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 맥주의 맛

by 그린숲


물가가 비싼 편인 워싱턴D.C에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대로 맛있는 음식을 내는 베트남 식당 ‘포14’(Pho14)는 단연 콜롬비아하이츠역의 맛집이다. 대로변이 아니라 골목 사이 작은 도로 맞은편에 위치해 있어서 우연찮게 발견했던 첫 날에 비해, 두 번째 찾았을 때는 조금 헤맸다. 물론, 길치 기준이다. 계획도시인 D.C는 길이 구불구불하거나 복잡하지 않다.


밖에서는 식당 내부가 작아 보이지만, 일단 들어가면 생각보다 규모가 꽤 있다. 불을 다 켠 건가, 식당치고는 조명이 어둑어둑하다. 매사 어둡고 음울한 것에 끌리던 20대를 지나, 이제는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에 끌리는 30대를 맞이했다, 내심 만족하고 있던 중 훅- 들어오는 안도감에 난감하다. 오호, 이런 어둑어둑한 분위기라면 쌀국수 세 그릇은 활기차게 먹겠다.


베트남식당답게 역시 쌀국수가 대표메뉴다. 미국 내 베트남 식당에서 쌀국수를 주문하면, 베트남 현지의 맛을 살린 한국에서 먹던 쌀국수 맛과 거의 비슷하다. 미국에서 한국 음식이 그리울 때, 쌀국수가 떠올라 베트남식당을 찾을 정도다.


미국 내 베트남식당의 음식 대부분은 미국에서 파는 요리치고 짠맛이 많이 빠졌다. 쌀국수는 담백하고 깔끔한 육수를 그대로 살렸다. 다른 메뉴들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 스프링롤이라고 불리는 튀김류인 ‘짜조’부터 쌀국수면을 육수에 적셔먹는 ‘분짜’까지, 미국인 입맛이 아닌 현지의 풍미를 최대한 살린 듯한 맛이다. 실제로 베트남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도 여럿 봤다.


중국음식이건 멕시코음식이건 대부분의 외국음식들이 ‘아메리카나이즈’가 되어 있는 미국에서, 베트남음식은 그야말로 특별하다. 담백한 음식에 목마른 여기, 한 사람에게는 사막에서 찾은 오아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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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의 안내에 따라 더 어두운 구석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바로 옆에는 작은 바가 보인다. 바와 가까운 테이블일수록 조명은 점점 어두워진다. 식당 내에 바를 운영하는 독특한 콘셉트다. 한 낮에 바에 앉아 술을 즐기는 사람들과 테이블에서 음식을 즐기는 사람들 사이의 위화감은 없다. D.C의 대부분 식당과 펍은 금요일 밤이면 ‘해피아워’를 운영한다. 이 집도 마찬가지라서, 이런 날이면 평소 잘 주문하지 않았던 작은 사이드메뉴들을 여러 가지 주문해 맥주와 함께 음식들을 즐겨본다.


판매하고 있는 맥주의 종류가 워낙 많아서 맥주 메뉴판을 따로 주는데, 맥주 이름과 알코올 도수, 가격 등 맥주에 대한 정보를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다. 베트남식당이니 베트남 맥주를 마셔볼까, 이름이 얼핏 베트남스러운(?)은 맥주를 주문해 본다.


병과 함께 나온 잔에 가득 따르니 크리미한 거품과 짙은 호박색의 맥주, 맛보지 않아도 합격점이다. 꿀꺽꿀꺽 단숨에 두 세 모금, 부드러운 목넘김이 분명 에일이구나, 평소 에일맥주를 선호하는 취향으로 또 한 번 합격점.


무게감이 있으면서도 부담스럽지 않다. 부드럽게 깔린 단맛과 고소한 맛이 취향을 타기 힘든 맥주라는 예감. 맛이 강하지 않아 요리의 맛을 헤치지도 않는다. 마음에 쏙 들어 버린 맥주, 마트에서 사서 마실 요량으로 이름을 외우기 힘든 맥주를 사진으로 찍어갔다.


이 한눈에 반한 주인공은 바로 잉링(Yuengling)맥주.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맥주 양조장에서 생산되고 있는 라거 맥주다. 베트남맥주도 아니었고, 에일맥주도 아니었다. 에일맥주 코너를 아무리 둘러봐도 찾아 볼 수 없었던 이유다.


독일인 이민자 데이빗 잉링(David Yuengling)은 1829년 펜실베이니아 주 포츠빌에 양조장을 설립하고, 독일의 양조 기술로 잉링 라거 맥주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가격은 매우 저렴한 편이고, 알코올 도수는 4.4% 정도다. 보스턴 라거 컴퍼니(Boston Lager Company)에 인수되어 현재는 미국에서 가장 큰 맥주회사 중 하나로 꼽힌다.


맛으로 보나, 색으로 보나 분명 에일맥주라고 확신했지만, 알고 마시니 또 라거의 기분 좋은 청량감이 느껴진다. 라거맥주임에도 호박색의 기품과 쌉싸래한 맛은 경험할수록 매력적이다. 라거와 에일을 두고 결정을 해야 할 때, 제대로 반전 매력을 뽐낼 맥주다.


포14 맞은편에 있는 또 하나의 베트남 식당은 생긴 지 얼마 안됐다. ‘베트남 맛집’ 앞에 패기 있게 자리 잡은 이 베트남식당은 새로운 식당임에도 여기가 원조라오, 포스를 풍기고 있다. 꾸밈없는 외관에 더 꾸밈없는 내부 모습에 순간적으로, 혹시 오늘은 실패인가, 의심을 품게 만들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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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적인 분위기로 늘 북적이는 포14와는 달리, 이 집은 그렇지 않다. 그렇지만 유독 동양인이 많이 보이는데, 알고 먹는 사람들이 인정하는 맛집이라는 분위기다. 사장님도 베트남 사람이다. 이 집이 문을 연지 얼마 안됐을 당시, 제대로 된 짜조를 처음 맛봤을 때는, 탄성을 내지르며 들썩들썩 춤을 추면서 먹었다. 속이 꽉 찬 짜조는 김이 모락모락, 욕심껏 한입에 베어 물었다가 입천장을 홀라당 데었다. 바삭하게 튀겨진 라이스페이퍼 속에 촉촉한 고기 육즙과 채소의 어우러짐. 더 이상 스프링롤이라고 부를 수 없다. 이것은 짜조다! 달콤짭조름 감칠맛 제대로 뽑아낸 육수에 얇은 쌀국수를 푹, 적셔먹는 분짜는 또 어쩌랴.


이 집은 술을 판매 안하는 대신, 베트남식 커피를 팔고 있다. 베트남커피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소문만 무성했던 커피를 설레는 마음으로 주문을 해본다. 커피를 내리는 방식도 특이하다. 원두가루에 그대로 뜨거운 물을 붓고 연유가 담긴 컵으로 커피를 내린다. 커피를 다 내린 뒤에는 연유와 커피를 잘 섞어준 다음, 따로 준비된 얼음 잔에 부어 아이스커피로 즐긴다. 연유가 들어가서 너무 달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한국의 믹스커피와 원두커피의 중간 정도의 맛으로, 믹스커피보다 달지 않다. 베트남 믹스커피를 팔던 식당도 있었는데, 직접 내린 베트남커피만 못하더라도 익숙한 맛에 흡족하게 마셨다.


익숙한 맛이 그립다.

한국 음식이 생각난다.

가볍게 맥주 한 잔 할까.

달달한 커피 한 잔?


오늘도 실패 없는 미국맛집, 베트남식당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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