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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혀노블 Jun 08. 2024

이런 말을 꺼내게 되어 너무 죄송합니다.

목요일부터 전체 출근을 하라는 업무 메시지를 받았다.


예고 없던 전체 출근 메시지에 불만 혹은 당혹스러운 마음들이 개인 메신저를 통해 오갔다.


"엠바고도 없이 출근이라니 직원들에 대한 배려가 너무 없는 거 아닌가요?"


"당장 다음 주부터 세 시간 거리의 출퇴근을 다시 하려니 막막해요." 


재택근무는 필수가 아닌 선택사항이었고, 이로 인한 연봉 삭감도 없었기에 회사는 언제든 정책을 바꿀 수 있었다.


코로나가 종식되기 이전부터 많은 회사들이 전체 출근 정책으로 바꾸었는데, 우리에게 그날이 좀 늦게 도래한 것뿐이었다.


재택근무가 워라밸을 보장해 주었기에 연봉이 크게 오르지 않아도 불만 없이 회사를 다닐 수 있도록 기여한 바가 컸다. 


우리에게 할당된 정보는 '신임 대표가 누구라는 것', '다음 주부터 재택근무가 사라진다는 것' 두 가지였다.


회사와 직원들의 앞날에 '걱정'과 혹시나 하는 '가정'들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재택근무가 폐지되면 출퇴근 거리가 먼 사람들 중 아무개는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할 것 같은데요?"


"새로운 대표님이 오셨으니 그동안 진행하던 신규 사업은 올스톱 되는 건가요?"


미리 예방접종을 하듯 최악의 상황을 나열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예상 못한 시나리오 하나는 '비자발적 퇴사'였다. 


다가올 상황은 까마득히 모른 채, 모든 게 불확실한 것들 투성이인 상황에서 드디어 전체 출근일이 도래했고,


신임 대표가 어떤 말부터 꺼낼지 추측해 보았지만 이내 '정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우리가 뭘 알아낼 수 있겠느냐'며 도돌이표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오후 2시, 굳은 표정으로 회의실에 들어온 신임대표는 노트북 화면을 응시한 채 뭔가를 찾고 있었다.


회의실의 공기는 무거웠고, 정적과 노트북 타이핑 소리만이 가득했다.


이내 신임대표가 고개를 들어 직원들을 바라보았고 "이런 말을 꺼내게 되어 너무 죄송합니다."라는 말로 회의를 시작했다.

 

대형 모니터에는 우리 회사의 적나라한 재무상태가 공개되었다.


회사의 지난 5년은 매년 마이너스였고, 3년 전 유일하게 소소한 이익을 냈으며, 2년 전에 투자받은 돈은 모두 판관비로 소진되어 현재 자본 잠식 상태가 되었다..


미리 말을 했어야 했는데 그 시기가 너무 늦어져 미안하다며 지금 이대로라면 당장 두 달 뒤, 회사의 현금이 고갈되고 만다.


퇴직금도 월급도 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권고사직을 진행할 것이고, 권고사직 대상자는 한 달 치 위로금과 퇴직금을 받고, 실업급여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만약 권고사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정리해고를 진행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급박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을 양해해 달라. 


그 얘기를 듣자 나도 모르게 수심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듯 눈앞이 깜깜해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혹스러웠던 것도 같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직원들은 이름 순서대로 회의실에 불려 들어갔, 안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듯했다.


권고사직은 뭐고, 정리해고는 또 뭐지? 무슨 차이가 있는 거야? 


저 종잇조각에 사인을 하면 회사와 이별인 건가?


내 30대를 다 바쳐 일한 회사에서 내 소속과 직함을 빼고 나면 난 도대체 어떤 사람으로 남는 거지?


머릿속이 복잡하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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