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
태국 치앙마이
과거 왕궁의 출입문 타페 게이트에서
진드기에게 뜯기지 않기를 바라며 게스트하우스를 옮겼다. 에어컨이 있는 도미토리였는데도 매우 저렴했다. 대신 침대가 16개는 되어 보였다. 군대처럼 배치된 침대를 보고 재입대를 했나 싶었다. 내 옆 침대엔 프랑스인이 앉아 있었다. 그는 하루 종일 노트북만 끼고 있었는데 떠날 때까지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 인간이 박제된 사람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 일단 짐을 풀었으니 게스트하우스를 나서기로 했다.
구시가에는 오래된 성벽이 있다. 과거, 왕궁의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는 성벽이었다. 안과 밖을 출입은 Tha Phae Gate(타페 게이트)을 통해야 했다. 타페 게이트를 통해 안쪽으로 들어가면 골목을 따라 야시장이 펼쳐진다. 하지만 당시엔 야시장이 여기서 열린다는 사실을 잘 몰랐기에 가성비가 더럽게 좋지 않은 식당에서 맛없고 비싼 음식을 목 구녕으로 넘겨야 했다. 어쨌든 성벽은 너무 아름다웠다. 오랜 세월을 이겨낸 성벽은 아직도 견고했다. 물론 사람의 관리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부분은 허물어졌지만 말이다. 성벽의 색깔은 참 곱다. 많은 사람들이 저 성벽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게스트하우스를 나서면서 눈에 띄었던 서양인 여자를 성벽 근처에서 또 보게 되었다. 새하얀 얼굴에 노란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여행지마다 몰려다니는 서양인과 다르게 혼자 다니는 게 당당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호기심이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정말 인형 같았다. 그래서 말을 시켜보고 싶어서 한참 동안 다른 용무라도 있는 척 거짓으로 얼굴빛을 꾸민 채 간격을 둔 채 뒤를 밟았다. 차라리 그냥 말을 걸어서 수다를 떨었으면 친해졌으련만. 졸졸 따라가는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용기와 박력으로 말을 걸고, 상대가 불편해한다면 깨끗하게 돌아서면 될 걸 왜 바보처럼 30분이나 쫓아다녔는지 그것도 마치 뒤를 밟는 수사 요원처럼 말이다. 말이 수사요원이지 지금 생각해보면 스토킹이다. 정말 세상 모든 건 한 끗 차이에서 결정되는 것 같다. 당시엔 친해지겠다는 호의가 상대에겐 불쾌감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생각에 말을 거는 걸 포기했지만, 여행지에 온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건물을 보러 온 것이 아니다. 우연히 만날 수 있는 즐거운 친구와 함께 맛보고, 즐기고, 경험할 기회를 얻기 위해 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정한 방향대로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타국으로 온 것이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이 곧 여행을 떠난다면 용기를 내시라. 낯선 이와 친해질 수 있는 건 여행자의 특권이다. 물론 나쁜 마음을 먹고 접근하지 마라. 사람이 어떤 생각을 머릿속에 담고 있는지가 겉으로 드러나기에 향기 대신 구역질 나는 악취가 진동할 거다. 아름다운 나비와 벌을 끌어들이기보다는 파리나 구더기 같은 게 꼬일 뿐이다. 모두 유유상종. 끼리끼리 노는 것이다. 뒤를 돌아보니 고대의 유적인 타페 게이트가 보였다. '기껏 너희는 100년도 채 살지 못하잖아' 라고 말하는 듯했다. 조금 용기를 낼 걸 그랬다. 살아봐야 우리가 얼마나 살 수 있겠는가.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 / 낭만의 치앙마이
와위(Wawee) 커피로 왔다. 도이창 커피보단 맛이 떨어졌지만, 좀 더 대중적인 카페였다. 앉아서 바깥을 구경하며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고 있었다. 어제 만났던 제주도민 여자 두 명이 Wawee커피 앞을 지나가다 나를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한 명은 예, 다른 한 명은 보.) 예와 보는 항상 개구리 인형 커밋을 데리고 다녔다.
