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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지 Jun 19. 2024

사랑을 쓰는 방법

이영주,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우리가 아름다움으로 기우는 것은
약하고 슬프기
때문일까

2019년 가을
이영주     

/시인의 말


오래도록 이 문장을 마음에 새기고 살았다.

종종 갑자기 떠오르는 구절이기도 했다.


나는 견갑골이 날개 뼈가 되는 이야기에 중독되었지. 천사 병에 중독되었지. 나는 매일 그 이야기만 썼어. 이렇게 춥고 얼어서. 벽을 건너 다른 곳에서 걸을 때마다 부서지는 소리에 중독되었지. 날지도 못하면서 어깨는 왜 새와 비슷하게 생긴 것일까. 나는 단추를 풀며 숨을 죽인다.     

침대에 앉아 우리는 서로의 어깨만 만졌는데. 너무 무서워서 더듬기만 했는데. 너를 건너 다른 곳에서 걸었지. 너의 중력에 내가 부서지는 소리. 추운데도 옷을 벗고. 우리는 서로의 어깨에 중독되었지. 날아가는 이야기에 빠져들까 봐 옷을 벗고. 이제 쓰는 것은 그만해. 너는 펜을 버린다. 이렇게 벗고 있으면 영혼을 버린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우리는 우리를 벗고 침대에서 꼭 껴안고 있다. 이제 날 수가 있어. 생각만 해도 아름답지? 너는 내 입김에 부서진다.

/첫사랑
우리가 깊어져서 검게 타들어갈 수 있다면 지금 불을 붙일까? 그녀는 뜨거운 이마를 내 심장에 대고 있습니다. 이것 봐, 너무 깊은 소리가 들리니까 자꾸만 무너져내려. 나는 양초를 손에 꼭 쥐고 있고요. … 그녀는 이미 녹아내리는 손을 뻗어 내 심장 안을 만져봅니다. 이 안에는 뭐가 이렇게 축축한 것들이 잔뜩 있을까. 그녀는 액체처럼 말을 합니다. 흘러내리는 감각. 촛농이 흘러내리는 이것은 불인가요 물인가요.

/ 방화범


유한한 인간의 몸으로 무한의 사랑을 꿈꾸는 건 어쩌면 신의 영역일지도 모른다. 날 수도 없는 날개 뼈를 가진 주제에 날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그에 대한 상상을 한다. 오직 너와 함께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그들은 조심스럽게 서로를 탐구하고, 탐색하고, 탐닉하기에 이른다.      


몸은 언제라도 땅에 붙어 있지만 우리가 사랑을 해서 날개가 생긴다면 현실이라는 육체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 어쩌면 사랑이란 영혼의 교감이라는 말이 그다지 어려운 내용은 아닐 것.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을 느끼는 방법은 결국 육체의 맞닿음이리라. 가슴도 아닌 심장에 닿은 뜨거운 이마로 전달되고 느껴지는 박자는 어떤 소리를 내고 있을까.     

인스턴트 러브, 멋들어진 외국어로 쓰인 단어처럼. 쉽고 빠르게 만들어지고 휘발되는 사랑.     

우리는 사랑에 대해 얼마나 골몰하는가.


우리가 등밖에 없는 존재라면 온 존재를 쓸어볼 수 있다
우리는 왜 등을 쓸어내리면서 영혼의 앞 같은 것을 상상할까     

등을 만지면 불씨가 모여 있는 것처럼 따뜻하다고 생각했어     

엎드린 채 기도를 하고 있는 등을 보면 쓸어주고 싶다
이미 불타오르고 있으니 마음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고     

추운 사람들이 모여 있다
서로를 모르지만 뒤를 보고 있다

/교회에서
무너져 내리며 투명한 얼굴로 걸어가고
손을 앞으로, 앞으로만 내밀고
나는 그 손을 잡으려고 아주 오랫동안 수평선을 걸어왔지     

우리는 나란히 걷다가
비 내리는 꿈 속에서 서로를 마주 볼 수 있었다     

갑자기 뒤돌아선 엄마의
유리알 같은 모래들이 파도에 휩쓸리는     

마지막 기후     

우리는 순서 없이 섞여버린
따뜻한 물이 스며드는 삶 안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있다     

/ 해변의 조우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자고 시인은 말하면서 그 누구보다 사랑에 대해서 갈구하고 또 사랑에 대해서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사랑을 말하지 말자는 부정적인 명령과 청유로 사랑에 대한 기록을 상기하게 하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일전에 보았던 이론 중에서 뇌는 부정적인 명령을 곧장 입력하지 못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얼룩말을 떠올리지 마’라고 한다면 얼룩말을 떠올린 뒤에 지운다는 이야기, 그래서 사랑을 기록하지 말자는 시인은 그 누구보다 사랑을 기록하고 싶은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소녀들이 골목에 모여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말을 한다. 울음을 참듯이 배에 힘을 주면 가능하지. 누군가가 기록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조용한 대화라니. 소녀들은 자라기를 멈출 때마다 이곳에 와서 인형처럼 말을 한다. 서로의 머리통을 만져주고 부러진 팔에 흰 붕대를 감아준다.

