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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문수 Apr 02. 2021

십자가를 내던진 아이

엄마는 죄송하다며 얼마나 빌었을까

열 살 무렵, 아직은 성당을 다닐 때였다.

신앙이라는 말도 이해하지 못할 나이.

날 때부터 다녔던 곳이라,

안 가면 혼이 나는지라 그저 토요일마다 다니기만 하던 성당.

그해 여름날이었다.




세상이 가장 푸른 빛을 뿜어댈 때,

성당에서는 아이들을 데리고 여름 신앙 캠프를 떠났다.

뭣 모르던 아이들은 소풍을 가는 것처럼 설레는 마음을 안고

저마다 얼굴에 웃음을 걸고 있었다.

나 역시 퍽 즐거운 기분이었을 거다.

그때까지 어디 아늑한 곳으로 떠나서 하룻밤 자고 왔던 적이 없었으니까.


외박.


그런 말은 쓰지 않을 나이였지만, 그걸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꿈 같은 일인지는 알았다.

죽이 잘 맞는 친구들과 밤새 놀고도 헤어지지 않을 수 있다니!


그러나 신앙 캠프는 끔찍했다.


그날 낮에 무슨 일이 있었건 간에 내가 기억하는 순간은 그때부터다.


예수의 고행을 체험(?)하는 시간.


신부, 수녀, 청소년 담당 선생, 성당 관계자를 포함한 어른들은

수십 명이 넘는 아이들을 몇몇 조로 나눈 다음,

그 조마다 하드보드지로 만든 십자가를 하나씩 줬다.

 

말했듯, 여름이었다.

햇살은 날을 세워 땅을 쿡쿡 쑤셨고

그걸 먹고 자란 연둣빛 잔디가 또 삐죽삐죽 솟아있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그 십자가 판때기를 짊어지고 언덕을 기어오르게 했다.

사족보행. 네 발로 말이다.


Ed Sheeran의 <Castle on the hill>이 떠오르는 그런 상황이었다.

이 노래 세 번째 마디 가사가 이렇다. 땅바닥에 데굴데굴 굴러서 풀밭 냄새를 맡았었다고.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오는 잔디가 무슨 냄새를 뿜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요즘 세상에 현대인이 잔디밭에 손바닥을 짚을 일이 뭐가 있을까.

명절 때마다 산소에 가서 하는 성묘?


어쨌든 아이들은 예수의 고행을 체험(?)하기 시작했다.

지금에야 생각하는 거지만, 과연 거기 있는 어른들 중에

‘예수의 고행’이라는 걸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을까?

내 생각엔 거기 있던 신부조차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본다.

그중에 십자가를 어깨에 지고

푸른 언덕을 네 발로 기어올라본 어른이 누가 있었겠는가.

지들끼리 하하호호 떠들기 바빴지.


그걸로 끝났다면 별 탈 없이 끝났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 글을 쓸 일도 없었을 거다.

한창 땀을 줄줄 흘리며 아이들이 언덕을 절반쯤이나 기어올랐나 싶을 때,

바로 반대편 높은 곳에서부터 누군가 걸어 내려왔다.

 

악마.


악마뿔이 달린 머리띠를 쓰고 청소년 담당 선생 한둘이

아이들의 대열 반대편에서부터 언덕을 내려오고 있었다. 사뿐사뿐한 몸짓으로.

그들은 악마 흉내를 내며 아이들을 꾀었다.


자기들을 따라오면 몸 편하게 언덕을 내려가게 해주겠다고.

그들은 악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진짜 악마였다. 학대를 즐기며 보람을 느끼는 족속이었다.

그들은 아이들을 계속 회유했다. 순한 아이들은 악마의 말을 두려워했다.

악마가 다가올수록 신앙심을 더욱더 밝혔다. 하지만 그래봤자 아이들이었다.

계속해서 언덕을 기어오르고 있는데 저 멀리서 내 친구가 악마 머리띠를 하고

싱글벙글 언덕을 내려오고 있는 게 아닌가! 도저히 못살겠다 싶었다.

 

나는 육상 선수처럼 엎드려 있다가 기세 좋게 튀어 나갔다.

악마 머리띠를 얹고 신나게 언덕을 내려갔다. 바람이 붕붕 내 몸을 스쳤다.

땀이 식자 온몸이 짜릿할 정도로 시원했다. 여름이 아니던가.

그렇게 악마의 꾀에 넘어간 예닐곱 정도 되는 아이들은

대열과는 떨어져 봉고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갔다.


