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와 페미니즘의 즐거운 한 판승부 (스포는 없어요)
"엄마, 나 이번 주말에 집에 가서 엄마랑 바비 보고 싶어!"
엄마로서 부족한 점이 많았는데, 그래도 영화는 엄마랑 보고 싶다니... 나 인생 좀 잘 산 건가?
생각해 보니, 바비의 감독인 그레타 거윅이 연출한 '레이디 버드'도 우리는 같이 봤고
그 영화에서 모녀의 갈등이 폭발하는 장면을 보고 웃기도 하고, 좀 찔리기도 했었다.
이 여성감독, 뭘 좀 아시네!
암튼 처음엔 '바비'라는 영화가 개봉한다길래 그냥 여름 방학에
아이들이 볼 애니메이션인가? 했다. 그런데, 감독이 레이디 버드의 그레타 거윅인 거다.
이 감독이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건 아마 영화 속에 등장하는 뻔한 여성 캐릭터일 것이다.
그 뻔함에 맞서기 위해 영화감독이 됐을 그녀다!
그렇다면 바비는 평범한 아이들용 애니메이션은 아니다. 어쩌면, 아니 분명 페미니즘 영화일 텐데,
페미니즘과 바비? 이 어울리지 않는 만남, 도대체 뭐지? 너무너무 궁금했다.
게다가 남자 주인공이 누구인가? 무려 라이언 고슬링! 라이언 고슬링은 못 참지!
(저처럼 라이언 고슬링 좋아하신다면,
제가 예전에 쓴 글 중년이지만 키스신은 설레요. (brunch.co.kr) 추천... 흠흠)
우리 모녀의 기대는 하늘 끝까지 치솟았고, 당장 예매를 하기 위해 검색을 시작했지만
근처에 있는 극장에서는 하루 딱 한번 그것도 아주 늦은 시간 상영밖에 없어,
포기하고 말았다. 관련 기사마다 전 세계적으로 흥행돌풍이라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인기가 별로 없는 건가? 유명한 영화 평론가의 한줄평과 2.5라는
박한 별점을 확인하고 나니 그냥 볼거리만 무성한 기운 빠지는 영화예요! 하는 느낌이다.
영화 바비 관련 기사를 검색해 보니 '한국에서 죽 쑨 바비...'라는 제목이 눈에 띈다.
이 영화, 한국에서는 죽 쑤고 있단다.
하긴, 우린 아직 페미니즘에 웃을 준비가 안 된 느낌이다.
가끔 내 주변의 중년 여성도 페미니즘을 호환, 마마 취급한다.
그녀는 경단녀가 된 자신의 우울감을 표출하기도 하고,
동시에 여성으로서 누리는 일상이 나름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녀의 말에 나는 진심으로 공감한다.
그래도 페미니즘에 대한 그녀의 생각이 달라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럼 더 힙해질 텐데!)
그럼에도 영화 '바비'를 보겠다는 나의 열망은 꺼지지 않았고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막내의 검진 예약이 있어 방문한 병원 옆 쇼핑몰에서 드디어 바비를 상영하는
극장을 찾아냈다. 기존에 다니던 병원의 진료가 종료되는 바람에 방문한 새로운 병원이라 검사하는 곳,
진료받는 곳, 주차장 위치, 엘리베이터... 전부 낯설어 많이 헤맸다.
아이도 새로운 곳에서 검사받고 진료받느라 조금 지친 상태였다. 그래도 영화는 꼭 보고 싶었다.
과감히 예매 키오스크에서 결제 버튼을 눌렀다.
1시 10분 상영이니까 점심 먹고 다시 오면, 시간도 딱 맞아떨어진다!
12세 관람가니, 막내도 당당하게 볼 수 있는 영화고,
언니와 엄마가 침을 튀기며 이 영화에 대해, 이 감독에 대해 수다를 떠는 걸
들은 터라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엄마의 갑작스러운 일정 변경에 기분 좋게 동의를 해주었다.
드디어 나, 바비 본다~
일단 이 영화의 시작이 너무 인상적이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태초에, 아기 인형을 돌보며 엄마놀이만 하던 여자 아이들에게 바비가 나타나는 그 장면.
일단 첫 웃음이 빵 터진다. 내 옆에 혼자 영화를 보러 온 중년의 여성도 동시에 빵 터지며 같이 웃었다.
그리고 바비를 만난 후, 갖고 놀던 아기 아기 인형을 던지고 부스는 장면은 좀 기괴하기도 했지만,
육아에 지친 중년 여성에게 시원한 사이다 한잔을 제공하는 순간이기도 해
빵 터진 이전 웃음의 연장선에서 더 웃을 수 있었다. 이건 다큐가 아니다, 진지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느끼는 데로 웃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장래가 촉망되는 어린 여자 아이들에게 가르칠 게 고작 엄마 노릇 밖에 없었니!
