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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포쟁이 뚱냥조커 Sep 05. 2019

인문학 두쪽읽기 니체43-신암행어사 리뷰9 춤과 힘

깨어난 뒤 춤추며 날아다닐 듯 가벼워진 문수


 

춤에 부친 또다른 노래 372p


1.

“오, 생명이여, 나 최근에 너의 눈을 들여다본 일이 있다. 나 너의 밤의 눈동자 속에 황금이 있어 반짝이는 것을 보았지. 나의 심장은 이 희열에 고동을 멈추었고.

나 밤의 수면 위에 황금빛 거룻배 한 척이 반짝이는 것을, 가라앉는 듯, 물에 잠기는 듯하다가는 다시 올라와 아는 체하는, 그렇게 오르락 내리락하는 황금빛 거룻배 한 척을 보았던 것이다!

너는 춤을 추지 못해 안달을 하고 있는 나의 발에 눈길을 주었지. 웃는 듯한, 의향을 떠보려는 듯하면서도 마음을 녹여주는, 오르락내리락하는 눈길을.

너는 작은 손으로 캐스터네츠를 고작 두 차례 쳤을 뿐이다. 그런데도 나의 발은 벌써 춤을 추고 싶은 안달에서 오르락 내리락 널뛰듯 했지.

나의 발꿈치는 일어서고, 나의 발가락들은 네 의중을 헤아리기 위해 귀를 기울였지. 춤추는 자는 귀를 발가락에 달고 있는 법이니!

나 서둘러 네가 있는 곳을 향해 돌진했지. 그러자 너는 나의 돌진을 피해 달아났고, 달아나면서 휘날리는 너의 머리카락이 혀를 놀리듯 나를 향해 낼름거렸지!

나는 그만 너와 너의 날름거리는 뱀들을 피하여 도망치고 말았지. 그러자 너는 몸을 반쯤 돌린 채, 열망에 찬 눈을 하고 서 있었고.

구불구불한 눈길로 너 내게 구불구불한 길을 가르치고 있구나. 구불구불한 길을 가면서 나의 발은 계략을 배우고 있고!

네가 가까이 있으면 나 네가 두렵고 멀리 있으면 너를 사랑하게 된다. 네가 달아나기라도 하면 나의 마음은 네게 끌리고, 네가 나를 찾기라도 하면 나 꼼짝을 할 수가 없다. 나 괴롭다. 그러나 너를 위해 내 어떤 괴로움을 마다했던가!

네가 쌀쌀맞게 굴면 마음에 붙이 붙고, 네가 미워하면 유혹을 받고, 네가 달아나면 묶여버리고 네가 비웃으면 감동을 한다.

위대한, 묶고 있는 자, 휘감고 있는 자, 유혹하고 있는 자, 탐색하고 있는 자, 찾아내고 마는 자, 너, 여인이여, 그 누가 너를 미워하지 않으랴! 너, 순진무구하며 참을성 없는, 바람처럼 날렵한데다 티없는 어린아이의 눈을 한 죄 많은 여인이여, 그 누가 너를 사랑하지 않으랴!

너, 전형적인 자, 장난꾸러기여, 지금 나를 어디로 끌고 가는 것이지? 다시 내게서 달아나는구나, 너 귀여운 말괄량이, 은혜를 모르는 자여!

나 춤을 추며 너를 뒤쫓고 있으며, 희미한 발자국이라도 남아 있으면 뒤쫓는다. 어디 있는가? 내게 손을 달라! 아니면 손가락 하나만이라도!

여기에는 곳곳에 동굴이 있고 숲이 있다. 우리는 길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니 게 섰거라! 잠자코 서 있거라! 부엉이와 박쥐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나는 것을 보지 못하는가?

너, 부엉이여! 너, 박쥐여! 나를 놀릴 셈이냐? 예가 어디지? 저렇듯 울부짖고 악쓰는 것을 너 개들에게 배웠구나.

너 작고 하얀 이를 드러내가며 귀엽게 나를 위협하고 있고, 너의 악의에 찬 눈초리는 고수머리 사이로 나를 찔러대고 있구나!

이것이야말로 마구 추어대는 춤이다. 나는 사냥꾼이다. 너 나의 개가 되려는가, 아니며 영양이 되려는가?

지금은 내 곁에 있구나! 서둘러라, 너 심술궂은 도약자여! 자 위로! 그리고 저쪽으로! 슬프다! 나 자신은 도약하려다 쓰러지고 말았으니!

