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단어] 방심

by 류하


1.

꽤 오래, 그러니까 몇 달쯤, 아니 겨우 한 두 달 잊고 살았다. 이 삶을 순식간에 내 손으로 끝낼 수 있다는 사실을. 그 생각이 떠오른 건 소화제를 가지러 부엌을 지나다 흘낏 본 약 봉투 무더기 때문이었다. 불과 하루 전이었다. 한 달 만에 간 진료실에서 딱히 별다른 일은 없었다는 보고와 반복되는 뻔한 대화를 마치며 약 용량을 줄여도 되겠다고 먼저 제안했던 건. '약이 줄으셨어요.'라며 다정하게 말을 거는 약사에게 '좀 나아졌나 봐요.'라고 대답하며 빙긋 웃음 지었던 건. 딱 떨어지는 용량이 아니라 요전과 달리 하루하루 개별 포장된 약은 한 달치니 모으면 양은 제법 되겠지만 하나하나 뜯고 있을 걸 생각할 때의 타격은... 헛웃음이 흐른다. 요 며칠 맛도 느끼지 않고 입 속으로 욱여넣었던 음식들이 몸속에서 요동을 쳐 급히 소화제를 꿀꺽꿀꺽 삼켰다. 식도를 지나 위를 타고 싸한 액체의 흐름이 느껴진다.


완벽하게 방심했다. 제대로 뒤통수 맞았고. 돌아보니 곳곳에 무너짐의 증거들이 어지러이 뿌려져 있었다. 왜 몰랐을까. 아니 몰랐던 게 아니라 모르고 싶었던 거다. 빤히 눈에 보이는 걸 애써 외면하면서 괜찮은 척 뻗대고 있었다. 뭔가 다른 계획이 있는 것처럼, 하지 않을 그럴싸한 이유들을 만들어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었다. 거뭉*이 주는 달콤한 생크림에 파묻혀 뱃살만 불리면서.



2.

조**의 시간이 돌아왔다. 그동안 조용했다고 따발총처럼 눌러왔던 불안을 폭발시킨다. 이렇게 나를 까고 싶어서 그동안 어떻게 참았는지 모르겠다. 지금 집 꼴을 봐. 엉망이잖아. 집에 있으면 전업주부 역할을 해야 할 거 아냐. 냉장고는 텅 비어있고, 빨래는 쌓여있고, 집안은 또 지저분해졌지. 하루 종일 폰만 붙들고 있지 말고 생산적인 일을 좀 해봐. 헬스장은 등록만 해놓고 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미친 듯이 책을 읽는 것도 아니고, 글도 안 쓰고 있잖아. 뭐가 그렇게 문제라고 주변에 짜증만 버럭버럭 내고 혼자 그렇게 억울해해. 사소한 일조차 다 미루고. 예전엔 일 한다는 핑계라도 있었지. 게으른 이 모습이 결국 네 진짜 모습인 거지. 왜 살아.


가만히 듣고 있자니- 선 넘네. 그동안 거뭉의 품에 파묻혀서 어지간히도 숨 막혔던 모양이다. 그래도 여기까지. 더는 안 된다. 이만치 들어줬으면 조도 답답함 정도는 해소했을 테니 한숨 푹 자고 나면 쌓였던 분노도 맥없이 쪼그라들지 않을까.


막말을 쏟아내며 엄마 아빠 미워 싫어를 외치는 아이는 그저 자신의 슬픔과 화를 표현하는 방법을 모를 뿐이다. 공중에 흩뿌려져 사라진다는 걸 알면, 실제로 용암처럼 치솟아 흐르던 감정이 누그러지면, 아이는 먼저 무람없이 다가와 다시 장난꾸러기가 된다. 내 마음속 아이에게도 똑같이 해봤다. 아이의 말에 상처받지 않고, 반박 없이 들어주니 서서히 감정의 파고가 낮아지는 게 보인다. 그렇구나, 이게 되는구나.



3.

나는 신이 아니고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상황을 달리 보고 이후의 일을 달리 선택할 수 있다. 인간이니까, 생각하고 알아차리고 고치고 시도해 볼 수 있으니까. 내일이 있는 한 말이다.



* 거뭉: 괜찮다고 포용해 주는 역할의 내면아이

** 조: 나를 더 큰 상처로부터 지켜내려고 나쁜 역할을 도맡아 하는 비판자 역할의 내면아이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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