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화장실 변기에 앉아
울어본 적 있나요?

아이디어 회의에서 돋보이는 방법!

by 임지원


"결론부터 말하면, 저는 있습니다"


90년대 초반, 대학교 3학년 땐가? SBS.. 아! 그땐 sbs 예능작가 공채 모집이라는 TV 하단의 자막을 보고 한번 도전해본 것이 내 사회생활의 시작이었다. 운이 좋았던지 높은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그때는 개그맨과 작가를 함께 뽑아서 한 달 정도 연수기간을 가졌다. 지금 유명해지신 분들도 많다!



십 년 전 즈음인가? 암튼 큰 아이를 낳고 경단녀로 지내다가 우연히 인연이 닿아 이런저런 교육 컨텐트와 홍보물을 만드는 회사를 다니게 됐는데, 어느 날 서울대학교 가정의학과에서 은퇴하시는 교수님을 위해 영상을 만들어 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는 거다. 관련 회의에 참석했더니 굉장히 많은 의사들이 흰가운을 입고 쭉 둘러앉아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적고 하고 있는데, 어떤 분이 나에게 "혹시 저 모르세요?" 하는 거다. 알고 보니 그분은 나와 그 시절 예능 작가 연수를 함께 했던 서울대 가정의학과 학생, 명승권! 요즘도 TV에서 종종 얼굴을 본다! 서울대 의대생이 왜 여기 와서 이러고 있냐고 PD에게 자주 놀림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어쨌든 그분은 잠시 방송국 일탈(?)을 경험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 우연히 만난 것이다. 반가우면서, 뭐랄까...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그분은 방송국 문을 뻥 차고 나가도 이렇게 번듯해질 다른 방도가 있었던 거고, 그 시절 나에게 방송국 합격은 절대 놓칠 수 없는 과분한 기회였다는 걸 확인한 기분. 이제 생각해보니 그 시절 나는 오랫동안 '기'라는 걸 펴지 못했다.


내가 처음 투입된 프로그램은 일요일 오전 11시에 방송된 '최양락 이봉원의 좋은 친구들'. 코너 별로 영상을 만들고, 스튜디오에 앉은 여러 명의 패널들이 함께 보고 낄낄대는 그런 프로그램이었다. 하여간 기억나는 건... 그놈의 코너 아이디어! 그 아이디어 회의를 끝없이 했다는 거다. 나는 그 회의시간이 죽을 만큼 힘들었다. 솔직히 입을 떼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이미 오랫동안 예능국에서 일해온 선배 작가들은 달랐다.


회의가 시작되면 다들 놀러 온 사람인 듯 하나 둘 프로그램 방으로 들어오면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상 에피소드를 줄줄 말하며 그렇게 분위기를 잡는다! 다들 웃고 떠든다. 재밌다. 그렇게 회의가 시작되기 전부터 깔깔깔...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온통 "어떤 아이디어를 내야 하나..." 그 걱정이 떠나질 않았다. 그렇게 내가 긴장하며 입도 못 떼는 사이 회의 시작 전부터 입을 푼 회의의 고수들은 회의 중간에 다른 사람이 어설픈 아이디어를 내도 얼른 아이디어를 보태 완성도를 높이며 자신의 존재를 입증했다! 나중엔 누가 그 아이디어의 시작인지가 기억도 안 난다. 그게 중요하지도 않다!


회의를 마치고 나면 늘 허탈했다. 나는 뭔가 업적을 내지 못한 거 같아서 속상했다. 내 존재를 입증하지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에 힘들었다. 얼굴이 화끈화끈했다... 프로그램에 투입된 최말단, 최연소 작가로 가치가 낮아 보이는 노동도 많이 했다. 복사, 물론 많이 했고. 당시 시청자의 연애 사연이 담긴 편지를 받아 드라마로 보여주는 코너가 있었는데, 그 사연이 담긴 편지 한 자루를 밤새 읽기도 했다. 그렇게 내가 생각했던 방송작가의 삶과는 많이 동떨어진 하루하루를 보내며 나는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예능작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왠지 모르게 차갑게 다가온 어떤 동료의 눈빛에서 내가 회의시간에 제대로 아이디어를 내지 못한 것 때문에 그런 건가? 불안함을 느꼈다. 고민을 많이 했다. 그렇게 나는 가끔 화장실 변기에 앉아 눈물을 훔쳤다.


다행히 '좋은 친구들'은 장수 프로그램이었다. 최말단 아이디어 작가를 자를 이유도 없고, 나는 계속 그 팀에 머물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내 입도 살살 풀리기 시작했다. 당시 영화를 패러디 코너가 있었는데, 영화를 아예 다른 스토리로 재구성해 성우 더빙을 했다. 어떤 영화를 어떻게 황당하게 패러디하는가... 그게 관건이었다. 나는 코너 회의를 앞두고 밤새 고민을 하다가 '벅시'라는 영화로 아이디어를 냈다.

이 영화는 워런 버핏이 아니라 워렌 비티가 나온다! 요즘 젊은이들은 모를 것도 같다. 어쨌든!


"그러니까... 자신이 박 씨인 줄 알았는데... 박 씨가 아니라 벅 씨라는 걸 알고... 자신의 잃어버린..

자아와 성씨를 찾아... 어쩌고 저쩌고..."


