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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업계포상 Mar 14. 2016

놓아주다. - 치유에세이

또 다른 꽃을 피우기 위해서.

 2015년 늦가을 언저리. 삭풍의 손바닥 안에서도 꽃이 피었다. 나의 첫 출간이라는 꽃이.


 2011년 12월 경. 겨울보다 차갑던 철책 속에서 씨앗을 심었다. 진실로 원해서 시작한 주체의 씨앗, 그 씨앗엔 막연한 불안감과, 귓바퀴가 간질거리는 기대감이 넘실거렸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글을 써내는데 꼬박 2년을 들였고, 글을 고치는데 또다시 2년을 들였다.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좋았다. 이 세상에 오로지 나의 주체로 움터가는 존재를 보는 것도, 모든 걸 떠나 그저 글을 쓰는 것도 행복했다. 그것은 한낱 성적 오르가슴에 비할 바 없는 행복이었다. 나는 매일 씨앗을 돌아보며 어떤 꽃을 피울까? 어떤 향을 풍길까? 어떤 빛으로 빛날까 상상하였다. 화려하진 않아도 단아하길 원했고, 강렬하지 않아도 깊이 있길 원했다.


 그렇게 밤이며 낮이며 씨앗만 들여다보던 어느 날, 나는 아까워졌다. 내가 써낸 글을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찾아다녔다. 나의 글을 받아줄 곳을. 한 번 거절당하고, 두 번 거절당하고, 세 번, 네 번. 실패가 자신감을 갉아먹으며 켜켜이 쌓일 때쯤,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성공에 목말라있던 나는 덥석 그 손을 잡았다.

 나는 취해있었다, 나의 글에게. 그것은 흔히들 이 땅의 어머니들이 자식에게 가지는 감정과 같을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하던 내 눈엔 최고인 나의 자식. 흥청망청 고주망태가 된 나의 눈엔 모든 게 만족스러웠다. 달리지 않는 리뷰나, 매겨지지 않는 별점도, 오르지 않는 조회 수도 좋았다. 아무리 소수라도, 또 그들이 리뷰를 달지 않아도, 내 작품을 보는 모든 이들은 나름의 만족과 무언가를 얻어갈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하지만 취기는 언제나 밝아오는 아침 해에 달아나는 법이었다.

 책의 판매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리뷰가 달리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모자란 작품에 대한 피드백들이었다. 그들은 나의 글을 꾸짖었고, 내 글을 위해 투자한 돈의 아까움을 토로했다. 내 글에 대한 나의 자신감은 점점 줄어들었으며, 그렇게 사랑했던 꽃의 숨어있던 결점들이 내 눈에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또한 당시에 준비했던 두 번째 작품이 번번이 퇴짜를 맞으며 고개 숙이는 자존감에 박차를 가했다.

 그래서 외면했다. 나의 꽃들을. 나의 희망과 기대와 전율과 카타르시스들을 외면했다. 무서웠다. 피하고 싶었다. 사람들이 써주는 비판들이, 단지 그 사람에게 내 작품이 안 맞은 것이길 바랐다. 절대 내 작품이 모자란 게 아니길 바랐다. 그래서 외면하고 외면하며 가끔은 그 사람을 탓하곤 했다.


 ‘굳이 리뷰를 저렇게 까지 쓸 필요는 없었을 텐데…’


 치졸했다. 부디 내 작품은 문제가 없길 바랐던 탓이다. 몇 년간 공을 들이고, 고치고 고쳐 낸 내 첫 아이만큼은 문제가 없길 바랐다. 문제가 있더라도 글러먹은 작품만은 아니길 바랐다. 아니, 아니라고 믿고 독자들의 피드백과 비판을 외면했다.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다. 처음 피워 본 나의 꽃은 어수룩한 나의 손길 탓에 여기저기 무르고 모자란 부분이 많다는 것을. 단지 나는 피하고 외면했을 뿐이다.


 그렇게 4개월이 지났다.

 그 4개월간의 나는 당근을 매달아놓은 말처럼 내달렸다. 비명을 지르는 육체가 하얀 거품을 입가로 토해내는 것도 모른 채. ‘아직은 모자란 게 당연한 것’이라 위안하면서도 ‘더 좋은 글을 써야 해’. 뒤도 돌아볼 수 없었다. 시들어있는 나의 꽃을 마주할 것 같았으니까. 아니, 눈만 감아도 나의 꽃이 아른거렸으니까.

 나는 이미 숨어버린 나를 안고, 더 좋은 글을 써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이미 달리고 있는 나를 채찍질했다. 글을 쓰고 싶은지 아닌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 속에는 나의 희열도 기대도 전율도 카타르시스도 없었지만, 사람들의 환호라는 당근이 있었다. 물론 회의했다. 당근보다 더 큰 가치가 있다는 것은 알았으니까. 또한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이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두 다리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달려 나갔다. 인정, 이해, 호응을 위해 뛰었다. 어쩌면 평생 먹을 수 없을 지도 모르는 당근임을 알아도, 내 두 팔은 자꾸만 달려 하얀 종이를 까맣게 태웠다.


 나는 감히 그 순간을 전쟁이라 칭했다. 나의 첫 아이를 외면하며, 진정한 나를 숨겨놓고, 오로지 강박에 노예로 글을 쓰던 순간들을, 감히 전쟁이라 칭했다.

 또 참으로 바보 같은 시간들이었다 말했다. 나는 나의 작품과 함께 외면해버린 것이다. 내가 왜 글을 쓰는지를. 내 글을 왜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어 하는지를.

 나는 그제야 내 첫 아이를 놓아주었다. 독자 분들의 비판을 받아들였다. 독자 분들의 비판은 적절했으며 타당했다. 나의 부족함과 모자람을 알려주어 발전할 방향을 일러주었다.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돈과, 돈보다 값진 시간을 투자해 내 글을 읽고, 또 거기서 그치지 않고 리뷰까지 하사하시다니. 그렇게 무섭고 못마땅하던 사람들이 고마워졌다. 내가 왜 글을 쓰는지 다시 새긴 것만으로도.


 나는 글을 쓰고 싶었다. 돈 때문도 아니었다. 유명세도 바라지 않았다. 전대미문 최고의 문장을 쓰고 싶지도 않았다.(아니 사실 이건 조금 바란다.) 하지만 재화나 명예보다 더 바라는 것이 있었다.

 나는 글을 쓰고 싶었다. 나의 한 줄로, 나의 한 문장으로, 나의 한 편의 글로, 사람들을 울고, 웃게 하고 싶었다. 사람‘들’이 아닌 단 한 사람이라도 그대를 치유하고 싶었다. 나의 글로써 단 한 명이라도 위로하고 공감해주며 그대의 상처를 안아주고 싶었다.

 그래, 나는 너를 치유하는 작가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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