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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문수 Feb 24. 2021

죽고 싶지만 고양이는 보고 싶어

<장조림: 꽃 없이 내려온 프로메테우스> 6

사람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

훌륭한 행동과 마음가짐으로 타인에게 동경을 불러일으키고 귀감이 되는 경우와,

그간 저질렀던 잘못들을 마음속에 박제해놓고 후회하며

타인에게 ‘멀쩡한’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경우가 있다.


사람은 저지르고 나서야 그것이 잘못이었구나 깨닫는 일이 많다. 


예전부터 그것이 잘못된 행동인 줄은 알았어도 자신이 저지르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다.

그렇게 저질러버리고, 마음의 벽에 하나하나씩 과오를 걸어둔다.

그런 사람들은 괴로운 기분이 들 때면, 자기 자신 때문에 가장 괴로워한다.

내 자신마저도 나의 편이 아니라는 기분. 내 맘이 내 맘 같지 않은 기분.


자기 혐오에 빠지는 건 생각보다 간단하다. 나는 나의 하찮은 부분을 잘 알고 있으니까.

상황이 어긋난 것의 이유를 찾지 못하면 그 화살을 자연스레 자신에게 돌린다.

그게 오히려 편하다며 자신으로부터 타인을 구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처음도 쉽고 그다음부터도 쉽다. 그리고 깊이 빠져버린다. 염세주의자가 되거나 번아웃이 오거나

‘불행 중독’이 되고 만다. 이런 일종의 탈진 상태를 깨뜨리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힘들고 힘들고 힘들어서.

너무 힘들어서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도 않고 생각도 꽉 막히고. 


다 그만두고 싶고 세상에 내 편 하나 없는 기분이 들 때. 우리는 어떻게 다시 일어서야 할까. 

오늘은 그런 고민을 하려고 한다.




최근에 비디오 게임을 하나 했다.

아주아주 추운 날씨에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생존하는 게임이었다.

날이 밝을 때마다 빈집을 털어 물과 음식을 구해야 했고, 캐릭터가 달리기를 하면

피로가 눈 깜짝할 새에 쌓여서 어떤 때는 해가 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잠을 자야 했다.

게임상의 시간이 며칠 지나고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다.

 

사람이 별것도 아닌 일로 다치는 경우가 꽤 많다는 거였다. 


그래서 전혀 위험하지 않은 곳을 탐험하더라도 항상 구급약품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집집마다 구급상자가 있던 것이 새삼 떠올랐다.


갑자기 이야기가 딴길로 새면서 왜 게임 이야기만 주구장창 하느냐고 의문이 들 수 있겠지만,

우리는 우리 마음이 다칠 때를 대비해 그런 ‘구급약품’을 마련해두고 있는지를 말하려고 했다.

나만이 내릴 수 있는 즉각적인 처방 말이다. 뭔가 대단한 것이 아닐지라도,

더 심각한 상태로 빠지진 않게 만들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솔직히 말하면 그것을 마음이 멀쩡한 상태에서 억지로 만들어내기란 쉽지 않을 거다.

나 역시 ‘미리 하나 만들어 둬야지’ 하면서 어느 순간 , 하고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자연스레 생겨났다.

기분이 좋지 않았던 어느 날에 내가, 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자연스럽게 하게 된 것들이었다.

그걸 기억해두었다가 예기치 못한 우울과 좌절이 닥쳐왔을 때 한번 시도해봤다.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마치 병원에서 링거주사를 맞는 듯했다.

당연히 낯설지 않은 익숙한 방법이면서 꽤 논리적인 방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연 무엇이냐? 그냥 이야기하면 재미가 없으니 상황 설정부터 해야겠다.




약속 시간에 맞춰 우리는 집을 나선다.

약속 장소까지의 거리는 반드시 대중교통이나 택시를 타야 하는 상황이다.

택시비가 아까우니 버스를 타기로 한다. 그런데 오늘따라 버스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전광판을 봐도 십몇 분을 기다려야 한다. 하는 수 없이 택시에 오른다.

재수 없게도 마주치는 신호마다 죄다 걸려버린다.