앞으로 이 아이들이 대통령이 될지, 작가가 될지, 우주인이 될지, 그건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
절규하는 감독의 목소리가 스크린 밖까지 들리는 듯했다.
이후, 이어진 바비 인형놀이에 대한 패러디 장면들은 내가 만약 어렸을 때 바비 인형 놀이를 많이 하면서
자랐다면 더욱 재밌을 장면 들이었겠지만, 안타깝게도 난 그 정도로 바비와 친숙하지 않은 터라 조금만 웃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몇 번은 공감했고, 진짜 빵 터지게 웃었다.
하지만 영화 '바비'는 마블의 닥터 스트레인지:대 혼돈의 멀티버스의 요소가 들어있어
난 좀 힘든 부분이 있었다. 마블 그 영과, 솔직히 힘들게 봤다. 바비 역시 몇 번의 하품도 있었다고
고백해야 한다. 그래도 이게 요즘 트렌드 아닌가? 그래도 대혼돈의 멀티버스만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정신없게 하지는 않고, 바비월드와 현실 딱 두 개만 존재하니 나름 이해할 만한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표값이 아깝지 않을 만큼 완벽하고 눈을 사로잡은 미술,
K POP을 방불케 한 라이언 고슬링과 배우들의 집단 군무, 그리고 바비라는 인형 그 작은 아이템으로
쭉쭉 뻗어나간 기발상 상상력의 총체를 경험하는 건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전 세계적인 흥행 돌풍에는 이유가 있다. 구체화된 상상력, 작은 디테일도 놓치지 않겠다는 감독의 비장함이
영화 속 등장하는 비중이 적은 조연과 소품에서까지 느껴졌으니까.
난 점점 영화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다 어떤 장면에서 내 마음에 약간의 뭉클함이 찾아왔는데,
이건 진짜 예상 못한 순간이었다.
난 이 영화가 '토이 스토리'처럼 소년과 장난감 우디의 이야기로 흘러가는 줄 알았다.
소녀와 바비, 소녀의 정체성 찾기? 그런 건가? 했다. 그런데 바비가 만나려 했던 소녀의 정체는
내 예상을 벗어났고, 그 장면과 이후 시작된 우울한 중년의 엄마와 사춘기 딸의 스토리가
지금 함께 영화를 관람하고 있는 우리 모녀에게 찰떡같이 적용되는 바람에
난 속으로 박수를 쳤다. 내 옆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막내의 얼굴을 살짝 보니
낄낄 웃고 있는데, 살짝 찔림도 있나? 그런 건가? 엄마 마음을 좀 이해했으려나?
얼핏 묘한 표정이 지나간 듯도 한데, 반성하며 날 흘끔 본 듯도 한데, 아닌가?
알고 있다. 세상은 힘들고 예민해진 중년 여성을 싫어한다는 걸.
하지만 그녀에게도 사연은 있다. 바비처럼 뭐든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20대를 보낸 나를 비롯한
중년의 여성들은 현재 다 이루지 못한 자신의 목표 때문에 마음이 힘들고, 더 이상 뭘 더 이루는 게
불가능하다는 현실 인식과 함께 작아지고 예민해진다.
노화는 굳은 약속처럼 어김이 없고, 종종 찾아오는 절망감에 잠을 설치는 중년 아줌마는 늘 고단하다.
근데, 왜 할리우드의 젊은 여성 감독 그레타 거윅이 그걸 아는 거지?
어쩌면 그녀는 바비를 갖고 놀던 그 시절 소녀들의 안부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내 귀에 익숙한 신디로퍼의 노래를 영화에 등장시킨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영화는 이제 대단원을 향해 달린다.
이제 본격적인 페미니즘과 가부장제의 정면 승부가 시작되는데,
난 이 부분에서 일부 남성 관객이 불편함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한다.
특히 여자에게 뭘 설명하길 좋아하는 남성들, (그 유명한 영화 평론가도? 그래서 평점 2.5 밖에?)
여성이 예쁜 바보이길 바라는 누군가(위대한 게츠비에 나온 표현을 인용했어요),
아! 맞다. 영화 차인표가 불편했던 사람이라면 모두 이 영화의 후반부가 상당히 불편했을 것이다.
물론 남자들이라고 다 똑같이 그런 건 아니라고 나도 말하고 싶지만, 쉰 넘게 살아오며 다양한 장소에서
많은 남자를 구경해 봤는데, 솔직히 그런 면이 없지 않았다. 오죽하면 할리우드 영화에서까지 그걸 꼬집나?
그리고 '전쟁'에 대한 에피소드(스포 되면 안 되니까 자세히 언급하진 않겠다), 이건 진짜 팩트다.
