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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문수 Feb 23. 2021

외침 속의 고요

귀로는 듣지 못할 목소리가 있다

우체국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배송 접수를 위해 백 원짜리 서류 봉투에 받는 사람, 보내는 사람을 펜으로 적고 있었다.

금융 창구 쪽에서 어떤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금융 창구는 우체국 안에서도 안쪽에 있었고 창구 앞에 선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창구 직원에게 무언가를 호소하고 있었는데 또렷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한 번쯤 돌아볼 정도로 말을 더듬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작업복 차림인 걸 보니

현장에서 작업을 마치고 우체국에 온 듯싶었다.


나는 서류 봉투에 기입할 사항을 다 적어놓고 번호표를 뽑았다.

의자에 앉아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금융 창구 쪽에서 고함이 들렸다.


     

해주기 싫으면 해주지 마! 해주기 싫으면 해주지 말라고!     



우체국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 그 사람이었다.

사정을 보아하니 통장을 만들기 위해 우체국 직원이 서류를 작성하라고 했는데

그가 연신 서류 작성하는 법을 모른다고 직원과 실랑이를 벌였던 거다.

경비 담당 경찰은 이런 일이 흔한 일이었던지 아무렇지 않게 금융 창구 쪽으로 차분하게 걸어갔다.

그렇게 애꿎은 창구 직원만 당혹스럽게 끝나려나 싶었는데 어느 우체국 직원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 직원은 그의 곁에 머물면서 서류 작성에 필요한 것을 일일이 손짓으로 짚어주었다.

그러자 그는 아무 소리도 않고 직원의 안내를 묵묵히 따랐다.

    

멋대로 어른이 되어버린 사람은 가끔가다 아이 같을 때가 있다.

하기 싫은 것, 할 줄 모르는 것을 해야 할 때 역정을 내고 언성을 높인다.

주변 사람들의 눈초리를 받는다.

그제야 하라는 대로 안 하고, 알려주는데도 할 줄 모른다며 떼를 쓰던 스스로를 깨닫는다.


누군가가 이런 글을 쓴 걸 본 적이 있다. 자기는 나잇값이란 말을 싫어한다고. 나도 그닥 좋아하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나잇값이라는 말이 때로는 사람을 판단하는 데에 있어서

꽤 신뢰성이 있는 기준이라는 걸 부정하진 못한다. 그렇다면 그 나잇값을 잴 때 우리가 보는 것은

그 사람의 인간성일 테다. 나이는 먹고 자는 것만으로도 늘어나지만, 인간성이라는 건 그렇지 못한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한다. 인간성이라는 것도 재능이 아닐까. 

인간성을 제대로 갖추고 태어난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도 좋은 인상을 주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런 게 아니라면 나이를 먹어감으로써 인간성이라는 것을 갈고닦을 필요가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방법이 좋은지는 잘 모르겠다. 학교를 멀쩡히 다닌 사람도 무례한 경우가 있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성공한 사람들 중에서도 인간답지 못한 행동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경우가 있다.

배려와 존중 역시 천성일까?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말라고는 하지만, 연탄재를 짓뭉개면서 시원함을 만끽하는 사람도 더러 있지 않은가.

음주단속 하는 경찰에게 침을 뱉고, 구급대원의 얼굴을 후려갈기고,

응급의료진의 멱살을 잡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세상이 아름답게 보여도 그런 사람들이 나타나고,

세상이 끔찍하게 보여도 그런 사람들이 나타난다면,

인간 사회는 처음부터 아름다울 수 있는 조건을 갖추지 못한 게 아닐까.




어느 날의 일이다. 역으로 돌아오는 방향이었으니 어디 다녀오는 길이었을 거다.

투명한 유리벽 너머로 엘리베이터가 멀쩡히 지상으로 올라가는 걸 구경하고 있었다.

어디서 거친 호흡 소리가 들렸다. 어떤 할머니셨다. 내게 잘 보이도록 손을 활짝 피시는 걸 보니

그 호흡 소리는 날 부르시는 소리였다. 할머니는 당신 손금 위에 손끝으로 무언가를 그었다.  

   


ㄱㅣㅊㅏ     



나는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으로 친절하게, 그리고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가는 길을 안내해드렸다.

할머니께선 내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나 역시 뿌듯한 마음이 들어섰다.

매표소에선 또 할머니께선 어떻게 하시려나 걱정이 드는 한편,

엘리베이터에 같이 있던 한 군인이 자상하게 할머니를 안내해드리는 모습이 보였다.


입술 대신 손금을 열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처음에 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는 죽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 없다.

아무리 크게 말해도 크지 않고, 아무리 작게 말해도 작지 않다.

어쩌면 목소리로 하는 말보다 더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른다.

‘기차’라는 글자만 보고도 기차를 타는 곳이 어디냐는 질문을 이해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그동안 사람들의 목소리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는가.

얼마나 이해하고 얼마나 믿고 있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나는 내가 들은 사람들의 말을 얼마나 알아들었고, 또 얼마나 알아들은 척했나.


뿌듯함도 잠시 불편함이 스멀스멀 자라나는 것은 내가 할머니를 대한 태도가

외국인을 대하는 것과 다름없어서였을 거다. 은연 중에 나는 기어코 그 할머니 같은 사람들을

다른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할머니께서 처음 손짓으로 ‘기차’를 긋고 있었을 때도

나는 가까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한 번에 알아볼 수 없었다.

그렇담 나는 정말로 들여다봤다고 할 수 있나. 눈을 가까이했지만 관심은 전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불쑥 튀어나온 손이 바쁘게 움직이는 게 신기했던 건지도 모른다.

만약 할머니께서 정말로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면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아무렇지 않게, 놀라지 않을 수 있었을까. 도움을 핑계로 대지 않으며 정답게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

    



세상에는 아주아주 잘 듣지 않으면 듣기 어려운 목소리가 있다.

우체국에서 보았던 아저씨의 고함도,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던 할머니의 손짓도 그랬다.

그동안 그런 목소리를 소홀히 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잘 들을 수 있을 거라는 말은 하기 어렵다.

그러나 노력해보려 한다. 너무 바빠 어떤 신경도 쓰지 못할 처지가 아니라면,

그들에게 다가가, 나는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노라고 눈빛을 보내고 싶다.     


20.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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