오, 너 방자한 자여, 쓰러져 자비를 구하고 있는 나를 보라! 나 너와 함께 보다 사랑스러운 오솔길을 걷고 싶거늘!

한적하고 다채로운 덤불을 가로질러 나 있는 사랑의 오솔길을! 아니면 저기 호숫가를 따라서 마침 거기 황금빛 물고기들이 헤엄치며 춤추고 있으니!

지쳐 있는가? 저 너머에 양 떼가 있고 저녁놀이 불타오르고 있다. 양치기의 피리 소리를 들으면서 잠에 드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닌가?

그토록 지쳐 있는가? 나 그리고 너를 업고 가겠다. 팔을 늘어뜨리기만 하면 된다! 목이 마르다면 마실 것을 줄 수도 있으련만, 너의 입은 그것을 마시려 하지 않을 것이다!

오, 빌어먹을, 날쌔고 날렵한 뱀이여, 그리고 미끌미끌한 마녀여! 어디로 가버렸느냐? 내 얼굴에 두 개의 자국과 붉은 얼룩을 남겨두고!

내게, 허구한 날 양처럼 온순한 양치기로 있는 일에 나 진정 지쳤다! 너, 마녀여, 지금까지 내가 네게 노래를 불러주었으니, 이제는 네가 나를 향해 부르짖어야 할 것이다!

내 채찍 소리에 맞춰 너는 춤을 추며 부르짖어야 할 것이다! 나 채찍을 잊은 것은 아니지? 천만에!“

 

2.

그러자 생명은 이렇게 대꾸했다. 그 아리따운 두 귀를 막고서.

 

“오, 차라투스트라여! 제발 그처럼 무섭게 채찍을 휘두르지 말라! 알고 있을 텐데. 소란이 생각들을 죽인다는 것을, 그토록 정겨운 생각들이 내게 떠오르고 있어 하는 말이다.

우리 두 사람은 실로 선한 일도 악한 일도 하지 않는 자들이다. 우리 선과 악의 저편에서 우리가 머물 섬과 푸른 초원을 찾아내었지. 우리 단둘이서! 그러니 우리는 서로 화목해야 한다!

우리가 서로를 마음속 깊이 사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음속 깊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서 반드시 서로 언짢아해야 하는가?

내가 네게 호의를 갖고 있다는 것, 때때로 너무나도 큰 호의를 갖고 있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다. 이유는, 내가 너의 지혜를 질투한다는 데 있다. 아, 제정신이 아닌, 늙고 멍청한 여인, 지혜여!

언젠가 너의 지혜가 네게서 떠나버린다면, 아! 그렇게 되면 나의 사랑 또한 서둘러 네게서 떠나버리리라.“

...










/









중력의 령과 사투를 벌이고서 죽음의 한계에 이르러 또 자기안의 심연에 있는 연민의 정이라는 자신의 한계를 영원회귀라는 철학적 위안을 통해 극복해낸 차라투스트라.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이 영원의 시간속에서 계속 같은 세계가 반복될 것이지만 그래도 니체는 이 운명을 사랑하면서 자기자신을 극복할 것이며 그렇기에 위버멘쉬가 되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위버멘쉬, 운명애, 영원회귀라는 이 니체의 주요 세가지 개념에 이어 이번 글 춤에 부친 또다른 노래에서 니체는 힘에의 의지 개념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듯 하다. 다른 저서에서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이렇게나 강조한 바 있다.


"나는 힘에의 의지다. 그 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너희들 또한 힘에의 의지다. 그 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죽을듯한 고난에서 벗어난 뒤 환히 웃으며 춤추고 노래하는 차라투스트라는 그야말로 이런 힘에의 의지를 대지를 딛고 구현하는 존재다. 모든 생명은 힘을 추구하고 힘을 얻으면 더 강한 힘을 원한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고 그리고 생명의 본능이라고 니체는 파악했던 것이 아닐까. 물론 누누히 말해왔지만 이 힘은 단순히 남을 지배하고 억압하고 독점하려는, 권력의지와는 다르다.


 분명히 힘에의 의지에는 다른 존재보다 더 힘찬, 더 우월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일종의 투쟁심, 승부욕적인 면모가 있지만 이는 다른 존재를 억누르고 죽여서 승리의 과실을 독차지하고자하는 그런 마음과는 다르다. 오히려 그런 정신은 니체가 1부에서 즉시 자기 신체를 떠나라고 신랄하게 비판한 신체를 경멸하고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에 가까울 것이다. 이는 축구같은 스포츠에 비유하면 명확해진다.


