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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pnumsa Mar 11. 2022

슬픔이 기쁨에게

-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을 위하여

1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 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2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3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이 시는 번호 매긴 3부분으로 나눠서 이해가 됩니다. 담화의 구성 요소에 맞춰 보겠습니다.     

1, 2의 의미는 쉽게 이해와 합의가 될 것입니다. 슬픔이 기쁨에게 하는 3번째의 말이 이 시의 핵심일 테니 이 부분을 살펴 봅시다.      


ㄱ.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ㄴ.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ㄷ.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ㄱ을 보면, ‘슬픔’은 세상의 함박눈을 멈출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입니다.

ㄴ을 보면, ‘슬픔’은 (1)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2)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3) 눈 그친 눈길을 기쁨과 함께 걷겠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ㄷ을 보면, ‘슬픔’은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쁨과 함께 걷겠다고 합니다. ㄷ은 ㄴ과 같은 말로 보입니다. ㄴ에서는 그냥 걷겠다고 했는데, ㄷ을 보면 걸어가며 이야기도 할 계획입니다. 그러면 3은 둘로 정리됩니다.     


ㄱ.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ㄴ.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걸으며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     


1: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2: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3

ㄱ. 나는 이제 함박눈을 멈추겠다.

ㄴ. 나는 이제 슬픔의 힘에 대해 이야기하며 너와 눈길을 걷겠다.     


그런데 1, 2의 흐름으로 보아 3의 ‘-겠다’는 슬픔과 기다림을 주는 ‘구체적인 행위/방법’을 묘사하는 말로 이해가 됩니다.     


1: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2: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3

ㄱ. (슬픔과 기다림을 너에게 주기 위해) 함박눈을 멈추겠다.

ㄴ. (슬픔과 기다림을 너에게 주기 위해) 슬픔의 힘에 대해 이야기하며 너와 눈길을 걷겠다.     


그러면 ㄱ의 ‘함박눈을 멈추는 행위’는 청자 입장에서 ‘슬픔과 기다림을 받는 일’ 즉, ‘부정적인 이미지’가 되고, ‘내리던 함박눈’은 이 시에서 긍정적인 이미지가 됩니다.

ㄴ의 ‘슬픔의 힘에 대해 이야기하며 함께 걷는 행위’는 청자 입장에서 ‘슬픔과 기다림을 받는 일’이 되는데, 청자가 이해할 때까지(기다림의 슬픔까지) 화자가 직접적으로 자꾸 이야기해 준다고 했으니 이 약속은 아마 실현될 겁니다.

그런데 ‘슬픔의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슬픔에도 힘이 있다’는 뜻이고, 시의 마지막행에서 청자가 화자의 말을 끝까지 듣고 나면, ㄱ에서 ‘함박눈이 멈춰서’ 청자가 슬펐더라도, 그 슬픔이 다시 살아가는 힘이 되어준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청자가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함박눈이 멈추는 일은 슬픈 일이지만 동시에 힘이 되는 일, 즉 기쁜 일이 됩니다. 청자가 그것을 깨달으면 함박눈이 갑자기 멈춰서 슬퍼하던 과거의 모습을 극복하고 합박눈이 멈추더라도 거기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게 될 것이고, 화자는 바로 청자가 그것을 깨닫게 해 주려고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잠시 멈추는” 행위를 한 것입니다.

이렇게 시는 무난히 주제에 도달할 수 있는데, 3-ㄴ 부분에서 쟁점이 발생합니다.

전체 맥락 속에서 보겠습니다.     


1: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2: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3

ㄱ. (슬픔과 기다림을 너에게 주기 위해)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ㄴ. (슬픔과 기다림을 너에게 주기 위해)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ㄷ. (슬픔과 기다림을 너에게 주기 위해)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왜 화자인 ‘슬픔’은, (슬픔과 기다림을 너에게 주기 전에) ㄱ.함박눈을 멈춰 놓고서는, ㄷ.기쁨에게 가서 슬픔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ㄴ.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왔어야 할까요?     


a. 이 세상에 평등하게 멈춘 함박눈

b.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올 때 필요한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 

c. 너와 함께 걸을 눈 그친 눈길     


a의 앞서 ㄱ에서 ‘함박눈’은 ‘긍정의 이미지’로 풀이했습니다. 멈춘 함박눈은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이므로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작용합니다. 슬픈 사람이나 기쁜 사람이나 추위에 떠는 사람이나 그에게서 과일 값을 깎는 사람이나 얼어 죽은 사람이나 그걸 못 본 척 지나가는 사람이나 적용됩니다.

