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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포쟁이 뚱냥조커 Sep 03. 2019

인문학 두쪽읽기 니체42-신암행어사 리뷰8 문수의 부활

영원회귀 속에서 건강을 회복하고 깨어난 문수

건강을 되찾고 있는 자 2



2.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차라투스트라는 돌연 시체처럼 그 자리에 쓰러져 시체라도 되듯 오랫동안 꼼짝하지 않았다. 다시 정신이 들기는 했지만, 그는 얼굴은 창백했고, 몸은 떨고 있었으며 그렇게 누워 오랫동안 먹고 마시려 하지를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그는 이레를 보냈다. 그 동안 독수리가 먹을 거리를 구하기 위해 날아간 일이 있기는 했지만, 그의 짐승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독수리는 자신이 물어온 것과 낚아채온 것을 차라투스트라의 잠자리 위에 놓았다. 이렇게 하여 차라투스트라는 노란 딸기와 빨간 딸기, 포도송이, 장미사과, 향기로운 푸성귀와 솔방울 사이에 누워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발 밑에는 독수리가 목동에게서 힘겹게 빼앗은 어린 양 두 마리가 사지를 뻗고 있었다.

이레가 지나서 차라투스트라는 마침내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장미사과를 손에 들고 향기를 맡아보았다. 향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자 그의 짐승들은 그에게 말을 건넬 때가 왔다고 믿게 되었다.

 

짐승들이 말했다. “오, 차라투스트라여, 그대는 지난 이레 동안 녹초가 되어 눈을 감고 누워 있었지. 이제 자리를 털고 다시 일어나지 않으시겠는가?

동굴 밖으로 나가보시라. 세계가 화원이라도 되는 양 차리고 그대를 기다리고 있으니. 바람은 그대에게 달려오려는 짙은 향기를 가지고 희롱하고 있고. 시냇물 또한 모두 그대를 뒤쫓아 달리고 싶어들 하니.

그대가 홀로 있던 지난 이레 동안 만물이 그대를 동경했지. 동굴 밖으로 나가보시라! 만물이 의사가 되어 그대를 치유하고자 하니!

어떤 새로운, 시큼한 맛에 묵직한 깨달음이 그대를 찾아오기라도 한 것인가? 마치 발효하여 시큼한 반죽처럼 그대는 그렇게 누워 있었고, 그대의 영혼은 몸을 솟구쳐 모든 가장자리로부터 부풀어올랐으니.“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오, 나의 짐승들이여, 계속 지껄여 나로 하여금 듣도록 하라. 너희가 지껄여대면 나는 생기가 돈다. 지껄여대는 소리가 있는 곳, 그곳에서 이 세계는 내게 화원과도 같다.

말이란 것이 있고 소리란 것이 있으니 얼마나 기분 좋은가. 말과 소리야말로 영원히 헤어진 자들 사이에 걸쳐 있는 무지개이자 가상의 교량이 아닌가?

저마다의 영혼에게는 저마다의 세계가 속해 있다. 저마다의 영혼에게 다른 영혼들은 일종의 배후 세계다.

더없이 비슷한 것 사이에서 가상은 가장 멋지게 거짓말을 한다. 더없이 좁은 틈새가 다리 놓기에 더없이 어렵기 때문이다.

나로 말한다면, 어찌 내게 나의 밖이라는 것이 있으리오? 밖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온갖 소리를 듣는 동안은 이 사실을 잊고 만다. 우리가 잊는다는 것,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사물들로부터 기운을 얻기 위해 사람들이 그 사물들에 이름을 붙여주고 소리를 부여하지 않았는가? 말을 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익살이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모든 사물을 넘어 춤을 추게 되니.

온갖 이야기와 소리의 온갖 속임수는 얼마나 듣기에 좋은가! 소리와 더불어 우리의 사랑이 형형색색의 무지개 위에서 춤을 추게 되니 말이다.“

이에 짐승들이 말했다. “오, 차라투스트라여, 우리처럼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만물이 제 스스로 춤을 추지. 다가와 손을 내밀고는 웃고 달아나지. 그러고는 다시 돌아오지.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바퀴는 영원히 돌고 돈다. 모든 것은 죽고, 모든 것은 다시 소생한다. 존재의 해(年)는 영원히 흐른다.

