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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숲 Jul 26. 2018

향수병과 한식, 양배추김치

이유도 없이 한없이 맥이 빠지고 의기소침 했던 날, 워싱턴DC 외각에 있는 한국 베이커리 ‘신라명과’에 계획도 없이 어쩌다 가게 됐던 적이 있다. 한 눈에 쏙 들어오는 한글 네임태그, 눈에 익은 빵 종류, 추억의 옛날 빵들, 그리고 부쩍 많이 보이는 한국 손님들. 시들시들했던 마음에 시원한 여름 소나기가 내린 양 활기가 넘친다.


그날 밤에는 신라명과에서 구매한 빵에 시원한 맥주와 함께했다. 한국에서라면 간식으로나 꺼내먹던 ‘별 볼일 없는 빵’을 저녁 시간에 고이 꺼내어 한 입 한 입 음미했다. 그 놈에 빵이 뭐라고, 우울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행복이 충만해 진다. 아, 나는 한국이 그리웠던 거구나.


나도 몰랐던 마음을 알게 된 그 후부터, 그리운 한국 음식이 생각나면 최대한 만들어 먹기로 한다. 애초부터 한국음식을 자주 해먹던 행동력은 더욱 적극적으로 되어 ‘열정’ 언저리까지 상승된 요즘이다.


“참 대단한 열정이다.”


“요리의 모든 과정이 행복이야.”


미국에 살면서 나는 정말 한국인이구나, 자각하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김치 사랑이다. 김치 뭐,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이었던 한국에서의 생활, 사실은 김치가 식생활에 당연하게 녹아있어서 몰랐던 일이다.


서민음식이라는 김치, 미국에서는 귀하디귀해 사먹기 부담스럽고, 사먹더라도 맛이 썩 좋지 않다. 김치의 재료가 되는 배추는 정말 금값이다. 크지도 않은 배추 한 포기에 만원이 훌쩍 넘으면, 김치찌개에 숭덩숭덩 썰어 넣기에도 손이 떨린다.


그래서 배추를 대체할 만한 식재료로 양배추가 떠올랐다. 양배추는 배추와는 달리 미국마트 어딜 가더라도 쉽고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다. 기대 없이 양배추로 김치를 담은 날, 유레카! 양배추라도 김치는 김치구나! 아삭아삭한 식감을 즐긴다면 오히려 배추보다 양배추김치를 더 즐겨 먹을 수도 있겠다 싶다.




김치를 만드는 과정은 배추나 양배추나 동일하다. 양배추를 절이고, 풀을 쑤고, 양념을 만들고. 양배추가 잘 절여지면 겹겹이 붙어 있었던 양배추가 한 겹 한 겹 쉽게 떨어진다. 양배추를 구부려도 툭, 하고 부러지지 않으면 다 절여진 것.



양배추김치 만드는 법


1. 양배추 한 통을 먹기 좋게 썰어서 소금에 세 시간 정도 절여둔다. 쪽파 흰 부분을 함께 절였다가 나중에 김치소로 써도 좋다. 절인 다음에는 양배추를 흐르는 물에 세 네 번 씻어 둔다.

2. 밀가루풀을 만들어 한소끔 식혀뒀다가, 열기가 남아 있는 풀에 고춧가루를 잘 섞는다.(색이 더 잘 나고, 고춧가루 냄새가 덜 난다.)

3. 마늘 일곱 알, 생강 한 톨(마늘 두 개 크기), 양파 한 개, 사과 반개를 믹서에 갈아서 준비한다.

4. 절여둔 양배추에 믹서에 갈아둔 채소, 밀가루풀, 멸치액젓 10스푼을 넣고 잘 섞어 준다.

5. 맛을 보고 고춧가루나 멸치액젓, 취향 따라 설탕을 조금 추가해 주면 완성.   


김치를 만들다니, 김장을 하다니. 사실 김치를 담는 것도 미국에 와서 처음 해봤다. 내가 아쉬워서 나를 위해 만드니, 귀찮을 것도 힘들 것도 없다. 그저 행복이다.


이렇게 만들어둔 양배추김치는 배추김치와 다를 바 없이 똑같이 쓰인다. 김치찌개, 보쌈용 김치, 김치부침개까지. 배추김치 못지않게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양배추김치가 익으면 새콤한 풍미가 더해지는 것 까지, 부족함이 없다.




갓 담은 양배추 김치를 만든 날에는 돼지고기를 사다가 보쌈을 만들어 먹는다. 어릴 적, 엄마와 할머니가 메인 셰프가 되고, 아빠, 나, 동생들 모두가 보조 셰프가 되어 김장을 하면, 그날은 어김없이 굴과 돼지고기를 사다가 보쌈을 먹었다. 고기를 잘 안 드시는 할아버지도 그날은 갓 담은 김치와 돼지고기 한 점에 막걸리를 기분 좋게 드셨더랬다.


김장용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서 그날 버무린 첫 김치를 아빠의 입에 넣으며 맛이 어때요, 묻던 엄마의 다정한 목소리. 나쁘지 않네, 무뚝뚝하게 말하면서 뒤에서는 엄마 김치가 제일 맛있다고 소곤거렸던 아빠. 행복한 추억들.


보쌈이 아니더라도 두부를 사다가 두부김치로 먹어도 아쉽지 않다. 갓 담은 김치에다가 참기름과 깨소금, 설탕을 조금 넣어 버무리고, 김가루 솔솔 뿌린 두부와 함께 먹으면 더욱 호사스러운 맛.




양배추김치가 익으면 아무것도 넣지 않고 폭 끓여낸 시원한 김칫국이 최고다. 콩나물을 넣어 끓여내면 더 시원한 해장국. 좀 푸짐하게 먹고싶다하면 두부와 참치를 넣은 김치찌개, 여기에 통조림햄을 넣으면 부대찌개가 되는 맛의 변화구.


양배추김치가 새콤하다 못해 시큼해지면, 김치부침개를 만든다. 양배추김치는 많이 익더라도 그 아삭한 식감이 유지돼서 좋다. 양배추는 일본음식인 오꼬노미야끼에도 많이 사용되는 식재료라서 김치부침개로 만들어 먹어도 어색함이 없다. 아삭한 양배추김치의 식감은 김치덮밥에서 꼬들꼬들한 매력 발산.


미국 공항 입국심사대, 한국인인 나에게 공항 직원은 김치를 싸오진 않았죠, 묻는다. 인종차별적인 발언인가, 고민하던 순간, 직원은 거리낌 없이 웃는 얼굴로 나는 정말 김치를 좋아해요. 그렇다. 한국인은 김치지. 김치 모르는 외국인 있던가요.


냉장고에 김치가 한 통 담아져 있지 않으면 불안한, 없으면 더 생각나는, 김치 없으면 안 되는, 나는 좀 먹을 줄 아는 한국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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