c의 눈 그친 눈길에서 눈이 ‘긍정적인 이미지’인지 ‘부정적인 이미지’인지 확정할 순 없지만, 일단 눈은 그쳤지만 길에는 눈이 남아 있는, 즉, 긍정과 부정이 공존하는 세상,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세상, 즉 a와 마찬가지로 골고루 적용되는 세상입니다. 어쩌면 화자가 청자에게 보여주고 싶은 세상이겠지요. 기쁨아, 보아라. 세상에는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다. 슬픔을 외면하고서 얻은 기쁨은 참된 기쁨이 아니니라. 이것이 눈 그친 눈길일 테지요.

a나 c와 달리 b에서 화자는 잠시 다녀올 곳이 있습니다. 함박눈이 공평하게 그친 자리에서 눈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b를 확인하고 나면 c의 진실이 보이게 되는 구성입니다. 

b의 ‘눈’은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 가능성이 발생합니다.     


(가) 관습적인 해석

관습1. 봄눈은 겨울눈과 달리 쌓이지 않고 금방 녹아 없어지므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오히려 봄눈이 녹아 흐르는 물이 새생명을 움틔운다. 봄눈은 따뜻한 봄의 시작을 알린다.


관습2.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오는 일은 일반적으로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이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도 낭만적인 분위기이고 추워 떠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은 낭만적인 일이다.

그렇다면 ㄴ은 화자가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 즉, 새봄의 따뜻한 이미지를 들고, 추워 떠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한 다음에, 청자에게 와서 눈길을 걸어가다겠는 뜻이다. 


즉, ‘봄눈’은 긍정의 이미지이다.     


(나) 기계적인 해석     

a – 긍정의 눈(함박눈)

b – ________(봄눈)

c – 긍정과 부정의 공존(눈 그친 눈길)     


이렇게 도식화를 하고 보면, b의 봄눈은 ‘부정의 이미지’가 들어갈 자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봄눈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에게 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부정적인 봄눈들을 추워 떠는 사람들에게 “주려고” 데려갔을까요? 

‘보리밭에 내린 봄눈’이 아니라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임에 유의해 봅시다. 봄눈이 긍정적인 이미지라면 보리밭에 내린 봄눈을 데려와야, 따뜻하게 보리를 덮어주던 느낌 그대로 추워 떠는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겠지요.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을 데려오면, 보리밭에는 더 이상 봄눈이 내리지 않습니다. 그 말은 “이 세상에 함박눈을 멈추겠다”처럼, 봄눈을 데려가는 것도 결국 “보리밭에 봄눈을 멈추겠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추워 떠는 사람들’에게 갑니다. 함박눈은 이 세상에 내리므로 굳이 함박눈을 들고 사람들에게 가서 ‘자 봐라, 내가 멈췄다. 함박눈이 없는 기분을 잠시 느끼고 있거라.’ 하지 않아도 됩니다. 봄눈은 보리밭에 내리므로 그걸 들고 ‘보리가 팰 때까지 추워 떨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굳이 알려줍니다. 설마 “내가 너희의 보리를 덮는 봄눈마저 데려갈 테니 더욱 춥고 배고픔에 떨면서 슬픔의 힘을 느끼거라.” 하는 의도였을까요? 

시의 1부분과 2부분에서 슬픈 사람에게 동정심을 주는 내용이 일관성 있게 전개되려면, 결국 봄눈을 데려가는 행위는 어떤 식이든 ‘위로’로 해석됩니다.     


봄눈을 데리고 사람들의 슬픔에 다녀오는 행위 = 추워 떠는 사람들을 위로함.     


일단 위의 해석 (가)에서는 화자가 봄눈을 추워 떠는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위로로 보입니다.

하지만 (나)의 도식을 합리화 하기 위해서는 봄눈을 추워 떠는 사람들에게 주려고 데려간 것이 아니라, 화자가 봄눈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에게 가서 다음 말을 전하고 싶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봄눈들을 보리밭에서 다 데려왔어요. 안심하세요.”     


a – 긍정의 눈을 없앰. = 세상의 합박눈을 그침

b – 부정의 눈을 없앰. = 보리밭의 봄눈을 데려감

c – 긍정과 부정의 공존을 청자에게 깨닫게 함 = 눈 그친 눈길을 걸어감     


(가)와 (나), 둘 중 하나를 답으로 정하는 것을 지양하고 싶으면서도 교사들이 저도 모르게 정답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겠지요. 학생들이 (가)로 해석해도 “네 말이 맞다.” 하고, (나)로 해석해도 “네 말이 맞다.” 할 수 있도록 “학생들이 스스로 작품을 해석하는 역량”을 길러 주는 것이 문학 교육의 목적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선생님, 그러면 시험에 ‘봄눈’의 이미지 나오면 뭐라고 써요?” 할 때, “네 말도 옳다.” 하는 태도가 교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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