축구엔 분명 상대팀 선수와 공중볼 헤딩 자리싸움이나 스루패스 볼 경합같은 투쟁적 요소가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선수와의 몸싸움이 주가 되어버리면 카드만 받고 정작 중요한 골과는 멀어진다. 심지어 레드카드 퇴장을 받으면 당연히 승부는 더욱 불리해지고 퇴장을 다섯명이 받으면 아에 몰수패를 당해버린다. 이렇게 상대 선수를 방해하고 압박하는 것을 넘어 결국 자기 자신의 드리블 기술 패스능력 골 골정력 등을 향상시키지 않으면 절대로 승리할 수 없는 스포츠가 축구 아니겠는가. 그래서 아무리 잘하는 선수여도 결국 수비수보다 공격수가 더 높이 평가받을 수밖에 없기도 하다.


 니체가 한때 자신의 철학적 벗이자 스승이라고 생각했던 17세기 네덜란드의 유대인 철학자 스피노자도 이런 힘에의 의지와 비슷한 개념을 말한 바 있다. 라틴어로 conatus코나투스, 스피노자가 에티카3부에서 철학적 정의를 번역한 뜻으로는 '자기 자신을 보존하려는 노력과 경향' 이야말로 생명체의, 모든 존재의 본성이고. 물론 니체는 스피노자와는 달리 여러 힘들간의 투쟁을 강조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생명이 자기 자신을 가장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분명 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하는 공동체주의적 윤리관의 서양 정치철학의 전통과는 분명한 구분점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또 다른 글에서 천천히 이야기할 날이 오리라. 머지않아.



지난 글에서 마침내 아지태의 흉계를 눈치채고 만다라케의 환각, 긴 꿈에서 깨어난 문수는 바로 이런 니체스러운 힘에의 의지가 넘쳐난다. 만다라케 침을 맞기 이전엔 전투의 상처만으로도 이미 죽음의 경각 직전까지 갔지만, 꿈 속에서도 아지태를 한방먹인 문수는 이젠 쥬신을 망하게 하고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죄책감에서 회복했다. 암행어사가 된 초심을 되찾은 문수는 정신이 회복되자 신체도 이제 호흡도 제대로 못하는 저주에서 풀려나서 마치 일선에서 원술과 함께 칼을 잡던 대장군 시절처럼 가볍고도 날렵해진다. 이렇게 춤출듯 가벼워진 신체로 문수가 첫번째로 한 일은...



바로 전날에 죽기 직전처럼 발작을 일으키던 환자라고는 믿을 수 없는 날렵한 근육질의 대장군 몸으로 되돌아온 문수. 그가 스스로의 몸 상태를 확인하고 곧바로 제일 먼저 한 일은 악마의 저주로 인해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던, 마패 다음으로 중요한 소지품이던 호흡보조용 파이프를 바로 내던져버리는 일이었다. 어떤 이는 댓글로 이 파이프는 계월향의 유품이기도 한데 문수가 아에 버리는 것은 스토리에 좀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고 지적하기도 한다.


허나 그림을 자세히 보면 문수는 파이프을 그냥 맨땅이나 바다에 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화려한 문양의 도자기 속으로 던져둔다. 마치 능숙한 농구선수가 골대를 보지 않고도 가볍게 슛을 넣는 것처럼. 문수는 분명 저주로 인한 호흡곤란이 지긋지긋했을 테지만 그래도 계월향과의 인연을 상기했기에 저 파이프를 버린 것이 아니라 도자기 안에 보관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전에 아지태가 쥬신 왕궁을 하루만에 날려버린 당시,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이는 아지태의 능력에 유일하게 문수만이 아지태의 힘이 통하지 않고 오히려 반격을 날렸던 것은 문수가 계월향의 희생으로 새크로피아의 저주이자 기적을 이어받은 덕분이라고 아지태를 비롯하여 모두가 그리 생각했었다.


그래서 이제 저주가 사라진 거라면 이제 문수도 다른 사람들처럼 아지태의 한 한마디 눈빛 한번에 죽는 거 아니냐고 모두들 우려를 표하자, 문수는 그따위 기적 같은거 없어도 자신은 아지태 따위에게 절대 지지 않는다고 호언장담한다. 이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심지어 아지태도 깨어난 문수 앞에 나타나 그 자신감의 원천이 대체 뭐냐고 묻는다... 혹시 꿈 속에서 계월향이 해준 말이 하나의 힌트였을까? 문수의 힘에의 의지는 실로 상상하지 못할 만큼 깊은 뿌리를 갖고 있는 게 아닐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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