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고사직을 권하는 두 번째 면담에서 다시 한번 거절을 하고 회의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다.
이렇게 결말을 꽉 닫아버린 채로 나오지 말고 생각을 좀 해 보겠다고 여지를 남길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회사에서는 그래도 마지막까지 나한테 한 달치 월급이라도 더 챙겨가라며 생각해서 말해준 건데 내가 너무 회사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건가?" 싶기도 했고, 당장이라도 괘씸하다며 정리해고로 돌입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었다.
불안한 마음에 자리로 돌아가 권고사직과 정리해고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권고사직 :
기업이 권하는 사직을 근로자가 수락해 퇴사하는 것. 해고와 다른 점은 회사와 근로자가 합의 후 퇴사할 경우 성립하는 것이므로 권고를 거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 법적으로 명확하게 정의된 개념은 아니지만
실무적으로 위와 같은 의미로 널리 사용된다. 근로자 입장에서는 사실상의 해고로 볼 수도 있겠으나, 회사는 통상 근로자 부당해고로 감당하게 되는 법적·제도적 리스크를 회피하기 위한 금전 지급 등 조건을 제시하며, 근로자는 관련 분쟁에 대한 부담 등으로 이를 수용하여 법적 효력이 발생되는 것이 일반적으로 이러한 상호 편리성으로 관행화되었다. - 나무위키 출처-
권고사직은 회사에서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직원과 퇴사에 합의하는 방식이었고, 정리해고는 신임 대표가 나에게 말한 것과는 다르게 회사에 그다지 유리한 방식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일정한 요건을 갖추어 정리해고를 진행해야 하고 그 대상 또한 법이 정한 기준대로 선택하지 않을 시, 직원을 복직시켜야 하며 밀린 월급과 이자까지도 부담해야 할 수 있는 상황으로 흐를 수 있었다.
한마디로 회사에서는 손 안 대고 코를 풀고 싶은데 내가 너무 완강한 상태인 것이었다.
근로기준법 제24조(경영상 이유에 의한 해고의 제한)
① 사용자가 경영상 이유에 의하여 근로자를 해고하려면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어야 한다. 이 경우 경영 악화를 방지하기 위한 사업의 양도ㆍ인수ㆍ합병은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본다.
② 제1항의 경우에 사용자는 해고를 피하기 위한 노력을 다하여야 하며, 합리적이고 공정한 해고의 기준을 정하고 이에 따라 그 대상자를 선정하여야 한다. 이 경우 남녀의 성을 이유로 차별하여서는 아니 된다.
③ 사용자는 제2항에 따른 해고를 피하기 위한 방법과 해고의 기준 등에 관하여 그 사업 또는 사업장에 근로자의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이 있는 경우에는 그 노동조합(근로자의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이 없는 경우에는 근로자의 과반수를 대표하는 자를 말한다. 이하 “근로자대표”라 한다)에 해고를 하려는 날의 50일 전까지 통보하고 성실하게 협의하여야 한다.
④ 사용자는 제1항에 따라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일정한 규모 이상의 인원을 해고하려면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고용노동부장관에게 신고하여야 한다. <개정 2010. 6. 4.>
⑤ 사용자가 제1항부터 제3항까지의 규정에 따른 요건을 갖추어 근로자를 해고한 경우에는 제23조 제1항에 따른 정당한 이유가 있는 해고를 한 것으로 본다.
회사에서 나를 해고하려면 1, 2, 3항 모두의 조건에 부합해야 하는데 2항과 3항의 조건에 미루어 나는 그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대표가 바뀌었고, 회사에 출근하라고 하더니 나한테 권고사직서를 들이밀었기 때문이라는 사실만으로 저 조건은 유효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6개월밖에 안된 갓난쟁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출퇴근을 해 왔고 친정엄마의 손에 대부분의 육아를 맡겼었다.
그 아이가 자라 어느덧 초등학생이 되었지만, 육아휴직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회사로 돌아와 지금까지 내가 지키고 싶어 했던 것은 무엇일까?
나에게 육아휴직이나 육아기단축 근로 같은 제안을 하고, 해고를 회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을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왜 권고사직의 대상이고, 정리해고의 대상인지 내가 미처 모르는 이유가 내재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회사 역량평가 사전을 찾아 내 직급의 역량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맡은 바 책임을 다 하고, 전문성을 키우며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이 내 직급에 주어진 역량이었다.
내 역량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는 아니지만 회사가 원하는 방식대로 내가 할 일을 찾아서 스스로 열심히 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고사직서에 사인하지 않겠다 말하고, 회의실 밖으로 나와 죄책감을 느끼며 나 자신이 아닌 회사의 입장을 이해하려 나름 애쓰고 있던 내가 어처구니없게 느껴졌다.
한 때는 내 일부라고 믿고 일했던 지금의 회사를 부당해고로 신고하는 것까지 시뮬레이션해 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두 번째 면담을 통해 나에게서 굳은 결의와 의지를 보았을 신임 대표는 아마도 내가 그렇게 하고도 남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리 멀지 않은 시일 내에 세 번째 면담을 요청해 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