여성은 전쟁을 일으킨 적이 없다! 이 영화의 감독 그레타 거윅도 그런 생각을 한 모양이다.
남성과 여성, 그리고 누군가. 페미니즘과 가부장제가 공존하며 갈등하는 세상을
핑크빛 동화로 가볍게 구현하며 그 상상의 끝까지 질주한 영화, 바비!
중년의 내가 공감할만한 포인트가 왜 이렇게 많은 거야?
물론 초반에 하품 몇 번, 하긴 했다. 하지만 라이언 고슬링의 탄탄한 복근과 BTS급 화려한 댄스를 생각하면
그 정도는 흠도 아니다. 몰랐네. '바비'가 중년 여성을 위한 영화일 줄!
요즘 달리기를 열심히 해서 그런가? 머리가 똘똘해져 민음사 세계 문학 전집을 한 권씩 읽어나가고 있다.
이게 또 불면의 밤의 치트키다. 잠이 안 올 때 딱 한 시간만 읽으면, 내면의 깊은 곳에서 하품이 터져 나오며 확실하게 다시 잠들 수 있다.
지난주에 읽은 건 1968년도에 발표된 [나의 미카엘(아모스 오즈)]이라는 히브리 문학이다.
난 이 소설에서 사랑과 결혼, 그리고 출산과 육아에 대한 모든 것이 아주 현실적으로, 구체화된 언어로
묘사되었다고 느꼈다. 페미니즘 문학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이는 아니 왜 그 소설을 그렇게 읽으세요?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난 그랬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결혼을 앞둔 여성과 남성이라면 반드시 이 책을 읽고 식장에 들어가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는 한나와 지질학을 연구하는 미카엘.
계단을 내려오던 한나가 발을 헛디딘 순간, 미카엘이 그녀의 팔을 잡아주며 둘의 인연이 시작된다.
사랑의 시작은 너무도 아름답다. 하지만, 결혼은 현실이고, 그 현실은 대대 손손 이어진
견고한 연결 고리 안에 존재한다. 결혼을 했다면 남편 고모의 날카로운 잔소리 정도는 순종하며 들어야 한다.
그리고 곧 아이가 태어나 엄마가 된 한나는 자신이 꿈꾸는 많은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육아는 힘들다. 미카엘은 책임감 있고, 좋은 사람이지만 그래도 한나는
고단하고, 점점 미쳐가고, 미카엘은 그걸 견디다가 결국 다른 여자에게로 마음이 옮겨간다.
한나는 그것에 분노하지 않는다.
나의 미카엘보다 먼저 읽은 작품은 1972년에 발표된 [소망 없는 불행(피터 한트케)],
독일 남성 작가가 쓴 소설이다. 이 소설의 화자는 51세에 수면제과다복용으로 자살한 엄마의 아들이다.
그냥, 갑자기 어느 날 평범한 하루를 마무리하고 자살을 선택한 엄마의 이야기.
돈이 없어, 하고 싶은 공부도 못하고, 자유도 누리지 못했다.
그녀 안의 빛나는 개성을 어디 한 번 뽐내 보지도 못한 채 그저 그런 엄마라는
존재로만 심심하게 살다가 죽어버린 한 여자에 대한 슬픈 이야기. 그게 바로 '소망 없는 불행'이라는
무시무시한 제목의 소설이다. 우연히 나도 대충 그녀처럼 51세 같은(?) 나이다.
그녀처럼 사람들을 웃기고 내 개성 뽐내는 걸 좋아하는 성향도 있어, 왠지 더 슬펐다.
엄마를 위해 글을 쓰는 아들은 그녀의 일생은 너무 불행했기에 차라리 죽음을 선택한 건 잘한 일이라고
기뻐한다. 이 소설은 누구나 인정하는 페미니즘 문학이다.
나에게 페미니즘이란 이런 거다.
단순히 머리를 짧게 자른 젊은 여성이 약하게 보이기 싫어 강단 있는 표정을 짓고,
남성스러운 옷을 입고, 사사건건 틀렸다고 세상을 뜯어고쳐야 한다고 말하는 게 페미니즘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아주 오래전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슬프게 존재하다가 사라진 누군가가 존재했었다고
인정하는 거. 물론 지금은 좀 나은 세상이 되었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 아직은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주류에 끼지 못하고 심지어 고통까지 받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걸 인정하는 거.
그런 게 페미니즘이 아닐까?
바비는 진지함을 덜어낸 가벼운 페미니즘 영화다.
이 영화를 보며 낄낄대며 공감했다면, 페미니즘 입문이다.
개인적으로 바비가 한국에서 죽 쑤지 않고, 사랑받길 바란다.
누군가의 슬픔에 공감하는 건, 고귀한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