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갱년기가 들어왔다.

이 놈의 못마땅한 세상사

by 임지원

왜들 그렇게 남의 집 사는 걸 들어다 보려고 하는지... 하면서 나도 보고 있다.


온 앤 오프. 어떤 여배우의 on영상인데

괴한에게 잡혀 포박돼 땅에 묻히고, 비를 맞고,

악을 쓰고... 하여간 열연을 펼치고 있다.

감독이 오케이라는 데도 다시 하겠다며 열정 폭발

젖은 그녀가 덜덜 떨며 작은 난로에 몸을 데우자 옆에서

주변 사람들 괜찮냐고, 괜찮냐고. 그녀는 잠시 전 열연을 펼친 배우로서의 자부심이

폭발하며 괜찮다고, 괜찮다고.

이번엔 그 젖은 몸으로 차에서 식은 도시락을 먹는다.

옆에 앉은 스텝도 그녀를 안쓰러워하며 괜찮냐고, 괜찮냐고.

다시 한번 긍정의 에너지가 폭발하며 식은 도시락도 맛있다!

너무나도 밝은 얼굴로 괜찮아 괜찮아!

...

그녀가 내뿜는 긍정의 에너지가 왜 이렇게 보기가 힘들지? 버겁지?

그 영상을 보는 스튜디오에서도 그녀가 안타까워 난리법석

아우 진짜... 괜찮았겠지. 괜찮았으니까 곱게 꾸미고 스튜디오에 나와 앉아 있겠지!

어디 한 군데 부러지기라도 했으면 나왔을까?

하여간 징글징글하게 괜찮냐고 묻는 꼴을 보니

갑자기 내 마음에 분노가 급발진을 시작한다.


"아니, 저렇게 저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데서 자기 일하고 인정받고,

걱정받고, 돈 벌고 아주 그냥 복에 겨워 죽게 생긴 사람을 보고 왜들 괜찮냐고 난리법석들이야!

진짜 불쌍한 게 뭔지나 알고들 저러는 거야? 애를 낳아봐!

몇 날 며칠을 하루 세 시간도 잠을 못 자고 화장실도 못 가면서 손목이 아파 칭칭 감고

설거지에, 청소에, 빨래 개고... 그렇게 부지런히 움직여도

맨날 엉망진창인 집에서 말도 못 하는 아기는 옹알대다, 울어재끼다...

속에서 천불이 나도 귀신 하나 나타나 괜찮냐고 물어보지도 않더구먼."


남편과 큰 딸아이가 내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서로 뭔가 눈빛을 교환하는 느낌이다.


"왜? 둘이 무슨 작당 중인데!!!"


남편이 조용히 리모컨을 집어 채널을 바꾸며 말한다.

너는 우리 집의 핵이다. 뉴클리어... 갱년기 맞단다.

갱년기가 무슨 벼슬도 아니고. 찔린다.


"그냥 봐... 채널 안 바꿔도 돼. 흠흠"


다음 게스트는 부자 언니란다.

예전에 가까이 지내던 둘째 아이 친구 엄마가

바로 이 부자 언니의 책이라며 나에게 보여준 적이 있었다. 부자 언니 좋지... 부럽다.

예상대로 그 부자 언니의 집은 으리으리했다. 차도 어마어마!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주식 시황 체크. 베트남에서도 돈을 벌 궁리가 있는지

베트남어를 배운다. 그 와중에 자신이 얼마나 돈을 안 쓰고 뭐든 아끼는 절약의 아이콘인지를

어필하기까지. 집에서 입는 옷은 사는 게 아니란다. 하여간 집에서 입는 옷 사는 인간들은

애초에 돈 모으긴 다 글렀다는 듯 핀잔을, 핀잔을 그렇게 준다.

그럼 가정주부인 난 거의 맨날 집에 있는데...

하여간 그런 자기 자신이 자랑스러워 미치겠는 모양이다.

그 부자 언니 덕분에 건물주까지 됐다는 그녀의 추종자들까지 불러 일장 연설 시작.

옆에서 무슨 얘길 해도 듣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주장만을 말하고 또 말하고.


아... 이 기분 뭐지? 나 왜 저 언니한테 혼나는 기분이지?


그동안 내가 번 돈들이야 부자 언니가 그토록 목 놓아 외치는 '자본' 그런 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들이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이상하게 선비처럼 자라 하여간 글로 뭔가 이루고자 하는

열망만 불타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대단한 것을 이루지도 못했다.

안타깝게도 큰 걸 이룰 만큼 엉덩이가 무겁지 못해

이거 쓰면 얼마 줄게, 저거 쓰면 얼만 줄게 그런 말들에 폴락폴락 휘둘리며

결국 이거 저거 쓰다가 결혼하고 애 낳고, 쓰다가 또 애 낳고.


그래도 인생을 싹 갈아 넣어 만난 두 아이 덕분에 울고 웃으며

문학을 읽고 이해하는 내 삶을 사랑하고, 사소하게 쓰는 걸로 한을 풀 수 있음에

감사하며 아직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을 기다리고,

돌아가신 지 십 주기가 된 박완서 작가님의 작품과 대담집, 잡지에 실린 특집 기사까지

한 줄 한 줄 아껴 읽으며 그분의 숨결을 느껴 보고자 애쓰는 소녀 같은 열정으로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데... 그놈의 돈 좀 똘똘하게 모으지도, 관리하지도 못했다고

나 이렇게 혼날 일이야? 몸값을 올리라고?

결혼하고 출산, 십 년 있다가 또 출산.

그렇게 수시로 경력을 제로 세팅하며 자존감 바닥 치면서도

엄마라는 이름과 함께 어떻게든 쓰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 고군분투해온 내 삶을

왜 비난해?


