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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혀노블 Jun 03. 2024

우리 집은 오늘부터 외벌이입니다.

나는 백수가 되었다.


아니다 내 직업이 회사원에서 전업주부로 바뀌었을 뿐 인가?


직장 생활 15년 8개월만이 일이다.


IT회사 기획팀 차장. 커리어의 정점에 서 있다고 생각는데...


회사가 어렵다는 건 알음알음 알고 있었다.


매출을 견인하고 있는 사업은 시장에서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었고, 새롭게 투자받은 사업도 이렇다 할 성과 없이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회사의 위기를 먼저 감지한 건 내가 아닌 팀장들이었다.

커피값과 회식비를 없앨지 회사에서 고민 중이라는 내용을 얼핏 전해 들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팀 운영비마저 없애야 할 정도로 회사는 궁핍했던 것 같다. 


회사의 근무 방식은 하이브리드였고, 팀 별로 같은 날짜에 출근하는 것이 일반적이는데,


대표님이 직원들의 출근일을 교묘히 피해 출근하는 것 같다는 우스갯소리 들려왔다. 


직원들의 동요를 우려한 탓인지 회사는 과묵했고, 나는 이를 애써 외면했다.


정확히 두 달 뒤, 긴가민가 했던 우려 현실로 다가왔다. 


'변하지 않는 건 오직 변한다는 사실뿐'이라는 명언은 진부하고, '평생직장'이라는 단어는 올드하다.


그러나 변화를 두려워하는 나에게 회사는 언제나 '변하지 않을 평생직장'이었다. 


회사는 나에게 단단한 온실이었다.


찬 바람을 막아주고, 적당한 채광과 알맞은 온도, 적절한 습도를 제공해 주었다.


온실 속에서 경력을 쌓았고, 결혼도 했으며 애를 낳아 키웠다.


육아도 업무의 연장이라며 6개월 만에 복직한 나에게 연봉을 인상해 준 고마운 회사였다. 


월급이 날 보증해 준 덕분에 은행 레버리지로 '자가'도 샀다.


어느 날 마케팅팀 대리가 슬며시 다가오더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를 읽어본 적이 있는지 물었다.


워낙 유명한 책이었기에 제목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마케팅팀 대리는 그 책의 대기업 부장과 내가 오버랩된다면서 부러워했다.


기분이 썩 좋았다.


집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던 시기라 남편의 반대를 무릅쓰고 집을 산 내가 대견해서 스스로 어깨를 토닥이고는 했다.


맞벌이로 대출 원리금을 함께 벌고 있었으니 무엇이 무서우랴.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권고사직서 받았어... 당신 이제 외벌이야"


어쩌면 온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게 아닐까?


슬로 장면처럼 온실을 뒤덮고 있던 유리가 와장창 깨어지고, 유리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날리는 모습이 연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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