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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지 Sep 09. 2021

[양귀자 특집] :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소덕소덕 : 소심한 덕후들의 소소한 덕질 라이프 3화

팟캐스트 3화는 여기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여전히 파격적인 강민주의 순례의 길

처음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을 읽었을 때, 주된 설정과 이야기를 읽어가며 느꼈던 건 바로 '왜 이런 소재일까'라는 거였습니다. 20대 여성이 왜 하필이면 유명 남배우를 납치해야만 했을까-하는 게 의문으로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통쾌하기보다는 무언가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했고, 파격적으로 느껴지는 소재에 압도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1992년도에 발간된 책으로, 30년 전에 발간된 꽤 오래된 책입니다. 찾아보니 94년도에 개봉된 책을 원작으로 한, 최진실 배우님의 동명 영화도 있더군요. 저는 사실 이 책이 최근에 나온 최신작인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고 나서도, 요즘 젠더문제에 대해 영향을 받고 쓰인 책이라고만 생각하게 됐었죠. 이는 그만큼 여전히 파격적으로 느껴지는 설정과 스토리를 가지고 있어서가 아닐까요? 이 책에는 기존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남배우를 납치한 20대의 여성, 강민주라는 경험한 적이 없는 캐릭터가 등장해서 이야기를 이끌어 갑니다.

이야기는 가정폭력과 관련한 상담소에서 봉사하는 강민주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그는 대학원에 재학하며 연구 명목으로 시작한 상담소 일을 통해 여러 여성들의 이야기를 수집하며, 자신의 계획을 세워갑니다. 그리고 상담소의 소장과 기존 여류명사들을 경멸하며 "그녀들은 모두 직무유기를 범하고 있다. 이 땅의 여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중요한 일 한 가지를 무시하고 있다."라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그녀들이 하지 않는 그 일을 하기 위한 계획을 조금씩 실행해가죠.

그 일은 결국 유명 남배우인 백승하를 납치하는 일로 드러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명 남배우를 납치해서 감금하기까지의 강민주의 계획은 충동과는 거리가 먼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계획이 필연적인 것이라 여기며 계산적으로, 철저하게 계획을 쌓아갑니다.

나는 순례를 시작한다. 이유는 하나뿐. 길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내가 지나간 가시덤불들, 그것을 사람들은 훗날 '길'이라 부를 것이다. 나는 가시에 찔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나는 결코 어리석은 순례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 강민주의 노트에서

강민주에게 납치된 백승하는 부드러움의 대명사로 유명한 배우였습니다. 그의 부드러움은 많은 사람들에게 선망을 받았고, 특히 여성들에게 환상을 가지게 만드는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강민주는 백승하를 택했고, 그의 부드러움이 여성들에게 해악을 끼친다고 확신했습니다. "나는 여자들이 그렇게나 많이 남자들에게 당했으면서도 여전히 남자에게 환상을 품는 것에 정말이지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내가 선택한 이 운명 말고, 다른 운명의 남자가 어딘가 꼭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여자들의 우매함은 정말 질색이다."라고 말하며, 그렇게 여성들을 우매하게 하는 환상을 제공하는 그 백승하를 본보기로 납치를 하기로 결정한 것이죠. 그리고 그의 환상의 너울을 벗겨내 여성들에게 알려줄 것이라 결심합니다.

"당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여자들로 하여금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들었어요. 여자들은 당신을 통해 환상을 보게 되고, 현실을 극복할 힘을 잃게 되지요. 그게 당신 죄입니다."

이것이 주된 이 책의 내용이며, 강민주가 백승하를 납치하고 감금하게 되는 주된 배경입니다. 이것이 파격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지금도 어색한 남배우가 20대 여성에게 납치된다는 설정 때문입니다. (물론 납치는 다른 남성이 시행했지만요.) 보통 범죄의 대상이 되는 것이 여성이며, 그간 일어났던 실제 연예인들의 납치 사건도 대부분 여성에게 한정적으로 일어났던 것을 감안했을 때에 이는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이것이 과감히 반전됩니다. 그리고 그 목적 또한 다른 것이 아닌 여성의 계몽을 위한 것임을 주장합니다. 이를 강민주는 스스로 '순례'라고 표현하기까지하며 그 행위에 담긴 메세지를 전하고자 하죠. 그리고 그 대상으로 여성들에게 환상을 심어주는 소위 말해 '유니콘'과 같은 대상을 선택했다는 점에서도 개인적인 복수나 욕망이 아닌, 보다 다른 결의 이야기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도, 더더욱 흔치 않은 파격적인 이야기라 여겨진 것이 아닐까요?


모든 여성이 꿈꾸는 '강함'의 이미지

저는 이 소설을 이끌어 가는 큰 기둥인 강민주가 가장 이상적이며 가장 비현실적인 인물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마치 히어로 영화에 나오는 초능력을 가진 영웅을 보는 느낌이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죠. 지적이며, 이성적이고, 강하며, 결단력이 있고, 영웅적이기까지 한 이 인물은 '이런 사람은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 비현실적인 강함의 이미지를 담은 강민주라는 캐릭터에서 모든 여성들의 원, 모든 여성들이 꿈꾸는 강함, 그것의 총체의 이미지를 담아낸 것이 아닐까 하는 것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억압받고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그 여성들이 꿈꾸는 이상향과 같은 존재가 바로 강민주라는 캐릭터에서 집약되어 드러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죠. 경제적으로도 독립되어 자유롭고,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며, 그 판단에 근거해 대담하게 여성의 해방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모습에서 일종에 위안과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다는 거죠. (저도 그랬고요.)

