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지 Jun 05. 2024

뜨거운 여름에 녹는

주하림, 여름 키코

예술이 빠진 예술가
젖가슴이 닿지 않는 포옹
미러
목소리가 아니라 목소리에 가려진 그림자

/ 가까운 내면


요즈음 날씨에 안 읽을 수 없는 책의 제목  일본 이름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그것도 일종의 편견일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을 준 시라고 할까. 사실 처음 읽을 때부터 끝까지 내가 느낀 짧은 감상은 작가가 원하는 이미지와 아름다움이 느껴지지만 전체적으로 무슨 내용인지에 대한 의미에 대해 파악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더불어 영화나 음악, 그림을 보고 쓴 시가 몇 개 있었는데 시를 읽기 위한 다른 예술들의 감상은 이해의 폭을 넓혀 주기는 하겠지만 그런 작업이나 일도 어떤 의미에서 번거로움을 의미한다고, 말한다면 너무 게으른 독자겠지.


내가 질베르트를 사랑한 무렵 더 먼,
사랑이 한갓 외면뿐이 아니고 실현 가능한 실체처럼
생각되었던 시절까지 나는 거슬러 올라갔다 ㅡ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서

신은 우리를 가리켜 시가로 흐르는 강이나 강을 가로지르는 시가와 같이 떼어놓지 못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우리의 지느러미 혹은 고통보다 먼저 태어나 그 속에 몸을 버려두었다 헤엄을 배우는 동안 비늘이 떨어져 나갔고 나는 그 경험을 간직할 수도 간직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설탕통을 쏟자 다시 떠오르는 기억

(중략)

무너진다는 말과 이층에서 끝난 계단계단의 어둠이 끝날 때까지 몽상에 잠기는 짓
그것 또한 또다른 한 장면에 불과하다..... 붉은빛 푸른 물고기 물속의 물고기가 흩어질 시간 앞에서 사라질 눈물을 흘리고 있다

/ 붉은 유령


'언니는 미술학교에서 정신병자로 불렸습니다 / 아침 광장에 나가 청소부들을 그렸고 어깨에 앉은 새들의 말을 들어주었죠 새들의 머리에 키스할 수 없게 되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말자' 언니 서사에 흔들리지 않을 여자는 없을 텐데 언제라도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언니로 태어난 사람들도 자기만의 난항을 겪고 있겠지만, 언니들만이 가르쳐 주는 무언가가 있다고 늘 생각한다. '망상이란 이해할 수 없고 사실이 아니며 주위의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라는 것을 알지만' 언니가 겪은 세상을 탐독하며 소녀들은 무럭무럭 자라는 법이니까. /덴마크 입국소에서


자기 살을 찢어 흰 뼈를 드러내고
피투성이의 모습으로 광장을 향하며 기억은 보여준다

(중략)

열리지 않는 창 죽을힘을 다해 그것을 잊지 않으려는
어둠 속에서 어둠은 검고 젖은 날개 펄럭인가
어둠은 당신에게 슬픈 춤을 건넬 수 있다
붉고 아름다운 입술을 훔쳐 줄 수 있다
괴로워 그르친 일들 되돌려줄 수 있다 잠에서 깨자마자
당신은 태양 대신 끌려가 작물처럼 길러진다
나를 잡아줘 나뭇가지가 부러진다
이스키아 이스끼아

누군가 천국을 발음하면 부러진 나뭇가지가 늑골을 파고들어

(중략)

검푸른 바다 해변구름이 비치는 웅덩이 골목을 지나
파란 벽지와 가구들이 놓인 청장 높은 방, 펄럭이는 커튼
여기 살았던 여자는 나폴리항 티켓을 찢고
반대편 섬을 향해 망설였을까 돌아갈 수 없는 흔들리지 않는 꿈을
나는 천국에 놀러와 하루 동안 창을 열지 않았어
벽에 걸린 길고 둥근 거울
돌아온 모자를 쓰고
거울 속 그림자가 목이 아프다고 운다
맥박이 뛰고 레이스 커튼이 바람에 휘날린다 다음 차례는 내가 될지 모르는데 침대 시트의 갈색 자국이 그것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 이스키아 이스끼아


어떤 주말, 너무 화를 내는 일은 좋지 않다고, 어머니가 이야기했다. 하지만 나는 반문했다. 화가 나는 건 화가 나는 거지, 나의 감정을 똑바로 바라보는 일이 나에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내가 왜 화가 났고, 어떤 일에 화를 내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면 훗날 그런 일을 벌이거나 만나지 않을 수 있고 피할 수도 있으니까. 참는 일이 나쁘다는 의미도 아니고, 그것이 주는 의미도 알고, 나 또한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왜 부정적인 감정(이것도 매우 주관적인 평가라고 생각한다)에 예민하게 굴까. 나는 슬프고 화가 나고 우울한 것 모두 나에게서 기인하기에 그것에 대해서 올곧게 바라보는 과정이 충분히 한 사람의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과정에 충분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주하림의  또한 마찬가지다. 여성들에 대한 사회의 노골적인 표현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런 여자를 희롱하는 행위나,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철저하게 무너지는 모습들을 두려움으로 피하기만 할 것인가? 누군가 숨기려고 하는 것들을 자꾸 드러내려고 하는 행위는 충분히 의미가 있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보여 주는 존재가 바로 그 일의 당사자이며 주체라는 점에 주목하기로 한다. 그것이 이 시가 강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예이다.