봉고차는 사람을 쪄 먹는 찜솥 같았다.

에어컨이 틀어져 있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기억하기로는 입 안이 텁텁할 정도로 더운 공기가 꽉 들어차 있었고 몸에선 땀이 장마처럼 흘러내렸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아이들에게 꿀맛 같은 미숫가루를 주는 거였다.

1리터짜리 페트병에 담긴 미숫가루를 너도나도 나눠 먹었다.

나도 차례를 기다리며 입맛을 다셨다. 미숫가루가 입에 들어가는 것만 떠올려도 침이 고였다.

그러나 내 차례도 오기 전에 봉고차는 숙소에 다다랐다.


봉고차 문이 열리자 신부님이 나타났다.

신부님은 악마의 꾀에 넘어가 ‘배교’를 저지른 아이들을 벌세웠다.

봉고차 안에서 손을 든 채로 꼼짝도 못하게 했다. 배교에 대한 엄한 설교가 시작됐다.

우는 아이가 생겼다. 악마의 꾀에 넘어갔다곤 해도 역시 순한 아이들이었다.

아마도 저마다 ‘예수님’에게 속으로 사죄했을 거다.


나는 아니었다. 확 성질이 났다.


자기들이 배교하라고 꾀었으면서 왜 나한테 이러나.

힘들어 죽겠어서 나왔는데 왜 구박하나.

그리고 정말로 중요한 게 있었다.


나는 미숫가루를 먹지 못했다!


툭 하면 왁 하고 터질 정도로 골이 잔뜩 났다. 하지만 나도 아이였다.

어른들 앞에서 대놓고 화를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일이 터졌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보러 여름캠프를 하는 곳에 온 것이다. 우리 어머니도 왔다.

어머니는 나를 보자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나는 어머니를 보자마자 울상이 되어 집에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디서 나타난지도 모를 어른들이 어머니와 나를 떼어놨다.

떼어놔도 나는 어머니에게 달려들었다. 집에 보내달라고. 여기 못 있겠다고. 눈물을 쏟으며 울부짖었다.

결국 어머니는 그곳을 떠났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어른들에게 둘러싸여 계속 울었다.

그중 한 사람이 내게 오렌지 주스팩 하나를 들이밀었다. 나를 달래보려는 셈이었다.


나는 팔을 저어 밀어냈다. 밀어내자 그 어른이 다시 주스팩을 들이밀었다.

또 밀어냈다. 또 들이밀었다.

그걸 홱 낚아채서 땅바닥에 내리꽂아버리고는 운동화 밑창으로 콱 뭉개버렸다.

빨대 꽂는 구멍에서 솟구친 주스와 함께 침묵이 주황빛으로 퍼져갔다.

나를 구경하던 모든 사람이 멍하니 서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악마 흉내를 내보려다 진짜 악마가 나타나자

아이들이건 어른이건 단지 ‘큰일 났다.’라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수습을 할 수 있는 건 일을 저지른 나뿐이었다.

나는 그 자리를 떠나 반나절이 지나도록

풀밭 틈에 깔린 바위에 홀로 앉아 시간을 보냈다.

결국 어느 청소년 담당 선생이 다가와 삼고초려 끝에 나를 데려갔지만,

그날 뒤로 성당에 갔을 때 날 바라보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달라져 있었다.


그런 와중에 무슨 깡이었는지 중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쭉 성당을 다녔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어머니에게 성당을 그만 다니겠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성당 다니기 싫다고 하면

한사코 성당을 다니게 시키던 어머니였던지라 이번에도 반대당할 줄 알았다.

 

어머니는 알았다고 말했다. 하는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래 성당이라는 게 어머니한테는 정말로 좋았던 게지.

그러니 날 거기에 보내면 어린 양처럼 자랄 줄 알았겠지.

하지만 웬걸, 난생처음 사람한테 배신감을 느꼈던 곳이 성당이라니.

그 어린 나이에 배신감이라는 감정을 배운 게 아니겠어. 그런데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우리 어머니를 원망할 수는 없어.

어머니는 자기 자식이 악마라는 걸 받아들여야 했으니까.

 



그 뒤로 십몇 년이 지난 지금, 그때를 떠올릴 때마다 생각하곤 해.

어머니는 그 일 뒤에 있었던 고해성사에서 과연 뭐라고 말했을까.


얼마나 많이, 죄송하다며 빌었을까.



21.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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