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새벽에 마주친 그들
태국 방콕
방콕은 범죄인 소굴이다
늦은 새벽, 텅 빈 거리를 걷는 건 상당히 고통스러웠다. 마치 가출 청소년이 잠시 안전하게 눈을 붙일 굴다리 아래를 찾아 헤매는 것 같은 심정이었다. 한인 게스트하우스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중국계로 보이는 할아버지를 만났다. 매우 친절한 인상의 할아버지는 우리를 붙잡고 이런저런 경고를 했다. 이곳은 매우 위험한 곳이다. 골목만 넘어가면 범죄인 소굴이다. 우린 이 말을 듣고 겁이 팍 났다. 그러면서 직접 그린 이 근방 지도를 재홍과 나에게 주셨다. 수십 장을 들고 계셨다. 아마도 그린 걸 복사해서 출력한 거 같았다. 여기서 뭔가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지도가 왜 이렇게 많냐? 바로 너희 같은 얘들 때문이다.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안전한 곳을 알고 있으니 따라오라고 했다. 아주아주 위험한 곳이니 둘만 가다가 강도를 당하고 살해당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이때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여자에게만 촉이 있는 게 아니다. 돌도끼로 맹수와 싸우던 시절의 먼 선조가 가지고 있던 동물적 본능이 내게도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이 친절해 보이는 할아범을 따라가면 더 위험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가는 척하다가 으슥한 곳으로 향하길래 멈추어 섰다. 뒤돌아본 할아범의 표정엔 아직도 미소가 있었다. 마침 지나는 택시를 잡았다. 나와 재홍은 얼른 택시에 올랐다. 할아범 얼굴엔 순간 난처한 표정이 지나갔다. 출발하는 택시에서 할아범을 살폈다. 우릴 노려보는 할아범의 눈빛. 언제 미소를 짓고 있었냐는 듯 서늘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철렁. 가슴을 쓸어내렸다.
택시를 타고 내린 곳은 가장 오래된 사원인 왓포였다. 이곳으로 이동한 건 단순히 안전이었다. 사원 근처라 위험한 인간은 없겠지. 왓포 사원 안으로 들어가 구경하고 싶었다. 하지만 오전 8시에 문을 연다. 아직 새벽 5시가 되지 않았기에 3시간은 더 기다려야 한다. 그래도 참 시간이 많이 흘렀구나 생각했다. 계속 이곳에서 시간을 죽이는 게 아까웠다. 없던 용기를 쥐어짠 재홍과 나는 사원 근처를 탐방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시장을 지났다. 새벽부터 상점을 열기 위해 준비하는 근면한 방콕 상인들이 보였다. 또래로 보이는 한국인 청년 3명이 보였다. (서양인은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을 잘 구분하지 못하지만, 한국인은 한국인을 보면 안다.) 그들도 우리처럼 헤매는 중인 것 같았다. 기운이 없어서 같은 처지라는 사실을 알려줄 수 없었다. 이들도 우리처럼 숙소를 예약하지 않고 온 바보들이겠지. 시장 옆에 있는 공원에서 약간의 거리를 둔 채 서로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다가 지루해진 나와 재홍은 강 근처로 향했다. 선착장이 보였다. 아마도 강 건너 왓 아룬 사원으로 향하는 수상택시를 타는 곳이었을 거다. 해가 뜨기 직전의 어두컴컴한 하늘이 보였다. 선착장 앞에 앉은 나와 재홍은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갑자기 와- 하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서 눈을 번쩍 떴다. 10명 정도의 사람이 선착장 쪽으로 달려왔다. 깜짝 놀란 나와 재홍은 얼른 도망쳤다. 왜 이들이 이 이른 시간에 환호성을 지르며 선착장으로 달려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릴 폭행하러 오는 게 아니고 수상택시의 운행을 준비하러 출근하는 직원들이 아니었겠는가. 당시엔 피곤하기도 했고, 경계심이 바짝 든 상태였기에 겁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얼른 이 무서운 방콕을 떠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친 마음을 휴양지 파타야에서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침 첫차를 타고 가고 말 것이다.
