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트코 20년다닌 아줌마마가결혼 앞둔 예비신부에게 꼭 하고 싶은 말
스물아홉, 결혼을 생각했을 때, 어쨌든 이 남자와 결혼을 하는 게 맞다는 확신이 있었다. 시기는 지금,
내가 일에서 벗어나길 간절히 원하는 이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그 시절 나는 정말 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당시 KBS 주말 예능에서 ‘허락해주세요!’라는 코너를 맡은 상태였다. 대학생 남녀 커플을 섭외해 여자 친구의 아버님을 찾아가 교제를 허락받는 내용. 하루 종일 전화통을 붙들고 대학생 커플을 섭외했다. (그땐 개인 SNS 그런 것도 없었다) 커플이 섭외가 됐다고 끝이 아니다. 여자 쪽 아버지가 함께 출연을 결정해주셔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섭외가 된 아버님들은 전국에 흩어져 계셨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 김포공항을 향했다. 대구, 군산, 부산!... 진도까지 가봤다. 인터뷰 내용을 대본으로 정리, 담당 PD와 아이디어 회의는 기본. 촬영장 동행해 촬영이 너무 허무하게 끝나지 않도록 조정해야 하고, 촬영에서 돌아와도, 편집실에서 PD와 함께 일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코너의 비중이 점점 늘어나 나중엔 거의 20분짜리 대형 코너가 되고 말았다. 주말 예능에 20분을 책임진다는 건 너무 무서운 일이었다. 만약 섭외를 못해서 촬영을 못한다면? 나는 그냥 죽은 목숨이다. 그렇게 피 말리는 1년을 보내고 나니 도저히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여러분, 저 그만둡니다! 결혼해요!!!”
그 말을 던지고 다시는 KBS IBC 건물 쪽은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결혼하는 것도 아니면서 일을 그만둔다는 건, 생각하지 못했다. 모르겠다. 왠지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놀고먹는 스물아홉은 이상해 보일 거 같아서였을까? 7년 연애가 결혼으로 마무리되는 게 당연했다. 그러니 진심으로 결혼에 목숨을 걸게 된 거다. 심지어 결혼도 안 한 상태에서 명절에 시댁을 방문했다.
작은 어머님과 몇 시간을 앉아서 전을 부쳤는데 너무 재밌는 거다! 브라보! 나는 결혼이 체질이야! 말씀도 별로 없으신 조용한 시어머님 옆에서 종알종알 거리며 며느리 놀이에 흠뻑 취했다. 신혼여행까지는 환상적이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자고 일어나니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짐 정리도, 청소도, 뭐 암튼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는 게 없었다. 어? 이 낯선 느낌 뭐지? 내가 생각한 결혼은 이런 게 아닌데...?
명절이 돌아왔다. 하루 전날 짐을 챙겨 시댁으로 갔다. 모든 음식은 어머님이 담당하신다. 내 역할은 하나, 바로 전 부치기. 와르르... 동태 살이 끝없이 쏟아져 나온다. 물을 짜내고... 밀가루를 묻혀, 계란을 발라 프라이팬에 올렸다. 기름내가 올라와 머리는 지끈지끈, 눈알은 터질 것 같다. 이제 동태전 달랑 끝났는데, 다리 허리 이미 마비된 듯 뻐근하고, 저리다 못해 감각도 없다. 일어났다 앉았다, 진득하게 앉아 일을 못하고 들썩들썩하니 어머님 눈치가 보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텅텅텅텅... 산더미처럼(분명 그렇게 보였다!) 쌓인 애호박이 썰리는 소리다. 다음은 아무리 빚어도 끝나지 않는 동그랑땡 재료들. 이거 도대체 몇 판을 부쳐야 끝날까!
익으면서 살이 말려 올라가는 오징어전, 맛살전, 버섯전... 이제 아무 감각이 없는 다리는 내 몸에 붙어 있지만 내 몸이 아닌 거 같다. 그래도 이제 정말 끝이 났다! 하는 순간, 어머님은 뭔가가 가득 담긴 큰 스텐 대야를 들고 오셨다. 녹두전 재료였다.
이대로 쓰러져 응급실로 가자! 차라리 뉴스에 나오자!!!
“이번 설 명절에 시댁에서 전을 부치다가 기절해
응급실에 실려 온 며느리가 있어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결혼 전에 했던 며느리 놀이는 뭐였지? 엄청 재밌었는데? 전 부치기는 정말 예상치 못한 복병이었다.
명절만 지나고 나면 난 미쳐있었다. 그래도 가끔은 포지티브 하게, 대부분은 네거티브하게 저항하며
어떻게든 전 부치기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하지만 남편은 꼼짝도 안 했다. 열 가지 다른 음식을 우리 엄마가 만드는데, 넌, 전 하나를 부치면서 그게 그렇게 힘들어? 왜? 그런 느낌이었다.
될 때까지 섭외 전화를 거는 심정으로 남편을 설득했다. 아니 들들 볶았다!
딱 십 년 만에 시댁에 가서 부치는 게 아닌 우리 집에서 전을 부쳐서 가지고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게 그렇게 오래 걸릴 일인가? 하여간 그놈의 전, 확실하게 퇴출시키진 못했지만
전날 시댁에 가지 않아도 되고, 남편을 부려먹으며 익숙한 부엌에서 내 방식대로, 부칠 수 있게 됐으니, 절반의 승리 정도는 이뤘다.
하지만 솔직히 지금도 힘들다. 재료 준비부터 부치기, 부치기 또 부치기... 치우기 또 치우기... 온 집안에 기름내 진동, 바닥은 기름 질질, 미끄덩미끄덩... 하여간 나는 넋이 나가고, 집안은 쑥대밭이 돼야 일이 끝난다.
그놈의 전, 명절이면 꼭 그렇게 많이 부쳐야 하는 건가? 먹고 싶은 만큼 각자 집에서 부쳐서 바로 먹고 끝내면 안 되나?
명절 코스트코는 그야말로 북새통이다. 하루, 이틀 전에 가면 줄을 서다 날 샌다. 그래도 어쨌든 한 번은 가게 되는데, 내 또래, 나보다 나이가 지긋하신 어머님들의 카트 안에 동태살, 홍 메기살이 담겨 있다.
가격도 저렴하니 두 개씩 던져 넣으신 모양이다. 팩에 담긴 간 돼지고기의 양을 보니 동그랑땡을 산더미로 만들게 생겼다. 저 재료들을 다 손질해 전을 만드시려면, 또 얼마나 고생을 하실까? 허리, 다리 얼마나 아플까!
누굴 걱정해? 내 코가 석자다.
여성이 전을 부치며 받는 정신적, 육체적 대미지에 대한 사회학적, 과학적 연구가 필요하다. 이건 진짜 보통 고된 노동이 아니다. 게다가 투입되는 노동에 비해 그 음식의 최후는 비극적이기까지 하다. 남은 전 활용 요리법? 그러니까 전은 대놓고 남는 음식인 거다. 그나마 찌개에도 들어가지 못한 전은 비닐봉지에 담겨 냉동실로 들어가 이사 가는 날 음식물 쓰레기봉투로 들어가게 된다.
[ 그동안 전 부치느라 고생하신 여성 회원님의 건강을 위해
올해부터 명절 기간 동태전과 홍 메기살의 판매를 잠시 중단하오니
널리 양해 바랍니다. ]
코스트코가 이런 페미니즘적인 마케팅을 한다면 어떨까? 전 팔아서 이윤 얼마 남기는 것보다
여성을 진짜 사랑한 마트로 역사에 남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