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 씬스틸러, 바질을 키우는 행복

by 그린숲

바질을 키우게 된 계기, 바질이 나에게 준 행복감을 생각하자면 미안할 정도로 낭만이 없다. 꽃은 피워 뭐하고, 먹을 수 없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먹을 수 있는 식물만 키우자는 실용적 마인드로 시작됐다.


어릴 적부터 이름 모를 난초와 나무, 꽃화분이 가득 채워진 베란다 한 편의 싱그러움을 보며 자라서 일까, 집 안에 초록이 없으면 사람 사는 집 같지가 않다. 우리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도, 주변 텃밭을 가꾸면서 때가 되면 고추와 호박잎을 따다가 그날의 반찬을 해 드시곤 했다.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에도 할머니 손에 한가득 들려있는 맨질맨질하고 싱그러운 고추를 보며, 할머니가 고추를 키우는데 쏟았던 시간과 인내가 존경스러웠다. 할아버지가 저녁식사 즈음, 호박잎을 따다가 할머니 앞에 불쑥 내밀면 할머니는 호박잎 쪄야겠네, 그럼 할아버지는 호탕하게 웃으시며 허허, 좋지.


호박잎이 뭐냐, 소시지만 먹는 나를 보시곤 할머니는 호박잎에 뜨끈한 쌀밥을 올리고, 매콤달콤 간장양념과 함께 자그마하게 쌈을 싸서, 한 개만 먹어 봐, 하신다. 그러면 나는 싫어요, 안 먹어요. 결국엔 억지로 한 입. 어라, 생각보다 맛있잖아? 무슨 자존심인지 두 번 먹지는 않고 호박잎은 참 맛있구나, 했었다.


할머니가 잘 익은 호박을 하나 톡, 따서 온 날에는 할머니, 할머니, 호박부침개 만들어 먹어요! 할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놀라운 칼질 솜씨로 호박을 얇게 채 썰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호박부침개를 부쳐 주셨다. 언제부터 내가 호박부침개를 이렇게 좋아했던 걸까. 할머니가 호박을 따서 부침개를 부쳐준 날 부터겠지.




사회 초년생으로 고달픈 서울살이를 할 적에도 베란다에 딸기를 키우고, 토마토를 키우고, 상추를 키우고, 고추를 키웠더랬다. 식물을 키운다는 것은 의외로 많은 에너지가 소비된다. 하, 아무것도 안하고 침대에 눕고만 싶다, 마음과는 배반되게 몸은 어느새 베란다 텃밭으로 향한다.


서울살이 베란다텃밭.


식물마다 물을 주는 시기도 달라, 주의 깊게 신경을 쓰지 않으면 건조하거나 과습하여 죽고 만다. 고추와 토마토는 때가되면 지지대를 세워줘야 하고, 꽃이 피면 면봉으로 인공수정을 시켜준다. 열매를 맺기 전에 웃거름을 한 번 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딸기가 열리면 과실이 바닥에 닿지 않도록 비닐을 깔아 줘야하고, 고추와 토마토는 열매의 무게 때문에 줄기가 쓰러지지 않도록 지지대에 줄기를 고정시켜 줘야한다. 병충해가 생기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그런 행운은 잘 찾아오지 않는다.


녹록치 않은 사회생활에 고양이 집사생활도 함께 진행 중이라, 보살피고 챙겨야 할 것이 한꺼번에 몰아치는 날에는 몸이 피곤한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감정이 소비되고 만다. 와, 이정도면 취미생활이 아닌 것 같은데, 하면서도 열과 성을 다해 베란다 텃밭을 가꾸었던 이유, 수확의 기쁨이다.


딸기가 무르지 않게 흙과 닿지 않도록 한다.


미국에 와서도 식물을 꼭 키우고야 말겠다는 새싹일꾼의 열정은 잡초처럼 생명력 있게 성장하여 캘리포니아 살적에는 캘리포니아에서 잘 생장하는 식생을 공부하고 워싱턴DC에 와서는 또 이 곳에서 잘 생장하는 식생을 공부한다.


그리하여 창문텃밭을 채울 식물들 중 하나로 선택된 바질, 모종부터 키우면 왠지 ‘내 새끼’가 아닌 것 같은 괜한 고집에 흙을 사다 날라 씨앗부터 시작한다. 흙의 세계도 무궁무진하여 공부할 것이 산더미지만, 그랬다간 제풀에 지칠 것 같아, 가장 널리 쓰이고 무난한 흙을 추천받는다.


