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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혀노블 Jun 13. 2024

권고사직... 올 것이 왔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지금 이 시점에 혹시라도 연민이 새어 나온다면 그것 조차 사치라고 느껴질까 봐 조심한 듯,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앉아있던 신임 대표가 말문을 열었다.


"다른 계열사에 내가 갈 자리가 있는지 알아봐 줄 것이고, 회사의 사정이 나아져 다시 내 직무에 사람이 필요하게 된다면 나를 우선적으로 재고용하겠다."


사전에 입력된 값을 출력하는 기계처럼 그의 얼굴과 목소리에서 감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내 앞에는 내 이름과 소속, 직급과 함께 '회사의 경영악화 이유로 권고사직에 동의하여 퇴사하고자 합니다.'라는 한 줄의 짤막한 문구가 적힌 종이 한 장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거기에 사인만 하고 나오면 된다던 나보다 앞서 들어간 동료들의 조언대로였다.


이 회사에서 내가 보냈던 시간들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이제 막 처음 만난 대표의 권유에 왜 쉽게 사인을 해야 하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퇴사의 조건으로 한 달간 일을 하지 않아도 한 달 치 월급을 선심 쓰듯 위로금으로 주겠다고 하는 것도, 실업급여를 신청해서 몇 개월간 구직 활동만 하면 된다는 것도 선뜻 내키지 않았다.


회사에 남아 일을 하고 싶을 뿐, 당장 몇 개월을 쉬고 싶지도, 구직 활동을 해서 다른 회사로 가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었으므로..


나보다 연봉높고 권한도 더 많던 임원들이 결국은 회사를 이렇게 만들어놓고 왜 우리더러 나가라고 하는 건지 되묻고 싶었다.


나는 하려던 말을 고르고 골라 "지금 당장 여기에 사인을 해야 하는 건가요?"하고 물었다.


신임 대표는 '권고사직'이라는 말 그대로 사직을 권고하는 것이지 강제성 없기 때문에 지금 바로 사인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뜨거운 불덩이를 삼킨 듯 단전에서부터 어떤 열이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더 앉아 있다간 그 열기를 입 밖으로 빼내려 아무 말이나 쏟아낼 것만 같아서 사인하지 않은 채 급히 일어나 문을 열고 나왔다.


나와 임신 중인 영업마케팅팀 대리. 이렇게 단 두 명만 권고사직서에 사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다.


사인을 할지 말지 고민하던 그녀는 이 상황에서 오는 자극들이 임산부에게 그리 좋은 것이 아님을 알았기에 이틀 뒤 권고사직서에 사인을 했다.


나는 권고사직서에 사인한 모든 동료들의 의사를 존중했다.


그러나 사인을 해야만 하는 줄로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 이렇게 퇴사를 하게 된 것이 억울하다는 우리 팀 디자이너와 다음날 사인을 번복하고 싶다며 이사님을 찾아갔다는 운영팀 대리의 이야길 듣고 분노했다.


회사에서 권고사직을 번복할 기회를 주고 없던 일로 하는 것으로 합의하지 않는 한 권고사직서를 강제로 빼앗아 찢어 없애취소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중요한 결정을 하기 전 그 결정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인 우리에게 숙고해 볼 시간조차 제대로 주지 않은 회사가 원망스러웠다.


결국 나도 권고사직서에 사인하고 퇴사를 했기 때문에 먼저 사인한 동료들과 다른 결말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내가 왜 권고사직 퇴사 대상자인지 그 이유를 수긍하기 위한 시간을 벌었고, 나를 내보내고 싶어 하는 회사에 또 다른 협상 카드를 제안할 수 있었다.


전체출근을 한 그날로부터 겨우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은... 업계 특성상 한창 바빠야 할 시즌이었다.


절반 가까이 되는 인원그렇게 회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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