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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문수 Apr 11. 2021

대왕마마는 이제 없다

나도 행복해도 되겠지요?

그 시절의 아버지가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아버지의 가장 젊었을 때의 모습이다.

당시에 나는 아직 식탁 아래에 숨어 혼자 숨바꼭질하길 좋아하던 나이였다.

지금 떠올려 보면 아버지는 그날 노래방에 갔었던 것 같다. 그날 아버지가 했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젖 좀 만지러 가볼까.”




아버지는 오 남매의 차남으로 태어나

직업 군인이었던 장남, 큰아버지 때문에 혼자 장남 노릇을 다 해야 했다.

어려운 집안 형편 탓에 기술을 배우기 위해 들어갔던 고등학교도 그만두고 내려와

기운 가세를 어떻게든 해보려 했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목수가 되었다.

흔히 들을 수 있는 노가다, 공사판에 있는 남성의 삶은 전부 우리 아버지에게 해당된다.


하루도 빠짐없이 들이마시는 소주. 재미 삼아 부르는 노래방 도우미.

일이 끝나면 온몸에 뒤집어쓴 톱밥, 먼지.

집에 돌아오면 바깥에선 받지 못하는 극진한 대접을 바라고,

가장이라는 말에 무슨 절대적인 권력이 있는 줄 아는 구닥다리 식의 사고방식.

아내는 식모처럼 무슨 일이 있어도 저녁 밥을 차려야 하고,

자식들은 대들지도 말아야 하고 뭐든지 자기 말대로 움직여야만 하는 개처럼 자라야 했다.


아버지는 툭 하면 자기를 ‘대왕마마’라고 불렀다.

그게 무슨 자랑거리라고 친척들이 있는 자리에서도 떠들고 다녔다.

자기는 대왕마마니까 귀찮은 일은 하나도 안 한다고.

대왕마마가 말하면 꼼짝 없이 들어야 한다고.

아버지는 정말로 집에 오면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를 대왕마마라고 부르는 사람은 자기 말고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한번은 형이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빠 힘들게 살았데.” 

그러니까 아버지가 집에 와서 대접 받으려는 것과

가족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을 이해해줄 수밖에 없다는 맥락이었다.

그랬던 형도 이제는 아버지와 몇 마디 대화도 안 하는 사이가 되었다.

당연한 일이다. 십수 년간의 교육과 물밀듯 쏟아지는 매체를 통해

바람직한 부모의 모습이 어떤 건지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세상엔 부모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채로 부모가 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우리 아버지도 그중 한 사람이었던 거다.

가장으로서 경제적인 부양 책임지면

그것으로 아버지의 역할을 다하게 되는 줄만 아는 사람이다.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아버지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들을 배우지 못했다.

반대로 배우지 말아야 할 것들만 배웠다.


조롱, 멸시, 폭언, 성희롱, 억압, 가스라이팅.


덕분에 나는 게임중독이 아니어도 게임중독자 취급을 받으며 살았고,

어머니는 그저 사람들과의 원만한 인간관계를 가졌을 뿐인데도

집 밖에 돌아다니느라 밥도 안 차리는 정신 나간 년,

가정을 내팽개치고 엄마 노릇도 제대로 안 하는 사람 취급을 당했다.


내가 수능 시험이 얼마 안 남았을 때

어머니가 저녁 약속을 다녀오니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애가 수능을 본다는데도 안 챙기고 대체 뭐하는 거냐고.

나는 방에서 공부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시끄러워 죽겠으니까 제발 공부할 수 있게 닥치고나 있었으면.

누구 때문에 공부를 못하겠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인가.




아버지는 자기 말이면 뭐든지 옳은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자기 말이 틀린 줄도 모를 정도로

어리석고 오만하고 배우려 들지 않는 사람일 뿐이었다.

아버지의 사고방식은 근대교육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논리랑 하늘과 땅 차이의 수준이었고,

그런 교육을 받은 형과 나는 아버지의 말과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는 데에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형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이미 아버지라는 존재를 부정하며 살아왔다.

아버지를 부정해야만, 아버지를 닮지 말아야만 내 삶이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처지였다.

후레자식으로 살아야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인성파탄자인 효자보다는 사람 좋은 후레자식으로 사는 게 훨씬 낫다고 보았다.

둘 다 말도 안 되는 말이지만.




아버지도 어느덧 늙는 나이가 되었다.

나는 이제 키가 클 나이가 지났는데, 아버지는 점점 작아지는 것만 같다.

그렇게 작아지다가 결국 점이 되어 사라질 것 같다.

얼굴은 군데군데 푹 파이기 시작했고, 머리숱도 할아버지 산소처럼 너저분하다.

요즘은 염색을 해도 머리카락이 금방 하얗게 센다.


아버지는 이제 대왕마마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것 같다.

더는 형과 나를 자기 맘대로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것 같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게 아버지는 형과 내가 자라면서 무얼 배웠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

자기가 가르친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 싸워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거다.

자식들은 아버지를 부정하기 위해 계속 강해지려 살아왔고,

아버지는 자신이 계속 대왕마마로 있을 줄 알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버지로 살아왔을 뿐이다. 대왕마마는 이제 없다.

아버지로서의 제대로 된 역할을 하나도 하지 않아 자식한테 버림받을 중년의 남성만이 남아있다.

 

나는 여전히 자수성가를 이루어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살고 있다.

이건 우리 가족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

이에 더불어 훗날이라도 자식을 낳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불행한 부모 밑에선 자식이 행복할 수 없으니 말이다.

나는 아직도 행복이 뭔지 잘 모른다. 우리 집안에 행복이라는 건 없었으니까.

아버지가 대왕마마라는 말을 쓸 때부터 우리 집안에 행복이 피어날 일은 없었던 거다.

과연 내가 행복과 불행을 구별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도통 겪어보질 못해서 그렇다.

아직 행복이라는 것이 세상 어딘가에 정말 남아있다면

언젠가 내가 가 닿을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때에도 아버지가 아직 내 삶에 들어있다면 좋겠다.


당신 자식도 행복해도 되는 사람이라고, 가르쳐주고 싶다.

     

21.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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