바질을 멋들어지게 키워서 바질패스토를 만들어 먹어야지, 봄에 씨앗을 심으면서 벌써 뱃속을 채울 생각을 한다. 심은 지 10일 여 만에 빠끔히 얼굴을 내민 바질 새싹은 생장이 좀 느리다가 본 잎이 나기 시작하자 무럭무럭 자란다.


바질향기가 바람을 타고 들어온다.


새롭게 키워본 식물 중 고수와 로즈마리, 시금치는 시들시들 생장을 멈춰버리거나 죽어버리고, 바질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아 매일매일 초록의 싱그러움을 더한다. 통풍과 햇빛에 신경을 많이 썼다. 바질 잎이 타들어 가지 않도록 너무 더운 날에는 아침저녁으로 볕이 덜한 창문으로 화분을 옮긴다.


바질이 한 뼘 정도 성장하자 짙은 향을 내뿜기 시작한다. 창문으로 흘러들어 오는 바람에 바질의 향이 진하게 묻어 집 안을 향기롭게 채운다. 이게 바질의 향기, 제대로 처음 맡아 보는 냄새에 후각이 즐겁게 반응한다.


바람이 좀 부는 날에는 집안에서 가장 볕이 잘 들고 통풍이 잘되는, 바질 화분이 있는 방 한 가운데 앉아 눈을 감는다. 머리칼 사이사이 바질 향기가 하늘하늘. 흠-후- 깊게 내쉬는 숨에 바질의 향기가 들어왔다, 나갔다가. 하루 종일 시름했던 걱정거리는 싱그러운 바질의 향기와 함께 날숨으로 실려 떠나간다. 미소가 샌다. 아! 바질패스토로 갈아버리기에는 너무 사랑스럽잖아!




선선한 봄바람과 뜨거운 여름 볕을 양분으로 삼아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바질잎을 몇 개 떼어다가 피자에 올려 먹었다. 바질 특유의 향이 피자의 느끼함을 상쾌함으로 중화시킨다. 맛있다, 그냥 먹는 피자보다 맛있다! 그런데 내가 바질을 좋아했던가? 허브 종류인 바질은 그 맛과 향이 매우 짙다. 호불호가 강한 맛. 바질이 들어간 음식을 싫어했을 터인데. 내 바질은 이토록 맛이 있구나.


직접 만든 요리를 뽐내고 싶을 때도 사랑스러운 바질 잎을 올린다. 바질 하나에 요리의 모양새가 섬세해진다. 존재감 확실한 씬스틸러다.


바질이 1M 넘게 자라면서 잎이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지기 시작하자 결단을 내렸다. 잎을 말려 바질차를 마시기로. 어디서 본 것도 누가 말해준 것 아니다. 바닥에 떨어진 바질 잎은 말라가며 색이 바래도, 은은한 향을 품고 있었다. 아직 싱그러운 잎을 따서 말린 뒤 볶아주면, 짙은 향이 남아 있는 바질차가 되지는 않을까.


바질 잎을 모두 따서 수확을 해다가 3주 동안 말려 주었다. 워싱턴 기후가 습하다보니 말리는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잎이 어느 정도 바스락해지면 팬에다가 바질 잎을 바싹 볶아준다. 녹찻잎을 볶는 것과 같은 원리다. 한 번 볶은 뒤, 식혔다가 한 번 더 볶아 준다. 바질이 완전히 식으면 밀봉하여 보관한다.


볶은 바질잎에 뜨거운 물을 부어 차를 우려낸다. 바질 특유의 향에 녹차향과 장미향이 섞인 듯 한 오묘한 향기의 축제. 바질잎을 예쁜 병에 향기와 함께 담아 친구들에게 전했다. 바질 농사를 지어 잎을 따다가 직접 볶아 만든 유기농 바질티야. 으스대며 농사꾼인 척을 하는 내 목소리에도 친구들은 고맙다, 대단하다, 감탄을 해준다.


1년이 지나도 미처 다 우려 마시지 못한 바질잎은 냉동실에 보관했다가 고기를 삶을 때 잡내를 제거할 때 쓴다. 아무렇게나 삶은 보쌈용 돼지고기에 은은한 바질향이 스며들어 있다. 보쌈고기가 이렇게 은은해서 될 일이야?


올 여름에도 우리집 햇볕 제일 잘 드는 창가 자리를 차지한 바질은, 여전히 사랑스럽게, 여전히 향기롭게 커간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