주저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런데 다들 재밌다고 하는 것이다! 다른 아이디어가 덧칠되며 점점 완성도를 갖춰가지 시작했다. 나는 그 순간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나한테는 일종의 알을 깨는 순간?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게 점점 나는 회의시간에 나를 비하하는 일상의 에피소드도 늘어놓으며 고수의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다른 사람의 그런 이야기를 할 때, 저 얘기 끝나면 나는 무슨 아이디어를 내야 하나 고민을 했지만, 점점 그냥 그 이야기에 흠뻑 빠져 깔깔 웃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냥 떠오르는 생각들을 보태기도 하며... 그렇게 8년을 고수들 틈에서 부대끼다 보니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운 거다.


이후 교양 프로그램에서 일할 때도 그 역량이 가장 도움이 됐고, 무엇보다 대기업 클라이언트를 만나 회의를 할 때 아주 유용했다!


이 업계에서 깐깐하기로 소문난 어떤 차장님이 기억난다. 그 분과 회의를 하면 모두 다... 정적.

기라성 같은 학벌과 글로벌한 어학실력을 갖추고 있던 그분의 팀원들도 눈치만 보며 앉아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을 받고, 그 차장님과 팀원들 회의에 불려 갔다.

당시 우리 집은 마포였고, 회의실은 삼성동. 나는 운전면허 딴 지도 얼마 안돼 당연히 회의 시간에

늦었다. 모두 경직된 분위기로 앉아 있는데, 아줌마 한 명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와

요란하게 착석 세리모니를 펼치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하지만 나는 고수들과 보낸 시간이 있다! 네가 아무리 깐깐한 들, 방송국 놈들만 하겠어? 최대한 당당하게

의연하게 테이블 끝에 앉았다. 깐깐한 그분의 설교 말씀은 계속 이어졌다.

모두 너무나 경직돼 있어 도무지 아이디어가 나올 수도, 굴러갈 수도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주제는 '윤리경영'. 직원들에게 윤리의식을 심어주기 위한 홍보, 교육 컨텐트 아이디어를 내는 것이 이 회의의 목적이었다. 불쑥 뭔가 생각이 났다. 에라 모르겠다 던지자! 뭐라도 있어야 서로 웃기도 하고 논의할 '거리'라도 생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름이니까... 공포물이 대세잖아요,

비윤리적인 행위를 하면 귀신이나 괴물한테 확 잡아먹히게 할까요?"


놀랍게도 그 차장님이 그 아이디어가 맘에 들었는지 날 더러 기획안을 만들어보라는 것이다.

그 아이디어는 '윤리 명수 프로젝트'로 완성됐다. 회사 자판기에서 나온 자양강장제 윤리 명수를 마신 직원이 비윤리적인 행동에 휘말린 후 결국 귀신을 보고 놀라 자빠진다는 내용의 5분 정도 길이의 애니메이션을 다섯 편 정도? 만들었던 거 같다. 이후 그 차장님과 오랫동안 일을 했다. 그날은 운이 좋았다. 하여간 기가 죽으면 안 된다. 네가 누구든 나도 대단하거든! 그런 표정을 꼭 짓고 있어야 한다! 의연하게, 유머러스하게 말이다.


물론 그것만으로 다 해결되진 않을 거다. 어떤 날은... 주차장 자동차 안에서 통곡을 했다.

정말 거지 같은 인간을 만난 날이었다. 그렇게 사람 면전에 대고 갑질 하는 클라이언트는 진짜 처음 봤다.

정말 있구나... 그런 인간이. 내 딸이 이런 인간을 만나고 집에 와서 펑펑 운다면 쫓아가서 그 인간 뒤통수를 빡! 치고 싶을 거 같다. 생각만 해도 돌아버릴 거 같다. 그래도 일단은 당당하고 의연하라고

늘 딸에게 말해준다. 뭔가 어마어마한 백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여유 있게 생각하고, 유머러스하라고!

가장 쉬운 웃음코드는 자기 비하! 이게 별거 아닌데 은근 자존감 높아 보인다 ㅋ

어쩌면 그 거지 같은 인간들 중 몇몇은 '이 당당함 뭐지? 함부로 하면 안 되는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건가?' 할지도 모르니까!


어쨌든 일단 뭔가 아이디어를 내서 나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아이디어가 나온다.

나 역시 그 강박에서 벗어나는 데 몇 년이 걸렸다. 다양한 아이디어 회의를 해본 경험에 의하면 좋은 아이디어는 한 사람의 머리에서 툭 튀어나오는 경우보다 어떤 공동체에서 함께 굴려서 만들어지는 것이 훨씬 많다.

아이디어 회의를 하러 갈 때 뭔가 내가 공을 세우겠어! 나를 증명하겠어! 하기보다

일단 먼저 기를 펴고! 유연하게 내 생각을 함께 나누고, 편안하고, 재밌게 말하는 것! 그게 포인트다.


아이디어 회의를 진행할 때도 마찬가지, 자, 어디 한번 아이디어를 내보지! 그런 상사는 진짜 꽝이다.

요즘 그런 상사가 있을 리도 없겠지만~


MZ세대는 쿨하고 당당해서 절대 기죽지 않을까? 그들은 회사의 업무 환경이 고되고 부당하면 그걸 참기보다 그만두고 워라벨을 지키며 일할 수 있는 다른 회사로 가는 성향을 갖고 있다는 뉴스도 봤다. 물론 그런 MZ세대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MZ세대가 그런 건 아닐 거다. 나 역시 그랬다. 확실히 X세대였지만, 그 밝은 이미지가 우리의 모든 현실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니까. 어쩌면 예전의 나처럼 고되게 일하고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그들이 있다면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다.

... 화장실 변기에 앉아 울지 마세요. 마음이 아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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