. 나는 한 푼 한 푼 얻은 돈에서 몇 닢씩 모았습니다. 이렇게 모은 돈 마흔 여덟 닢을 각전 닢과 바꾸었습니다. 이러기를 여섯 번을 하여 겨우 이 귀한 ‘대양(大洋)’ 한 푼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돈을 얻느라고 여섯 달이 더 걸렸습니다.”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렀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애를 써서 그 돈을 만들었단 말이오? 그 돈으로 무얼 하려오?”
하고 물었다. 그는 다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이 돈 한 개가 갖고 싶었습니다.“

<사례> 학점 한 닢

내가 학교에서 본 일이다. 
늙은 복학생 하나가 학과사무실에 가서 떨리는 손으로 4.2 짜리 성적 증명서 한 장을 내 놓으면서, “황송하지만 이 성적으로 취직이나 할 수 있는지 좀 보아 주십시오.”
하고 그는 마치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과 같이 취업담당의 입을 쳐다본다. 조교는 복학생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성적표를 대충 훑어보고 “좋소”하고 내어 준다. 그는 “좋소”라는 말에 기쁜 얼굴로 성적표를 받아서 가슴 깊이 집어 넣고 절을 몇 번이나 하며 간다. 그는 뒤를 자꾸 돌아다 보며 얼마를 가더니, 또 와우관 취업정보센터를 찾아 들어갔다. 품 속에 손을 넣고 한참을 꾸물거리다가 그 성적표를 내어 놓으며,
“이것이 정말 평점 4.2 입니까?”
하고 묻는다. 대기업 직원도 호기심 있는 눈으로 바라다보더니,
“이 성적을 어디서 고쳤어?”
복학생은 떨리는 목소리로,
“아닙니다. 아니예요.”
“그러면 교수한테 빌어서 받았다는 말이냐?”
“누가 그렇게 성적을 올려줍니까? 올려주면 상대평가는 안 하나요? 어서 도로 주십시오.”
복학생은 손을 내밀었다. 대기업 직원은 웃으면서 “좋소”하고 던져 주었다.
그는 얼른 집어서 가슴에 품고 황망히 달아난다. 뒤를 흘끔 흘끔 돌아다보며 얼마를 허덕이며 달아나더니 별안간 우뚝 선다. 서서 그 성적표가 빠지지나 않았나 만져보는 것이다. 잉크 묻은 손가락이 외국어학원 파일 안으로 그 성적표를 쥘 때 그는 다시 웃는다. 그리고 또 얼마를 걸어가다가 어떤 골목 으슥한 곳으로 찾아 들어가더니, 벽돌담 밑에 쭈그리고 앉아서 성적표 손바닥에 들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얼마나 열중해 있었는지 내가 가까이 간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누가 그렇게 많이 올려 줍디까?”
하고 나는 물었다. 그는 내 말소리에 움칠하면서 성적표를 가슴에 숨겼다. 그리고는 떨리는 다리로 일어서서 달아나려고 했다.
“염려 마십시오. 같이 수강하지 않소.”
하고 나는 그를 안심시키려고 하였다. 한참 머뭇거리다가 그는 나를 쳐다보고 이야기를 하였다.
“이것은 올린 것이 아닙니다. 교수한테 잘 보여서 얻은 것도 아닙니다. 누가 저 같은 놈에게 4.2를 줍니까? 족보 한 번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필기 보여 주시는 분도 백에 한 분이 쉽지 않습니다. 나는 한 장 한 장 얻은 프린트로 몇 장씩을 모았습니다. 이렇게 모은 교재로 재수강을 해 씨뿔을 에이로 바꾸었습니다. 이러기를 여섯 번을 하여 겨우 이 귀한 4.2 학점 한 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학점을 얻느라고 졸업보다 두 학기가 더 걸렸습니다..”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렀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애를 써서 그 성적을 만들었단 말이오? 어차피 취직도 안되는데 그 성적으로 무엇을 하려오? 그 성적으로 무엇을 하려오?
하고 물었다. 그는 다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그냥, 4점을 한번 넘어보고 싶었습니다.“