파리의 겨울은 늘 세 번째 전생 같다 결혼식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났어 류에게 프러포즈를 받았어 결혼식 사진이 나왔는데 누구도 날 찾지 못해 프랑스에 머문 친구들은 그런 말을 자주 했어 갔다 오면 정신병자가 되거나 우울증을 앓게 된대 가보지 않고 앓는 병은 어떤 걸까
(중략)
하루는 흑인 남자가 다가와 남은 라자냐를 줄 수 있냐고 물었고
식당 주인은 그를 쫓아냈지
발밑을 걸어다니는 비둘기떼
정오의 눈부신 도시
식사가 끝날 때까지 그는 서 있었고 방학에 남부에 놀러 가서도 친구 같은 건 사귀지 말자고 결심했지 아니 북부든 남부든 친구란 것을 가진다면

/ 모티바숑* 불어로 자기소개서


‘식사가 끝날 때까지 그는 서 있었고 방학에 남부에 놀러 가서도 친구 같은 건 사귀지 말자고 결심했지 아니 북부든 남부든 친구란 것을 가진다면’ 인간에게 관계 맺음이란 필수불가결한 것이지만 그에 수반하는 오해와 상처받음과 같은 부정적인 영향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결론해 도달해 본다. 어떤 일에 슬퍼하기 전에 슬플 일을 만들지 말자고, 극단적이지만 확실한 해결 방안이라고 말해 보고 싶다. 극단적이라는 건 그게 부정적이라는 개인의 감정의 소관일 뿐이라고,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을 지켜야 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라고.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네 그 묻고 싶은 것에 끝이 있다면 그 묻고 싶은 것이 끝내야 하는 것에 있다면 나는 밤마다 오열하고 싶었다 갈라진 마룻바닥에 귀를 대고 폭력과 총성 - 정신이상자들과의 선량한 화해 정부의 총알받이를 하던 시절, 총애하던 몇몇 화가와 작가 연주가 기고가들과의 저녁 만찬
궁핍은 신에게도 어렵겠죠 모인 사람들은 시답지 않은 비유에도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나 담배 냄새, 음식냄새로 가득한 실내에서 모두 힘차게 돌아갈 생각이라도 해야 했다

/ 쇼스타코비치의 숲
여름뿐인 영화
해안을 따라 달리는 파란색 덤프트럭
갈고리 모양의 상처
태양이 지지 않는 백사장
달려오는 땀에 젖은 사내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된 청년의 미소

회색 티셔츠가 진회색이 될 때까지 뛰어온 청년은 다치지 않았냐고 묻는다 내가 너에게 보여준 것은 약간의 빛 보풀이 인 클로버 팔찌 숨이 쉬어지지 않는 날들 아니 너무 긴 회색의 어둠 어느 날 너는 손전등처럼 축축한 그 안을 구석구석 비췄는데 마음이 커져가도 끝나도 너에게 보여줄 수 없는 것들 나는 너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을 그만 두고 내 나라로 돌아갈 사진이 없다

/ 물에 비친 얼굴


타인의 슬픔을 타인의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쉽다. 감정 교류, 과몰입과 같은 단어가 자신의 인생에서 멀어진 사람들은 훨씬 더 마음이 편할 수 있겠지. 조금 더 가벼워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사실 엄청나게 무겁고 진중한 삶을 살고 있고, 그 삶이 자신을 짓누르는 느낌에 버겁기까지 할 것이다. 하지만 에서 화자는 말한다. ‘목이 멘 채’ 시작하는 여가수의 독백에 ‘장내를 채우는 구슬픈 피리 소리 / 관객들이 일어나 요란하게 박수를 치고 / 깃털이 달린 반쪽짜리 가면, 망원경을 떨어뜨리고 자리를 뜨는’는 모습이 타인의 슬픔을 그저 감상만 하는 모습일 것이고, 사실 여가수는 또는 그 극의 목적은 ‘객석 구석에 앉은 요정만이 홀로 어깨를 떨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며, 그런 감상에 충분히 감사할 것이다.

이전 08화 언제라도 꺼내 보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