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태의 서사

김경인, 한밤의 퀼트

by 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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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 네트의 거울]



<아버지가 아이를 낳아요> 자식들은 아버지가 낳은 자식을 먹거나 아버지를 먹고 다시 또 아버지를 찾는다

보편적인 성별의 이해에 대한 전복이 주는 재미가 있다 내가 나로 살아감에 있어서 결국 여성이라는 것을 저버릴 수 없을 것인데,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계속해서 대를 이어가는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부탁이나 간청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정말 요구인 것이다. 이 선택을 하지 않으면, 어쩌면, 나의 존재 가치마저도 의심하고 부정당할 것이라는 걱정이 든다. 이런 것도 가족들이 주는 가스라이팅의 일종이려나, 웃어 버린다. 나는 이런 것들이 웃기다. 이상한 개그 코드일까 싶지만, 누군가 공감해 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내 안, 만 갈래로 엉킨 20세기가 흐른다 첫 페이지를 열면 동경 산보를 마치고 막 돌아온 할아버지가 젊은 아내를 이끌고 경성을 떠난다 그들이 처음 만났다는 모란봉에도 곧 눈이 내리겠지 바람이 불어오는가, 한번도 펼치지 않은 페이지들이 나부낀다 언뜻 펼쳐진 페이지에선 할아버지가 밤을 새워 글을 쓴다 채 마르지 않은 잉크엔 불온한 빛깔이 스며 있다
…(중략)
봉인된 심장과 머리를
페이퍼나이프로 북 찢고
조그만 빛조차 들어설 수 없는
어두운 서고를 돌아서면
나 태어나기 훨씬 전
핏줄마다 새겨진
지워지지 않는 이 페이지

/ 지워지지 않는 페이지 (부분 발췌)
누군가 내 속 깊이 숨어들어
차곡차곡 접어둔 편지를 뜯고 있어

머릿속, 줄줄이 늘어선 검은 잉크병들이
왈칵 쓰러져 그림자를 덮치면
까맣게 탄 거리 위로 앰뷸런스가 달려오고
타다 만 집이 솟아오르고
집안엔 또 내가 하나 둘 셋
담배꽁초 나뒹구는 마루에 앉아
불에 덴 손가락으로 또 편지를 쓰고 있어
방안에선 엄마가
편지 따윈 그만 쓰라고 타이르고 있어

지겨운 내 종이가 닳아가고 있어
자꾸만 목울대를 움켜쥐는
이 무거운
글자들을 다 쏟아내야 할 텐데
어긋만 길만 만드는 지문도
찍어 보내야 할 텐데

/ 검은 편지지 (부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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