택시기사님이 켜놓은 깜빡이 소리가 똑딱똑딱할 때마다 점점 초조해진다. 차도 막힌다.

마침내 약속 장소에 도착했지만 약속 시간은 지나버렸다. 만나기로 했던 상대의 표정이 박살났다.


그날 약속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스스로를 자책한다.

방에 들어오니 더 심각해진다. 약속 상대에게 아무리 사과해도 대역죄인이 된 것 같다.

자, 우울과 좌절이 쓰나미처럼 오는 게 훤하다. 이미 생각의 반복과 반복을 거쳤으므로

이대로는 마음이 나아지지 않을 것도 점점 감이 온다. 이제 나는 나만의 ‘링거주사’를 꺼낸다.


노트북을 열고 유튜브에 고양이를 검색한다. 즉, 귀여움으로 승부한다. 

고양이나 강아지 둘 중에 하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있지만, 둘 다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단언컨대 귀여움은 세상을 구할 수 있다. 


혹여 고양이와 강아지 둘 다 싫어한다고 한들 걱정할 필요가 없다.  든든한 지원군 ‘아기’가 있으니까.

이 지구방위대의 귀여움은 자극적이지 않고 깊이 있으며 마음을 따뜻하게 데운다.

가장 좋은 점은 부담이 없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다. 찾는 것은 숨쉬는 것만큼 쉽다.

여기서 우리 마음이 나았다면 오케이다. 하지만 인류의 적이 여기서 그치지 않을 상황도 물론 있다.

‘사천왕’ 단계가 있다는 말이다. 이 단계에 쓰이는 방법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노래를 듣는 거다. 참으로 진부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여기에도 원칙이 있다.

첫째, 감동적인 가사. 둘째, 빠르지 않은 박자. 셋째, 부드러운 음색의 가수.

이 삼박자가 맞는 노래를 다들 하나씩은 충분히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가사와 가수가 없는 음악 중에도 좋은 것들이 많지만,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가사와 가수의 목소리가 있는 것이 더 위로가 되었다.

음악이 주는 효과는 쉽게 기대할 수 있을 테니 더 길게 말할 필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으므로 ‘끝판왕’ 단계도 대비할 필요가 있다.

이 세 번째 방법은 나 역시도 그 효과를 확신하지는 못한다.

대부분은 ‘고양이’ 선에서 정리되거니와, 이 단계까지 온다면 고통받는 모습도 서로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나의 마지막 처방은 몸을 씻는 것이다. 몸에 물을 끼얹어 생각을 날려버린다. 여기에도 물론 원칙이 있다.

절대 거울로 내 표정을 보지 말 것. 꼴도 보기 싫을 땐 그냥 안 보는 게 상책이다.

그리고 방에 돌아가면 아무하고도 연락하지 말 것. 나를 잠시 격리할 것.

나보다 행복하고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을 보지 않을 것.


한마디로 현실을 벗어나 바보가 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걸 보고 현실 도피라며 매도할지도 모른다.

타인이 고통을 이겨내려는 걸 존중할 줄 모르는 그런 이기주의자들의 말은 들을 필요 없다.

현실에서 행복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게 아니라, 행복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현실이 잘못된 거다.

 

이것으로 내가 마련한 링거주사는 끝이다. 이제 남은 건 휴식과 회복의 시간.

이걸로 나아지지 않는다면 그다음 방법은 나도 모르겠다. 그땐 정말로 전문가를 찾아가는 게 정답일 듯하다.

처음부터 정답을 찾아가면 빠르고 효과적이겠지만, 가끔은 정답이 오히려 불편할 때가 있다.

어렸을 때 체하면 할머니가 배를 쓸어 주던 것처럼, 그런 방식이 우리에겐 더 많이 필요한 것 같다.


누구에게는 이런 것들이 부질없고 유치한 장난일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거대로 다행인 일이다.

그런 걸 따질 만큼 스스로를 미워하고 있진 않다는 말이니까.

그러나 누군가는 정말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 것 같았다. 아무쪼록 마음들이 아프지 말았으면 한다.

내일은 더 웃으며 보내 보자.

     

20.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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