모든 것은 꺽이고, 모든 것은 다시 이어진다. 똑같은 존재의 집이 영원히 지어진다. 모든 것은 헤어지고, 모든 것은 다시 만나 인사를 나눈다. 존재의 바퀴는 영원히 자신에게 신실하다.

매순간 존재는 시작된다. 모든 여기를 중심으로 저기라는 공이 굴러간다. 중심은 어디에나 있다. 영원이라는 오솔길을 굽어 있다.“

“오, 무뢰한 어릿광대들이여, 오르골들이여!”차라투스트라는 대답하고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이레 동안에 이루어져야 했던 것들인데 어찌도 그리 잘들 아는가.

어떻게 저 괴물이 내 목구멍으로 기어 들어와 나를 질식시켰는지를! 하지만 나 그 괴물의 대가리를 물어뜯어 뱉어버렸지.

그런데 너희는, 너희는 벌써 그 일을 리라에 맞춰 부를 노래로 만들었는가? 나 아직도 물어뜯어 뱉은 그 일로 인해 지치고, 나 자신을 구제하는 일로 병들어 여기 누워있거늘

이 모든 것을 그저 보고만 있었는가? 오, 나의 짐승들이여, 잔인하기는 너희도 마찬가지인가? 사람들이 그리하듯 너희 또한 나의 크나큰 고통을 그저 구경만 하려 했다는 말인가? 사람 이상의 잔인한 짐승은 없거늘.

사람은 이제까지 비극과 투우, 그리고 십자가형을 보면서 지상에서 맛볼 수 있는 최상의 희열을 느껴왔다. 그가 지옥을 지어냈을 때, 보라, 저들에게는 그것이 지상천국이었으니.

위대한 사람이 비명이라도 지르면 왜소한 사람은 서둘러 달려온다. 그러고는 욕정으로 인해 혀를 입 밖으로 늘어뜨린다. 그런 것을 두고 왜소한 사람은 그 자신의 ‘연민의 정’이라고 부른다.

왜소한 사람, 누구보다도 시인이 얼마나 열심히 혀를 놀려 생을 헐뜯고 있는가! 귀를 기울이되 저 온갖 헐뜯음 속에 들어 있는 즐거움만은 흘려듣지 말라!

생을 탄핵하는 그같은 자들, 생은 눈 깜박할 사이에 그같은 자들을 제압하고 만다. 저 뻔뻔한 여인은 말한다. ‘나를 사랑한다고? 조금만 더 기다려라. 아직은 너를 위해 시간을 낼 수가 없으니.’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더없이 잔인한 짐승이다. 그러니, 스스로를 ‘죄인’,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는 자, 그리고 ’속죄자‘로 부르고 있는 모두가 내뱉는 이같은 헐뜯음과 탄핵 속에 깃들어 있는 관능적 쾌락은 흘려듣지 말라!

그렇다면 나 자신은, 나 이런 말을 함으로써 사람을 탄핵하는 자가 되려고 하는 것일까? 아, 나의 짐승들이여, 지금까지 내가 배워온 단 하나, 그것은 사람에게는 최선의 것을 위해 최악의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더없이 악하다는 것도 하나같이 사람에게는 최선의 힘이 되며, 최고의 창조자에게는 더없이 단단한 돌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한층 선해져야 하며 한층 악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악하다는 것을 나 알고 있지만, 이 고통의 십자가에 내가 묶여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오히려 그 누구도 일찍이 질러보지 못한 소리로 외쳤다.

‘아, 사람에게 있어서 최악이란 것이 이처럼 보잘것없다니! 아, 사람에게 있어서 최선이란 것이 이처럼 보잘것없다니!’