둘은 파타야로 향하는 버스를 타는 곳으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조깅하는 50대 중년이 말을 걸어왔다. 싸와디캅. 친절한 중년이었다. 한국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한국인이죠. 한국말로 인사도 했다. 특히 한국의 정치인에 대해 알고 있었다. 박정희, 박근혜, 이명박 등. 대통령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거 같았다. 그런데 왜 이들은 입만 열면 방콕이 위험한 동네라고 하는 걸까. 노이로제에 걸릴 거 같았다. 자기는 반바지에 러닝셔츠 차림으로 조깅하면서 왜 우리들에겐 위험하다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양반은 본격적으로 우리를 졸졸 따라오기 시작했다. 아무도 믿지 말라. 계속 이 말을 반복했다. 반복 재생되는 녹음 파일을 듣는 거 같았다. 직전에 겁을 주었던 할아범이 떠올랐다. Bangkok is a nest of gangsters (방콕은 조직범죄자들의 소굴이야).
마치 이들은 프랜차이즈 같았다. 로열티로 운영되는 회사에서 나온 다단계 직원처럼 계속 비슷한 말을 해댔다.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우린 지금 여행으로 범죄자 소굴로 온 것이다. 한국으로 당장 귀국하고 싶어 졌다. 우린 파타야로 갈 거야. 파타야? 거긴 '강력' 범죄자 소굴이야. 총으로 사람 막 쏘고, 사람들 죽고 그래. 아, 정말 어쩌란 말인가. 그래도 우린 파타야로 가야겠다. 그랬더니 이 양반이 파타야로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군인 버스를 탈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군인 버스? 관광객도 탈 수 있어? 버스 티켓만 사면 모든 사람 다 탈 수 있어. 이 양반이 얼마나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떠들었는지 날이 아주 밝아졌다. 도로를 달리는 차들,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보이자 두려움이 줄었다. 속는 셈 치고 따라갔다. 해군 기지 앞까지 우릴 안내했다. 방콕은 경찰도 조직원과 연결되어 있어. 돈만 주면 사람도 죽일 수 있어. 경찰은 돈 받으면 모른 척 해. 그런데 군인은 믿을 수 있어. 그래? 우린 고개를 끄덕했다. 그래 군은 믿을 만하지. 태국어로 적힌 알아먹을 수 없는 안내판을 가리켰다. 봐, 파타야, 가지? 알 수 없는 글씨를 가리키며 확인시켜주려는 이 양반의 속셈이 무엇일까. 그러면서 마치 영업사원처럼 우리에게 명함을 주었다. 위험하면 바로 연락해.(대사관 직원인 줄.) 바로 파타야 갔다가 방콕으로 돌아와. 내 집에서 재워줄게.
나와 재홍은 다른 방콕인 보다도 우리 앞에 있는 반바지의 러닝셔츠 차림의 50대 양반이 더 위험한 사람임을 직감했다. 이 인간과 얼른 헤어져야겠다고 느꼈다. 우릴 완전히 속였다고 느낀 50대 반바지 양반이 만족하며 떠났다. 나와 재홍은 완전 진이 빠져버렸다. 우린 정말 위험한 곳에 왔구나. 태국에 온 걸 진심으로 후회했다. 새벽이 너무 길었다. 출근 중인 사람이 포장마차에 앉아서 뭔갈 먹고 있는 게 보였다. 우리도 뭘 먹으면서 기운을 차려야 여행을 마무리할 수 있을 거 같았다. 포장마차로 가서, 옆에 있는 인간이 먹고 있는 거랑 같은 걸 달라고 했다. 그러자 무뚝뚝하게 생긴 아주머니가 프라이팬에 왕새우, 닭가슴살, 야채와 밥을 넣고 볶았다. 금세 볶음밥이 나왔다. 아주머니가 칠리가 들어간 소스를 넣어서 먹으라고 했다. 라임도 뿌려라. 우린 그렇게 했다. 완전 눈물이 나게 맛있었다. 맛있는 밥이 몸속으로 들어가자 태국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다 나쁘진 않을 거야. 재홍과 나는 긍정의 힘을 새로 얻었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니 파타야로 향하는 버스 매표소 직원이 출근했다. 얼른 매표소로 향해서 직원에게 파타야 티켓 2장을 주문했다. 그랬더니. 오늘은 파타야로 가는 날이 아닙니다. 띠용. 나와 재홍은 50대 반바지 양반에게 속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디선가 낄낄대며 우리가 전화하길 기다릴 거 같았다. 내가 필요하지 얼른 연락해. 그건 싫었다. 나와 재홍은 다른 이동 수단을 찾아보기로 했다. 다행히 나에겐 두꺼운 가이드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