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개와 산책하는 여자 정미현 2.

by 임지원

2.

나는 여고를 다녔다.


오래된 천주교 학교였는데, 교장, 교감 선생님이 모두 수녀님이었다.

사립 고등학교라 대부분 그 학교에 십 년 이상씩 근무한 분들이었고,

그분들은 모두 종교적 성향이 확실히 짙었다.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이름은 가물가물한데,

세례명이 확실히 기억난다. 팰릭스.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은 불어를 가르치던 분인데, 종교적 신념 때문이었는지 불어 수업보다 여성의 낙태가 얼마나 나쁜 것인지를 알려주는데 더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았다.

불어는 기억나는 게 없지만, 낙태를 하면 여성의 몸은 엄청나게 쇠약해진다는 건 기억한다.

스무 살 여자가 낙태를 하면 서른 살 몸이 되고, 서른 살의 여자가 낙태를 하면 마흔 살 몸이 된다고 했다.

그뿐 아니라 모성애를 저버린 죄책감으로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게 될 것이고,

실제로 낙태를 한 대부분의 여성은 오랫동안 악몽에 시달린다며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낙태를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때 본 사진이 기억난다. 어른 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워진 작은 발이었는데,

그게 실제로 임신 초기에 낙태된 아기의 발이라고 했다. 너무 작은데, 진짜 발이었다.

낙태 수술이 이루어질 때, 이런 발을 가진 자궁 속 아기가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며 살고자 한다고 했다.

낙태는 그런 작은 생명을 갈기갈기 찢어서 죽이는 것이니, 절대로 하면 안 된다고 알려주셨다.

끔찍하고 무서운 이야기였다. 그 당시 나는 남자와 자 본 적도 없는 고등학생이었지만,

힘들 때마다 낙태하는 악몽을 꿨다.


하루 걸러 밥상을 엎고, 별일도 아닌 일에 화를 내고

엄마를 때리던 아빠를 떠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나는 늘 1등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의대에 합격했다.

의사가 될 수 있다는 설렘, 입시가 끝났다는 행복에 젖어 하루하루가 꿈같았다.

하지만 대학 공부는 입시공부와는 또 차원이 달랐다.

2학년 가을, 본과 진학을 앞두고 부족한 영어공부도 해야 했고, 매일매일 암기해야 할 것들이 어마어마했다.

어느 날, 도서관에서 자료와 책들을 챙겨 나왔는데,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우산이 없었다.

뭐가 급했던지 자료를 가방에 넣고 뛰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유전학 교수님이었다.


그의 별명은 레드포드. 동양의 로버트 레드포드 라 불릴 만큼 스타일이 멋진 사십 대 후반의 젊은 교수였다.

그의 강의는 우리 대학 5대 명강의 중 하나로 다른 학과 학생들한테까지 인기가 높았다.

표적 유전자 연구로 불치병 관련 신약 연구에 큰 성과를 내,

최근에는 종종 뉴스에까지 얼굴을 비추던 그였다.

우리는 모두 그를 존경했다. 그때 난 연애도 제대로 못해본 상태였다.

사춘기 아이처럼 교수님을 흠모했다.

그런 그의 차에 타보게 되다니. 떨리는 마음으로 차에 탔다.

차 문이 닫혔다. 쿵.


부산스럽던 바깥과 달리 차 안은 고요했다.

강의실에서만 보던 존경하던 교수님과 이렇게 가까이 있어본 건 처음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의 숨소리와 체취까지 다 느껴질 정도였다.

차가 출발하자, 나는 전철역까지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그는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차는 리모델링이 예정된 기숙사 건물의 지하주차장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컴컴했다.

갑자기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는 예쁘다고 말하며 다가왔다.

그의 손을 거부할 수 없었다. 반항도 하지 않았다. 뭐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나는 그에게 짓밟혔다. 아빠에게 맞던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무기력한 표정이 싫었다. 그래서 나는 대학에 합격하자마자 집을 나왔다.

하지만 그게 바로... 내 얼굴이었다.


매일매일 낙태하는 악몽을 꾸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임신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낙태를 하라고 할 거 같았다. 낙태는 할 수 없었다. 임신 사실을 숨기고 학교 생활을 이어가던 중

결국 아홉 달 만에 아들을 출산했다. 공부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휴학 신고 기간도 놓쳐 재적이 되고 말았다.


내가 교수님의 아기를 출산했다는 이야기는 조심스럽게 퍼져나갔다. 대부분 나에 대한 비난이었다.

누구는 낙태를 했어야 한다고 했다. 의대생이 피임을 못했다는 게 말이 되냐며 나를 멍청하다고 했다.

술자리에서는 논란이 뜨거웠다.

나를 꽃뱀이라고 주장하는 쪽과, 아니다. 미련한 미혼모다 주장하는 쪽이 팽팽히 맞섰다.


어쨌든 내가 문제였다.


가까운 산부인과에서 아들을 출산했다. 엄마는 그날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산한 아이라 병원에서 3주 간 치료를 받았다. 아이가 퇴원하는 날 혼자 병원에 갔다.

병원비는 이미 지불된 상태였다. 아이를 데리고 원룸 오피스텔로 와 둘이 살았다.

아이 이름을 현수라고 지었다. 현수, 현수야. 이름을 불러보았다.

나는 이제 이 아이의 엄마가 된 것인가?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교수님의 일상은 그대로 굴러갔다. 그의 연구는 인류의 생명 연장에 크게 기여할 게 분명했다.

확실한 건, 모두 나보다 그를 걱정했다는 거다. 순간순간 억울한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났지만,

결국 내 잘못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사실 그땐 억울함보다 현수와 둘이 원룸 오피스텔에서 지내는 삶 자체가 너무 힘들어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끝없이 울며 보채는 현수를 그냥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나도 뛰어내리고 싶었다.

차라리 내가 현수를 낙태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기를 죽인 죄책감에 평생 악몽에 시달리는 것이 끔찍한가. 아니면 이 말도 안 통하는 아기를 돌보기 위해

인생을 포기하는 것이 끔찍한가. 매일매일 악몽과 지옥을 저울에 올려놓고 무게를 달았다.


학창 시절의 강렬한 배움은 교훈이 되어 나를 지배했다. 그래도 지옥을 선택한 내가 자랑스러웠다.

이게 옳은 거라고 생각했다. 현수는 끝도 없이 보채다 아주 잠깐 잠이 들기도 했는데,

그 옆에 누우면 시큼한 젖비린내와 함께 따듯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것은 분명 좋은 느낌이었다.

가끔 교수님이 찾아와 생활비를 주고 갔다.

4년 후 결국 교수님은 이혼을 하고 나에게, 아니 우리에게 왔다.


아이가 다섯 살 되던 해에 나는 오피스텔을 나와 교수님이 마련한 아파트로 들어갔다.

거기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현수가 초등학교에 가야 할 시기가 다가오자 혼인신고까지 하고

우리는 정식 부부가 되었다.

엄마가 비로서 웃었다. 엄마의 생각하는 나의 해피 엔딩은 이것 뿐이었다.

나는 떠밀려 떠밀려... 그와 부부가 됐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분명 그렇다. 나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놀이터에 노을이 진다. 선영 씨의 아들 동주가 놀만큼 논 듯 지루해한다.

동주를 보면... 오래 전 기억이 떠오른다. 현수가 생각난다.


우리는 다음에 보자는 평범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나는 선영 씨한테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하지만 하지 못했다.


"선영 씨, 나한테 아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죽었어요."


현수는... 지금 세상에 없다.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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