"뭐야? 돈이면 다야? 왜 내 인생을 비난해? 집에서 입는 옷 좀 샀다고, 몸값 그런 거 모르고

산 게 이렇게 자괴감들 일이야? 뭐라고 말 좀 해봐 내 눈이 이상한 거야?"


남편이 급히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돌린다. 이번엔 나도 막지 않는다. 흥!



길고 긴 마흔이 지나 쉰이 시작되자

유달리 화가 많아지고, 세상사가 죄다 못마땅하다.

그 열연 펼친 배우도,

성실하게 돈 벌어 부자 되고 또 부자 전도하는 그 언니도, 다 멋진 사람들이다.

호르몬 탓인가 패배주의에 사로잡힌 내 마음 탓인가

하여간 내가 속이 꼬여 그렇다고 해두자.


그래도 어쨌든 행복 떠벌리는 꼴은 안 보고 싶다.

그런 행복은 혼자 조용히 집에서 누렸으면... 세상엔 불행한 사람들이 더 많다.

행복한 모습 속에 진심이 전해지면 내 마음도 열리지만,

그냥 떠벌리는 건 영락없이 알아보겠더라는. 제발 적당히 합시다.


몇 주 전, KBS 다큐 인사이트의 '아내의 정원'편을 보다가 엉엉 통곡을 했다.

야생화로 정원을 가꾸며 행복하게 아름답게 예쁘게 살다 가고 싶으시다는

할머니의 삶을 보며 존경의 마음... 슬픔인데 기쁨 같기도 한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봇물 터지듯 폭발했다.


넌 뭘 그렇게 이루려고 하니... 니 꽃밭은 여기야.

세상 떠나면 널 기억할 사람은 지금 니 옆에 가족이란다.

그래! 남은 인생은 저 할머니처럼 예쁘게 소박하게 살자. 다짐하는데도

종종 마음에 불꽃이 타오른다.


그놈의 못마땅한 세상사...


3대째 기독교인 우리 집. 나는 2년 동안 기독교 잡지에 칼럼을 썼다.

진심으로 예수님의 사랑이 좋다.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려는 자들에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신 나의 예수님.

그런데, 그런 나의 종교가 차별금지법을 반대하고 있다. 아... 힘들다.

한 달 전 즈음 경향신문에서 연세대 기독교 관련 학과 교수님이 쓴 칼럼을 읽었는데

기독교가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말았으면. 하는 내용이었다.

동지를 만난 기쁨에 휘리릭 읽었는데, 뭐랄까... 기분이 찜찜했다.

뭐지? 내 기분이 왜 이러지? 그 찜찜함은 글의 논조 때문이었다.

그분은 분명 자신의 글이 누군가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동성애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였다면 예수님도 한 번쯤 언급하셨을 텐데... ' 이 정도 선에서

칼럼은 마무리됐다. 마음이 오그라들었다. 이 정도야? 차별 금지하자는 생각이

이 정도로 위험한 거야?


다행인지 불행인지 난 그분보다 잃을 게 많지 않고,

어쨌든 우리 집 현관으로 갱년기가 들어왔다!




주말을 앞두고 코스트코에 네 식구가 총출동을 했다.

1년 만인지, 2년 만인지... 아무튼 코로나 이후 처음이었다.

각자의 욕망을 따라 이곳저곳 두리번거리는데

갑자기 우리 큰 아이가 "잠깐!!!" 그런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가리켰다.


중년, 갱년기 여성 건강을 위한 9중 케어

회화나무 열매 추출물과 감마리놀렌산 어쩌고 저쩌고...!!!


남편이 산삼이라도 발견한 듯 얼른 그 건강기능식품 상자를

우리 카트에 던져 넣었다.

그 순간 큰 아이와 작은 아이 얼굴에 뭔가 희망이랄까, 바람이랄까

얼핏 그런 표정이 싹 올라오는 걸 나는 봤다.

우리 엄마가 이 건강기능식품을 먹고

더 이상 예민하지 않길, 폭발하지 않길, 짜증 내지 않길 바라는 간절한 희망이겠지.


미안하다. 미안하다!


갱년기가 참 무섭다.

예전엔 그냥... 대충 지나가기도 했던 이런저런 감정들이

아주 선명하고 확실한 모습으로 나를 장악한다.

나는 분노했다가, 억울했다가, 화가 나 돌아버렸다, 그런다.

차별금지법 반대하는 기독교뿐인가...

그놈에 못마땅한 세상사는 그 뒤로도 줄줄이 비엔나소시지다.


아니, 말이 나온 김에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 뭐 그런 신박한 제목의 드라마 1회를

우연히 본방으로 보게 됐는데 남주는 왜 여주 집에 구둣발로 저벅저벅 들어와 놀라게 하고

여기저기 나타나 막 위협하고, 겁주고 왜 그러는 거지?

저게 요즘 트렌드야?

내 눈엔 그저 '남자는 마초!'에 사로잡힌 올드한 느낌이다.

하긴 뭐, 저 드라마 제작진들이 갱년기 호르몬 탓에 속이 베베 꼬인

나 같은 아줌마 보라고 저 드라마를 만들었을까,

젊은 시청자들이 좋아하면 된 거지.

그래도.

저런 무례한 남자를 매력남으로 느끼면 어쩌나,

멋진 남자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 만들어지면 또 어쩌나

적잖이 걱정이 된다. 노파심이겠지만...


갱년기 갱년기... 노래를 불렀지만

솔직히 이 모든 넋두리를 갱년기 탓으로 돌리기엔 양심에 찔리는 부분도 없지 않다!

갱년기 물타기 하면서 하고 싶은 말이나 꽥꽥하면서

그놈의 못마땅한 세상사에 작은 디스라도 하다가 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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