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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지 Jun 12. 2024

위로를 건네는 시간

안희연,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일탈. 일상적인 생활에서의 탈피, 이것을 탈출이나 탈주와 같은 말로 표현하다면 어찌 되었든 무언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자주 가는 카페, 매일 보는 가족들, 종종 걷는 산책로와 가끔 보는 하늘까지도 우리의 일상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은 꽤나 많은 듯하다. 우리는 어쩌면 삶이라는 것에 발목 잡힌 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뭐, 딱히 좋다 나쁘다는 주관적인 평가를 내리기에 삶은 꽤나 복잡하고, 그런 것까지 모두 신경 쓰면서 살기에 힘들고 바쁜 현실의 연속일 테니까. 하지만 계속해서 벗어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 글 쓰는 사람의 사명이지 않을까. 또는 글을 쓰고 싶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일 수도 있겠다. 물론 독자는, 나는 그러기에 다소 어려움이 많다고 하겠지만 작가라는 존재가 보는 세상을 응시한다. 지금까지 내가 생각하지 못한, 내가 보고 경험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감상을 적는다. 이것은 또 다른 새로운 서사가 된다.


보트를 타고 십 분만 가면 어마어마한 반딧불이 부락이 있다고 했다

지척에 그런 곳이 있어요?

우리는 곧장 보트에 오르려 했지만 더 어두워져야 한다고 했다

물가에 앉아 어둠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제멋대로 상상하는 일은 즐거웠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무얼 기다리고 있지?
왜 여기 남겨진 거지?

빛의 살점 같은

제법 깊은 곳까지 떠내려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은 출발할 수 없다고 했다

/마중
그는 나의 잠 속까지 따라왔다 신발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었고

밤마다 어딜 그렇게 다니는 거예요 물어도 겨울을 가디 위해선 장작이 더 필요하다고만 말한다

장작은 이미 충분해요 생각만큼 겨울이 긴 것도 아니었고요 나는 따뜻한 차를 내주었다 그가 몸을 좀 녹였으면 했다



낮게 나는 새들이 있고 그보다 낮을 수 없는 마음이 있고

누군가 나를 흔드는 것 같다

/ 선잠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의 내면에는 이 삶을 파괴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는 은밀한 비밀에 대해 암묵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멀리 떠나고 싶다고 말하면서 정말 내가 떠나버릴까 두려웠다며 다시 가족과 친구와 연인의 품에 얼굴을 묻는 나약함을 상상한다.


당신에게는 사슴 한 마리가 있다 당신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사슴은 오래전 당신을 찾아왔고 당신 곁에서 죽을 것이다

그 순간 당신은 비에 대한 낯선 기억 하나를 갖게 된다
소매엔 까닭 모를 흙이 묻어 있다

덫에 걸린 사슴의 발이 검게 썩어갈 때

당신은 수업이 지나다니던 방문턱에 걸려 넘어지고

붉을 대로 붉어진 사슴이 절뚝이며 당신에게로 돌아올 때

아침 햇빛을 보면 자주 무릎이 꺾인다 자꾸만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 연루


마지막으로 내가 떠나고 싶고 없애고 싶고 파괴하고 싶은 것들의 이유는 바로 나, 그리고 이 세계와 내가 연결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상상해 보는 건 어떨까. 가히 재미있는 일이다.


버리려고 던진 원반을 기어코 물어 온다
쓰다듬어달라는 눈빛으로
숨을 헐떡이며 꼬리를 흔드는

슬픔에 가까워 보이지만 슬픔은 아니다
온몸이 잠길 때도 있지만
겨우 발목을 찰랑거리다 돌아갈 때도 있다

풀리지 않는 매듭이라 자신했는데
이름을 듣는 순간 그대로 풀려버리는

냄비 바닥이 까맣게 타도록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등 뒤에 있는
이 모든 것

/ 사랑의 형태


나는 자꾸 사랑을 부정하려고 하는데, 떠나려고 하는데 누군가 나를 사랑해 주는 행위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해 볼까. 또는 나도 사실 사랑을 하고 싶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혼란스러워하는 중이라거나, 해 본 적이 없어 어렵거나 또는 실패의 경험으로 두려워지는 것들 모두 사랑이라는 것을 단순한 행복의 명사로 떠올릴 것이 아니라 사랑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모습을 바라보자는 것이다.


버려진 페이지들을 주워 책을 만들었다

거기
한 사람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한 페이지도 포기할 수 없어서

/ 역광의 세계 


빛이 있는 곳으로 가 보자고 말하고,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사실 빛이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눈이 부셔 볼 수 없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바라본다. 


