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개와 산책하는 여자 정미현 1.

by 임지원

1.

[나이 46세, 이름 정미현]


상담이 예약된 날이다.

마음 치료센터를 다니기 시작한 지 1년이 지났지만 아직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다.

가을이 깊어간다. 겨울이 오고 있다. 남편의 기일이 얼마 안 남았다.

남편이 죽고 난 후 동기들 중에 가끔 연락을 해오는 친구가 한 명 생겼다.

그 친구가 우리 동네 근처에서 볼일이 생겼다며 나에게 오고 싶다고 한다.

카페 피렌체에서 만나기로 했다. 가끔 그 카페 브런치 메뉴를 한번 먹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딱히 같이 갈 만한 친구가 없었다. 그 친구가 온다니 한번 먹어볼 기회가 생긴 거다. 고마운 일이다.


아침산책을 하고 돌아오니 문고리에 샌드위치와 커피가 담긴 종이가방이 매달려 있다.

그가 두고 간 걸 거다. 들고 들어와 열어보니 작은 쪽지가 들어 있다.

[미현아 아침 꼭 챙겨 먹어.]

그의 글씨가 따듯하다.


11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30분 먼저 도착했다.

카페 안은 벌써부터 빈자리가 안 보인다. 주문하는 손님들의 줄도 길다. 내가 앉은자리 바로 뒤에 있는

테이블은 학부모 모임인 듯 보인다. 귀를 기울이니 그녀들의 대화가 들린다.

교장과 담임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흘끗 보니, 그의 아내다.

분명 그의 아내가 그 테이블에 앉아 있다. 대화를 주도하고 있다. 명랑한 그녀의 목소리가 내 귀에 꽂힌다.

이 동네로 이사와 살면서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는데 막상 이렇게 가까이에 그녀가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지 않다. 친구에게 연락을 하고 약속 장소를 옮겨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냥 다시 앉았다.

호기심이 생겼다. 그녀가 앉은자리는 나를 보기 어려운 위치다.

내가 갑자기 심장마비, 발작을 일으키지만 않는다면 나는 오늘 조용히 그녀를 관찰할 수 있다.

도대체 어떤 여자일까? 궁금해졌다. 어떤 이유로 그는 아내를 떠나고 싶은 걸까?

조심스레 귀를 기울이며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누가 봐도 그 모임에 어울리지 않는 여자가 테이블에 합류했다. 내가 아는 얼굴이다!

대여섯 살 정도 돼 보이는 남자아이를 데리고 우리 동 앞에 있는 놀이터에 와 오래도록 앉아 있던 여자.

자기는 파크로열에 살지 않는다고 물어보지 않는 나에게 말해주던 여자였다.

혼자 앉아 있던 그 여자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코를 풀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다가 아이를 데리고 사라지곤 했다.

그녀의 유모차에는 항상 남색 에코백이 걸려 있었다.


그 테이블의 대화를 엿듣다 보니 그녀는 분명 곤경에 처했다. 딸이 공부를 잘한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의 아내는 그 여자를 싫어한다. 망신을 주려고 불렀나 싶을 정도로

그녀를 궁지로 몰고 있다. 화풀이 대상을 찾은 걸까?


마침 친구가 카페로 들어오고, 우리는 이런저런 의미 없는 지인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상스러운 색깔의 꽃이 올라간 팬케이크와 소시지를 먹었다.

그 친구에게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는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대화가 너무 깊이 들어가, 꺼내면 안 되는 이야기들을

꺼낼까 봐. 한참 그렇게 의미 없는 말들을 주고받던 중 침묵이 이어졌다. 친구가 나를 빤히 보더니


“미국 어디랬지? 유학 간 현수는 잘 있어? 대학 진학은 한 거야?”

“응...”

“현수한텐 안 갈 건가 봐? 안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자식 안 보고 싶은 엄마가 어딨니... 이제 가야지.”


친구와 헤어진 뒤 상담 예약이 된 마음 센터로 차를 몰았다.



“정미현 씨, 어떤가요? 지낼 만해요? 술은 줄였어요?"

“거의 안 마셔요.”

“수면제랑 술을 같이 먹으면 절대 안 됩니다. 아셨죠?”

“그럼요. 그런 짓은 이제 하면 안 되죠. 카를로가 있어서 산책도 하고,

산책하니까 운동도 하고 싶어 지고, 운동하니까 훨씬 기분이 좋아요.”


“... 정미현 씨, 그거 거짓말이죠.”


그냥 멍청한 상담사인 줄 알았는데, 바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궁금한 게 있는데, 왜 여기 오는 거예요? 수면제 때문인가요?”

“꼭 그거 때문은 아니고요. 말할 사람이 없으니까 답답하기도 하고. 그냥 또래 친구 만나듯 온 거예요.”


“지난 1년 동안 미현 씨는 저에게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어요.

진짜 이야기를 하지 않을 거면 여기 오실 필요 없어요.”

“언젠가는 제가 말하지 않을까요?”

“그보다 미현 씨 친구를 만들어보는 건 어때요? 진짜 또래 친구요. 미현 씨 75년생 마흔여섯 살이죠?”

“...네”

“저는 미현 씨랑 또래 아닌데. 저 삼십 대예요.”

“아 정말이요? 죄송해요. 선생님”


우리는 오랜만에 같이 웃었다.


“그래도 치료는 멈추시면 안 됩니다.”


문득 친구를 만들라는 상담사의 말에 아까 그 브런치 카페에서 본 그 울보 아줌마 얼굴이 떠오른 건

왜 일까?

오래전 내 모습이 겹쳐진 걸까?


돌아오는 길에 시간을 보니 놀이터 벤치에 그 여자가 앉아 있을 시간이다.

매일 본 건 아니니 오늘은 없을 수도 있다.

문득 오늘 그 자리에 그 여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가서 확인하고 싶었다. 액셀을 밟는 순간 오른쪽에 새로 생긴 드라이브 스루 커피 전문점 간판이 보였다. 차선을 바꿨다. 오후의 나른함을 떨칠 계획으로 크림과 시럽이 잔뜩 올라간 커피를 두 잔 주문했다.

오늘 그녀와 이 커피를 마실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다행히 그녀가 벤치에 앉아 있다. 역시 내 예상대로 힘든 하루를 보낸 얼굴이다.


“커피 한 잔, 같이 할래요?”


눈이 또 촉촉하다. 코가 빨갛다. 방금 전까지 울었던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하다. 나에게도 비슷한 기억이 있다.


“아, 감사해요. 커피 좋죠.”

"네.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귀신 봤어요?”

“정말 그렇게 보여요? 진짜 귀신이시네.”


“난 정미현이에요, 이름 물어봐도 돼요?"

“김선영.... 저 마흔여섯인데, 나이 물어봐도 돼요?”

“나도 마흔여섯인데, 우리 잘하면 통하겠는데요?”


커피를 마시던 그녀가 갑자기 나를 찬찬히 본다. 그러더니, 불쑥 한 마디를 던졌다.

그 한마디에 진짜 또래 친구를 만난 기분이 들었다.


“혹시 무라카미 하루키 좋아해요?”


우리의 스무 살은 하루키와 함께였다. 늘 선을 밟을까 봐, 넘을까 봐 조심하던 그때, 그는

우리에게 방황하라고, 일탈하라고, 눈 좀 제발 시니컬하게 뜨라고 펌프질 하는 거 같았다.


그 여자와 나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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