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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숲 Feb 05. 2021

폐지

2021.2.4.23:43~

새 종이는 물론이고 한 쪽 면이 아직 순백인 이면지나 빳빳한 포장 종이를 버리지 못한다. 그러다보면 집안에 종이가 잔뜩 쌓인다. 당연한 일이다. 우리 사는 세상에 종이는 넘쳐나기 때문에. 학생 때는 폐지를 모아 실로 꿰어 노트를 만들고 그림을 그렸다. 폐지 뿐이 아니었다. 우리 사는 세상에 넘쳐나는 건 폐지만이 아니니까. 쓰레기장을 뒤져 목조형가구디자인과 학생들이 버린 나무판이나 막대, 조각들을 주워와 내가 원하는 사이즈고 재단해 그림을 그리고 의류회사 쓰레기장에 잠입해 헝겁 쪼가리들을 한 보따리 주워왔다. 잠깐 곁길로 새자면, 꽤 많은 샘플 옷들이 버려져있었고, 그대로 입어도 상관없는 예쁜 옷들을 득템...  

첫 직장으로 출판사에 들어갔을 때 엄청나게 쌓이는 이면지를 버리지 못하고 차곡차곡 모았다. 그 이면지로 뭐라도 해야 했다. 하지만 쌓여나가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어느날 모조리 한꺼번에 버리게 되었을 때 나는 어떤 본성을 접고 살아야만 하는 것처럼 좌절했던 것 같다. 

요즘도 종이를 모으고 있지만 버리는 양이 훨씬 더 많다. 안 입는 옷도 안 쓰는 물건들도 부지런히 버리거나 누군가에게 준다. 들이는 것 이상으로 품을 요구하는 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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