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음이론 Dec 07. 2021

5-6. 오억년버튼

양 옆 환자들은 이미 다 떠나고 나는 여전히 중환자실에 누워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으나 오늘은 46 x-ray day이다. 46번 찍었다는 소리다. 어차피 사고 나기 전의 삶은 머릿속에만 남아있지, 지금 현재와 이어지는 시공간이 아니다. 앞으로의 삶은 그동안 살아왔던 것을 아예 잊어버려야 차라리 편하다. 어차피 죽고 싶어도 누가 죽여주지 않으면 죽지도 못하고, 꿈속에서 만나는 괴물은 머리통은 안 먹다 보니 이렇게 살아야지 어쩌겠나.

이제는 제법 의사, 간호사 선생님들과 의사소통이 쉬워졌다. 입모양으로 대화하는 것은 여전하지만 쉬운 단어로 바꾸어 말하다 보니까 대화가 편해졌다. 잠 못 자는 것 때문에 정신과 의사 선생님과 면담을 몇 번 했는데, 오래 대화해주신 덕에 터득한 스킬인 것 같다.


"이론아, 오늘... 뭔가 또 할 건데, 잘할 수 있겠어?"

(시술해요?)

"아니, 입으로 이제 조금씩 먹어보는 연습 하자!"

(입으로? 먹을 수 있는 거예요?)

"사레들릴 수 있어서 천천히 연습해야 해"

(오오...)


오늘은 어떻게 또 지루한 하루를 보내나 걱정했는데 새로운 할 일이 생겼다. 간호사 선생님은 작은 빨대를 내 입에 넣어주셨다.


-쪼옥


"잘 삼키네! 지금처럼 천천히 먹는 연습 해서 조만간 밥도 먹고 하자"

(...)

"아이고... 입으로 먹는 게 너무 오랜만이어서? 울지 마, 좋아지는 과정이야"


입으로 뭔가를 먹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물을 삼키는 순간, 몇 달째 맛이라는 감각도 잊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선 눈물이 쏟아졌다. 너무 달고, 너무 시원하다.

오래 걸리기는 하지만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하루가 너무 길고 지루하고 답답하지만, 그래도 입으로 뭔가를 먹는 행위를 기다릴 수 있다는 게 좋다. 이제부터는 나에게도 아침, 점심, 저녁이라는 시간 개념이 생긴 것이다.


이전 19화 5-5. 오억년버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