<사례> 비트코인 한 닢

내가 강남역에서 본 일이다. 늙은 거지 하나가 가상화폐 거래소에 가서 떨리는 손으로 34자리 비트코인 지갑 주소가 적힌 종이를 보이면서, “황송하지만 이 1비트코인이 못쓰는 것이나 아닌지 좀 보아 주십시오.” 하고 그는 마치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과 같이 거래소 사람의 입을 쳐다본다.
거래소 대리는 거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계좌를 조회해 보고, “좋소.” 하고 내어 준다. 그는 ‘좋소’라는 말에 기쁜 얼굴로 주소가 적힌 메모를 받아서 가슴 깊이 집어넣고 절을 몇 번이나 하며 간다. 그는 뒤를 자꾸 돌아보며 얼마를 가더니 또 다른 거래소를 찾아 들어갔다. 품속에 손을 넣고 한참 꾸물거리다가 그 종이 메모를 내어 놓으며, “이것이 정말 2000만 원 정도에 거래된다는 1비트코인이오니까?” 하고 묻는다.
거래소 책임자도 호기심 있는 눈으로 바라보더니, “이 비트코인을 어디서 해킹했어?” 거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러면 채굴이라도 했단 말이냐?” “요즘 누가 비트코인을 채굴한답니까? GTX1080이 달린 컴퓨터는커녕 전기세 낼 돈도 없습니다. 어서 도로 주십시오.” 거지는 손을 내밀었다. 거래소 사람은 웃으면서, “좋소.” 하고 던져 주었다.
그는 얼른 집어서 가슴에 품고 황망히 달아난다. 뒤를 흘끔흘끔 돌아다보며 얼마를 허덕이며 달아나더니 별안간 우뚝 선다. 서서 비트코인 주소가 제대로 적혔는지, 대소문자는 정확한지 확인해 보는 것이다. 거친 엄지손가락이 스마트폰 화면에 닿을 때마다 그는 다시 웃는다. 그리고 또 얼마를 걸어가다가 어떤 골목 으슥한 곳으로 찾아 들어가더니 벽돌담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다시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열중해 있었는지 내가 가까이 선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누가 그렇게 많이 도와줍디까?” 하고 나는 물었다. 그는 내 말소리에 움찔하면서 손을 가슴에 숨겼다. 그리고는 떨리는 다리로 일어서서 달아나려고 했다. “염려 마십시오, 뺏어가지 않소.” 하고 나는 그를 안심시키려 하였다. 한참 머뭇거리다가 그는 나를 쳐다보고 이야기를 하였다.
“이것은 해킹한 것이 아닙니다. 채굴한 것도 아닙니다. 누가 저 같은 놈에게 1비트코인을 줍니까? 0.0001비트코인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0.00001 주시는 분도 백에 한 분이 쉽지 않습니다. 나는 블로그며 카페에 비트코인 거래 정보를 올리고 제 지갑 주소에 기부를 청해 1사토시, 1사토시를 조금씩 모았습니다. 이렇게 모은 사토시를 0.00001비트코인 바꾸었습니다. 이러기를 10만 번 하여 겨우 이 귀한 1비트코인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비트코인을 얻느라고 여섯 달이 더 걸렸습니다.”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렀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애를 써서 비트코인을 만들었단 말이오? 그 비트코인으로 무얼 하려오?” 하고 물었다. 그는 다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이 비트코인 한 개가 갖고 싶었습니다.”

[6] 이밖에 “허생전”의 패러디도 엄청 많다.


사실, 교사 자신이 “풍자”를 표현하는 시나 소설을 한 번 창작해 보면, 학생들에게 이 수행평가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만약 본인이 잘 해낸다면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 아이들에게 본인이 쓴 예시를 보여주고, “너희도 해 봐. 내가 도와줄게.” 하면 수행평가는 바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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