이들은 다니는 곳곳마다 커밋을 놓고 인증 사진을 찍었다. 마치 자신의 분신이라도 되는 듯 기괴한 녹색 개구리를 동생처럼 여겼다. 사실 굉장히 웃기게 생긴 이 개구리는 당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한국에서 외국으로 떠나는 여행자들은 이 녹색 개구리를 데리고 다니지 않으면 안 되는 병이라도 걸린 듯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예는 이 커밋을 어딘가에 흘렸는데, 거의 친동생을 잃어버린 언니처럼 슬퍼했다. 겨우 다시 찾기는 했지만. 그런데 예와 보는 살짝 다툰 듯 보였다. 둘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곳으로 오기 전 빠야에 있었는데, 보는 빠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했다. 반면 예는 라오스 방비엥으로 바로 가야 한다고 했던 모양이다. 둘은 담배를 피우면서 논의한 끝에 쿨하게 찢어지기로 결정했다. 모든 관계는 담배 연기와 같은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셋은 출출해져서 점심을 먹으려고 식당에 들어갔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보와 예는 앞으로 한동안 굶어야할 사람들처럼 푸짐하게 시켰다. 나는 카레를 하나 시켰다. 이곳 카레는 소탈하지만 참 먹음직스러운 음식이었다. 카레가 마치 수프처럼 진하고 부드러웠다. 보통 한국식 카레에 익숙한 나로서는 태국의 카레는 새로운 맛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두 사람과 여행사로 향했다. 보와 예는 여행사를 통해서 이동할 생각이었다. 여행사 일정상 예는 방비엥으로 오늘 떠나야 했다. 보는 내일 빠이로 떠나기로 했다. 갑작스러운 이별이었지만 우린 모두 담담했다. 여행지에서 만난 인연은 각자의 길을 가도록 가볍게 보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연히 만나서 인연이 됐지만, 원래부터 우린 온전히 혼자였기에 스스로의 길을 가야 할 땐 끈적거리는 것 없이 소탈하게 웃으면서 안녕해야 한다. 그래야 상대도 마음이 편하다.
예가 떠나고 나와 보는 타이 전통 마사지를 받았다. 1시간에 200바트였다. 시원했다. 나와 보는 산 꼭대기에 신전이 있다는 얘길 들었다. 다른 이동 수단이 없어서 툭툭이를 이용하려고 했다. 그런데 한 사람당 500바트가 시세라고 했다. 너무 비싸서 가는 걸 포기했다. 그래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태국은 언제나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스콜처럼 퍼붓는다. 나와 보는 비를 피할 겸 아무 가게로 들어갔다. 들어갔더니 맥주집이었다. 그런데 안주값이 정말 상상 이상으로 비쌌다. 치킨 한 조각에 300바트라니! 그래도 뭐라도 먹고 싶은 마음에 치킨을 사서 나눠 먹었다. 맛은 정말 군대에서 먹던 고무 닭 맛이었다. 시장에서 파는 30바트짜리 보다 맛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시킨 샐러드도 최악이었다. 이것도 거의 300바트였다. 보와 나는 이별주로 칵테일로 분위기를 내었는데, 음식과 칵테일까지 합하면 거의 1000바트에 육박했다. 1000바트는 한국 돈 3만 원정도였다. 물론 두 명이 술을 마시면서 3만 원을 쓴다는 건 한국이라면 사치가 아니었겠지만, 나와 보는 배낭여행자로 티끌모아 태산인 사람이었다. 그래도 만족했다면 좋았겠지만 별로 크게 만족스럽지 못한 메뉴였다. 뭔가 아쉬워서 더럽혀진 위장과 분위기를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나와 보는 2차로 라면을 먹으러 가기로 결정했다. 보는 모르겠지만, 난 라면도 형편없다고 생각했다.
내일 보와도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아쉬웠다. 그래서 늦은 밤까지 구시가를 돌아다니며 그녀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지나가다 들른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사서 홀짝거렸다. 금세 시간이 후루룩 지나가버렸고, 다 마신 맥주캔은 쓰레기통에 처 박혔다. 나는 보를 더 붙잡아두고 싶었지만 내일 일찍 떠나야 한다고 피곤하다고 했다. 나는 집에 가려는 부하직원을 말리는 술 취한 직장상사처럼 간청했지만 보는 더 마시는 걸 거절했다. 나는 보를 게스트하우스까지 데려다주었다. 나는 그녀가 들어간 게스트하우스를 마치 외출한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의 심정으로 물끄러미 보았다. 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게스트하우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로 게스트하우스를 들어갈 수 없었던 난 치앙마이를 한 바퀴 돌고 숙소로 가기로 결심했다. 아름다운 달이 뜬 치앙마이의 구시가는 참 매력적이게 느껴졌다. 언제 지어졌는지 모를 정도로 오래된 성벽과 여전히 밝게 빛나는 달이 묘하게 어울렸다. 그냥, '오늘을 행복하게 사는 게 인간에게 좋은 것' 이 정도의 생각이 들었다. 영원한 건 없기 때문이다. 낭만의 치앙마이 속에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