책 이후에 등장하는 작가의 말에서도 그 의도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강민주가 등장했다. 낮은 포복을 혐오하고 높이 기립해서 사는 여자. 물살을 거스르며 하류에서 강의 상류로 나아가는 여자. 그런 주인공이 필요했다. 현실에는 없지만, 소설에서는, 소설이므로, 강민주 정도는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런 강민주의 행동의 이유는 여성들이 가지는 어떠한 '원'과 맞닿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만약 강민주가 여성을 위한 소설에서 허용된 영웅적인 캐릭터라면 말이죠. 그렇기에 비현실적인 캐릭터인 강민주는 우리의 원을 보여주는 다른 모습의 우리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부분 인데요...) 그리고 그런 강함의 집약체인 강민주 캐릭터가 나중엔 어떻게 변화되는지, 어떻게 백승하의 부드러움에 동화되어 강함을 잃게 되고 흔들리게 되는지를 보게 되면, 그것이 다른 어떤 이야기보다 괴롭게 느껴지게 됩니다. 적어도 저는 그랬습니다. 세일러문에서 나온 짤방 중에 이런 말이 있죠. "사랑 따위에 정신이 팔려 남자따위에 기대니까 여자는 약해진다."



강민주가 백승하를 사랑해서 그런 것인지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만, 어쨌든 제겐 그렇게나 강했던 강민주 캐릭터가 이토록 허무하게 사라지게 되었다는 게 다른 어떤 것보다 충격적이었습니다. 이건 마치 감정에 휘둘려 우리 자신의 강함과 다채로운 꿈을 잃어버리게 되는 흔한 여성들의 이야기 같았거든요.


저자의 의도, 그리고 강민주

그렇다면 저자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저자는 강민주라는 캐릭터를 통해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었을까요? 저는 저자가 이 글을 쓰게된 처음 시작점의 이야기를 저자의 글을 통해 또한 엿볼 수 있었습니다.

글을 쓰며 살다 보면 자신의 한 맺힌 삶의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사람을 가끔 만난다. 자신의 기막힌 인생 유전을 쓰기로 하면 소설책 열 권으로도 모자란다는, 보편적인 이 관용구를 들고 나를 찾는 사람의 대부분은 여성이다. 또한 열 권 분량의 절망도 모자라도록 그녀들의 삶을 아슬아슬한 벼랑으로 모는 장본인들은 한결같이 남성이다.

저는 저자가 하고자 한 이야기의 내용이, 어느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님을 이를 통해 깨닫게 됐습니다. 저는 그렇게 수많은 여성들의 이야기들과 만났던 양귀자 선생님의 경험이 작중에선 상담소에서 여러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었던 강민주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결국 강민주의 백승하 납치와 감금 이야기를 창조해내 어떤 메세지를 전하고 있는 거죠. 마치 강민주가 여성들에게 메세지를 전하기 위해 백승하를 납치하기로 결심했던 것처럼요.

이 소설의 제목은 뽈 엘뤼아르의 시 <커브>의 전문에서 따온 제목이라고 합니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 지속되는 삶의 궤도 위에서 온 힘을 다해 커브를 도는 일은 누구에게나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소설이 커브를 결심한 모든 이에게, 잠시라도 힘이 되었길 바란다.

지금까지도 반복되는, 여전히 파격적인 그 이야기가 울림이 되는 현실에서 이 소설이 주는 의미는 우리에게 반복되는 삶에 파격적인 '커브'를 위한 동력이 될지도 모릅니다. 강민주는 백승하를 납치하고 감금한 일의 결과로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저 자신의 행동을 통해 하나의 시작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하죠.

나는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하나의 시작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시작했다. 그러므로 나는 이미 반을 이루었다. 
- 강민주의 노트에서


모든 억압과 차별에 대한 이야기

저자는 저자의 말을 통해 이 이야기가 여성문제의 관점에서만 읽히지 않았으면 한다고 밝혔습니다. 저는 지속되고 반복되는 삶의 모습 속에서 '커브'를 결심한 모든 이들에게 힘이 되길 바란다는 저자의 말을 통해 그 마음이 조금은 공감이 됐습니다.

단순히 여성문제 뿐만 아니라 다양한 억압된 이들, 자신만의 상처가 있는 이들, 그리고 조화를 모색하는 이들 모두에게 울림이 되는 이야기일 수 있다는 점에서 동의합니다. 이 소설이 강민주라는 캐릭터를 통해 세상에 던졌던 메세지는 당연하게 반복되고 자행되는 폭력에 반대하며 세상의 당연한 폭력에 커브를 돌릴 수 있도록 함께 목소리를 내고자 할 때에 함께 연대할 힘을 주는 이야기라 생각합니다.

강민주의 행동은 개인적인 복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책의 일부 내용에서 강민주의 아버지와 관련된 불우한 시절에 관한 이야기가 있지만, 그는 극히 일부입니다. 더하여 강민주가 그 과거로 인해 상처받았거나 그것이 어떠한 복수의 계기가 된 것으로도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 사건은 강민주가 여타 다른 인물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더 드러냈을 뿐이죠.

그런 의미에서 강민주의 행동은 연대를 위한 마중물이었습니다. 이는 다른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도 어떠한 '커브'가 필요한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개인적인 불행에만 시선을 가두어 그 문제만을 해결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적인 변화를 꾀하기 위해 좀더 큰 영역에서의 변화를 위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저는 제 자신이 세상의 당연한 억압과 폭력에 질문하며 이 세상에 커브를 가하는 또 한 명의 다른 강민주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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