우리는 걷는 동안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달은 다르면서도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달을 찾으려면 밤의 한가운데로 가야 한다는 내게
너는 바다에서만 헤엄칠 수 있는 건 아니라 했고
모든 얼굴에서 성급히 악인을 보는 내게
사랑은 비 온 날 저녁의 풀 냄새 같은 거겠지 말했다     

고작 이런 풍경을 보려고 여기까지 온 것일까
너는 헤엄치는 법을 알아야만 바다를 건널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했지만     

내일부턴 더 추워지겠네 쓸쓸히 웃었다
너무 어두워서 분명해지는 세계가 거기 있었다     

/실감
날카로운 말은 아프지 않아
폭풍우 치는 밤은 무섭지 않아
아픈 것은 차라리 고요한 것
울음을 참으려 입술을 깨무는 너의 얼굴     

너는 투명해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나의 땅은 그럴 때마다 흔들린다
네가 어떤 모양으로 이곳까지 흘러왔는지 모를 때
온 풍경이 너의 절망을 돕고 있을 때     

창밖엔 때아닌 비가 오고
너는 우산도 없이 문을 나선다     

이제 나는 너의 뒷모습을 상상한다
몇 걸음 채 걷지 못하고 종이처럼 구겨졌을까
돌아보다 돌이 되었을까     

나의 상상은 맥없이 시든다
언어만으로는 어떤 얼굴도 만질 수 없기 때문이다     

/아침은 이곳을 정차하지 않고 지나갔다


사람이 사람을 통해 받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단연 행복과 기쁨이라는 단편적인 속성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이야기하기가 쉽기 때문에 조금 더 나아가 볼까. 상대방이 하는 말에 네가 그렇게 말하면 상처받았어라고 말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행위라는 장면을 보았다. 솔직하게 말하면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는 것뿐만 아니라 나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상기한다.


사랑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다.


본디 생명이 있는 것들은 모두 의미가 있다. 새, 개, 앵무새, 말고도 생명이 있는 것들을 보살피며 주고받는 사랑. 이런 사랑을 통해 깨닫는 것들이 있다. 부재가 존재를 증명하듯, 사라진 것들을 계속해서 복기하고 회귀할수록 그것은 더욱 현실성 있는 현재가 되는 듯하다. 사랑하는 아내가 사라지고 그녀를 새라고 떠올리며 오지 않는 새를 기다리고, 돌보고, 생각하고, 공부까지 하는 행위가 가지는 의미가 그러하다. 물론,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은 상상의 주체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 간극을 살피고 헤집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상상이 현재라고 느끼게 하는 것에만 주목한다.


환경과 자연을 생각하는 시인의 눈과 나란히 선다.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세상에는 배울 것이 아주 많아, 나도 아직 배울 것이 많이 남아 있어. 이런 사실에 즐거워진다.


시집을 읽으며 멈춰 서는 일이 많았다. 나의 눈이, 마음이, 텍스트를 읽고 소화하면서 나의 사유는 점점 넓어진다, 넓어지는 중이다, 넓어질 것이다, 같은 문장들을 재생산하면서 읽는 행위를 끝내지 못한다.     


살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없을 것이라 단언하는 말은 꽤나 오만할 것이겠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일상이라는 현재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지만, 이러한 역설을 논해 보기로 하자. 그래도 초여름 친구를 기다리며 바라본 나무가 바람을 맞으며 잎사귀를 떨어뜨리던 것,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며 뜨거운 햇빛을 온몸으로 맞으며 광합성하는 식물이 되어 보는 것, 길을 걷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서사를 가늠하고 갑작스러운 눈물이 차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껴 봤던 일들이 분명 나를 살게 한다. 우리를 살게 할 것이다.     


여전히 나는 가는 곳만 가고 먹는 것만 먹고 입는 것만 입으며 지금까지 내가 보고 듣고 알고 그리고 겪고 배운 것들의 기저에 담긴 사랑을 말할 것이다. 시인의 말처럼.     


아이의 엄마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혹여 오더라도 아주아주 긴 시간이 필요할 거라는 서글픈 직감이었다.     

그러나 아이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신 아이의 손을 잡고 언덕을 오르는 상상을 한다. 많은 말들이 떠올랐다가 가라앉는 동안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 것 같고 억겁의 시간이 흐른 것도 같다. 울지 않았는데도 언덕을 내려왔을 땐 충분히 운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이 시집이 당신에게도 그런 언덕이 되어 주기를. 나는 평생 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 것이고, 이제 나는 그것이 조금도 슬프지 않다.

2020년 7월 안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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