/ 빈 노트
아무것도 없는데 자꾸 무엇인가를 정리하고 싶다. 없는 것을 정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길을 아는 친구들은 모두 떠나갔다. 이곳에 공중이 없다는 것을 내게 속삭이듯 말하고 걸어갔다. … 때로 감각이 좋은 과학자들이 이곳으로 온다. 그럴 때 나는 얼음인 듯 결정체로 남아 있다. 이상하지, 이곳에는 눈과 얼음뿐인데, 이 선연한 피는 어디에서 흐르는가. … 무언가가 자꾸 다시 태어나려고 해. 나는 혼자 속삭여본다. …똘똘한 친구들은 투명하니까 사라졌고……바보 같은 것은 나 하나로도 꽉 차니까……얼음은 어디로 갔는가. … 이 참을 수 없는 눈물은. 내장이 차가워지는 얼음 같은 울음은 무엇이지. 공포와 부정은 기록으로만 남기기로 했는데. 이곳에는 눈과 얼음뿐. 과학자들이 튼튼해진 발톱으로 들고 온 노트를 찢는다. 나는 얼음인 듯 피를 흘린다.     

/ 영혼이 있다면


시를 쓴다는 것은 글을 쓴다는 것이다. 쓰는 행위는 나의 생각과 사상 그리고 가치관을 담는다. 그 과정이 얼마나 괴로운지에 대해서, 하지만 그 작업이 주는 행복의 모순을 경험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텍스트로 담으면서 동시에 우리는 생각도 텍스트로 하고 있잖아요,라는 또 다른 모순. 기록의 현상은 이렇게 모순을 담고 있기에 글을 쓰는 주체의 분열을 유도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부서지거나 무너지거나 혹은 나누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직 글을 쓰는 과정과 장면에 주목한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그것을 듣고 나누며 글로 적어 보는 행위들, 어떤 것들은 기록하지 않으면 남지 않고 사라지기에, 그 어떤 서사도 감히 없어져도 된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그것이 글의 힘이다. 영원히 기록하고, 기록되고, 누군가에게 읽히면서 삶아남은 존재가 있다. 비단 작가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이 그렇다.


투명한 시선은 육체를 통과하니까. 우리는 서로의 몸을 만졌는데 미끄럽고 징그러웠지. 이 촉수 같은 시선은 뭐지. 자꾸만 만지니까 검어진다. … 삶을 기록하라는 신의 명언은 지하로 스며든다. 쓸 수가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데. 흑탄으로 쓰면 구름도 검게 부푼다. … 만져지지 않는 시간을 통과하는 형벌. … 천천히 폭풍이 몰려오는 이 언덕에서 미끄러지며 우리는 무엇이 될까. 춥고 피로한 슬픔의 형태로     
/ 단어들
읽을 수 없는 문장처럼 생긴 것들이 가득해. 그는 망토를 벗었다. 눈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나는 손에 든 책을 술집 바닥에 집어던지고 발로 밟고 있었다. 고통받지 말자. 읽고 토하자. 그는 곧 튀어나올 부호처럼 웃으며 내 발을 만졌다. 이렇게 엄지발가락이 튀어 오르니 맨발로 읽어야지.  

/ 독서회


최근 몇 개의 글을 읽고 쓰면서 창작의 고통이라는 말을 재차 떠올려 본다. 조금은 웃긴 이야기일 수 있으나, 무엇인가를 써서 텍스트로 남기고 그것을 내가 남겼다는 사실에 기함한다. 아아, 싫어라, 손바닥으로 종잇장을 밀어 보기도 한다. 물론, 그것은 모래사장에 쓰인 글이 아니기에, 그대로 남아있다. 오히려 번진 잉크가, 검은 흑연이 내 손날에 묻는 것이 더 현실적이겠지. 모쪼록 글을 쓰는 일은 충분히 고통스럽다. 말하고 생각하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고, 그리고 누군가 내 글을 읽으면서 내 고통에 대해서 감내해 주면 좋겠다는 아주 못되고 나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루 종일 어깨를 빛에 대고 있으면 부패의 흔적. 그는 조용히 눈을 뜬다. 빛에서 썩은 날개가 떨어지고 있다. … 툭툭 철근을 걷어차다 보면 냄새를 만지게 된다. 이곳으로 모이는 모든 고물은 감각의 일종. … 불행의 감각은 너무 가까운 감촉. 그는 무너져 내리는 어깨뼈를 문에 기대고 있다. … 샤워 꼭지를 만지다 보면 알 수 있지. 울지 않고도 깊어질 수 있다. … 이렇게 이번 삶이 끝나지 않는다면 이 고물은 좀 더 생생한 감각이야. 지금 그의 얼굴은 붉은가. 고물상 한가운데에 묘지를 파는 그의 손은 버려지지 않는 것들은 어디로 갔지. 아무도 이상하고 슬픈 순간은 기록할 수 없는 거지.

/ 유광 자원     


우리는 왜 늘 좋은 것만 보고 싶어 할까,라는 사유. 어쩌면 이것도 사유라는 굉장한 단어로 포장해 본 것뿐이지, 그저 일상적인 생각 또는 사념에 불과할 수도 있겠다. 다만 고물상 아저씨가 데리고 다니던 개를, 또는 길에서 죽은 개를 자신의 고물상 땅에 묻어 주는 모습을 <유광 자원>을 통해 읽어낸다. 버린 것을 줍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버린 사람들이 분명 존재할 텐데, 사실 쓰고 버린 누군가보다는 그것을 줍는 사람의 서사를 떠올리게 하는 작가의 기록에 매료된다. 어쩌면 사랑이 너무 많은 작가만이 바라볼 수 있는 장면이자 관점일 수도 있겠다. 행복하고 좋은 것, 다정하고 즐거운 것이 아닌 이면에 축적되는 또는 버려지고 있는 것들을 붙잡고 싶은 마음을 헤아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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