사람에 대한 크나큰 싫증, 그것이 나의 목을 조여왔으며 내 목구멍으로 기어 들어왔다. 거기에다 예언자가 예언했던 것, ‘모든 것은 같다. 아무 소용 없다. 앎은 목을 주른다’는 말이

긴 황혼이, 지쳐 죽을 지경에 이른, 죽음에 취해 있는 슬픔이 내 앞에서 발을 절룩거리더니, 하품을 하며 말했다.

‘네가 피곤해하고 있는 사람, 저 왜소한 사람은 영원히 돌아오게 되어있다.’나의 슬픔은 이렇듯 하품을 해가며 발을 질질 끌며 갔다. 그러고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대지는 동굴로 변하고 그 심장부는 푹 가라앉고 말았다. 모든 생명체는 사람 곰팡이가 되고 뼈가 되었으며 썩어빠진 과거가 되어버렸다.

나의 한숨은 모든 사람 무덤 위에 자리하고 앉아 자리를 뜰 줄 몰랐다. 나의 한숨과 의구심은 밤낮으로 두꺼비처럼 울어대고, 목이 멘 채 물어뜯어가며 탄식을 했고.

‘아, 사람이 영원히 돌아오도록 되어 있다니! 저 왜소한 사람이 영원히 돌아오도록 되어 있다니!’

언젠가 나 더없이 위대하다는 사람과 더없이 왜소한 사람이 맨몸으로 있는 것을 본 일이 있다. 너무나 닮아 있었다. 더없이 위대하다는 자조차도 아직은 너무나 인간적이었던 것이다!

더없이 위대하다는 자가 그토록 왜소하다니! 이것이 사람에 대한 나의 싫증이었다! 그리고 더없이 왜소한 자들 또한 영원히 되돌아온다니! 이것이 모든 현존재에 대한 나의 싫증이었다!

아, 메스껍다! 메스껍다! 메스껍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고 한숨을 쉬더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이 앓고 있는 병 생각이 났던 것이다. 그러자 그의 짐승들이 나서서 더 이상 말을 하지 말도록 막았다.

짐승들은 대꾸했다. “그대, 건강을 되찾고 있는 자여, 더 이상 말하지 말라! 그 대신에 밖으로, 세계가 화원이라도 되는 양 차리고 그대를 기다리는 저 밖으로 나가시라.

저 밖으로, 장미와 꿀벌 그리고 비둘기 떼가 노니는 곳으로! 누구보다도 노래하는 새들에게 가라! 저들에게서 노래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테니! 노래 부르는 것이 건강을 되찾고 있는 자에게는 어울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말을 하면 된다. 건강한 자 또한 노래를 부르고 싶더라도 건강을 되찾고 있는 자가 부르는 것과는 다른 노래를 부르고 싶어하리라.“

 

“오, 무뢰한 어릿광대들이여, 오르골들이여, 그만들 하라!”차라투스트라는 대답을 하고는 그의 짐승들에게 미소지었다. “내가 지난 이레 동안 어떤 위안거리를 생각해냈는지를 어찌 그리 잘 알고들 있는가!

다시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나 그 위안거리와 이 쾌차를 생각해냈던 것이다. 이제 그것 또한 리라에 맞춰 부를 노래로 만들어보려는가?“

“더 이상 말은 하지 말아달라.”다시 한번 그의 짐승들이 그에게 대꾸했다. “그대, 건강을 되찾고 있는 자여, 우선 리라를, 새로운 리라 하나를 준비하시라!

오, 차라투스트라여, 보라! 그대의 새로운 노래를 위해서는 새 리라가 필요할 것이니.

오, 차라투스트라여, 노래하라, 그리고 쏟아내라, 새로운 노래들로 그대의 영혼을 치유하라. 일찍이 그 어느 누구에게도 주어진 바 없는 숙명을, 그대의 막중한 숙명을 견대낼 수 있도록!

오, 차라투스트라여, 그대의 짐승들은 그대가 누구이며 누구여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보라, 그대는 영원회귀를 가르치는 스승이시다. 이제는 그것이 그대의 숙명인 것이다.!

첫 번째 사람으로서 그대가 이 가르침을 펴야 한다는 것, 이 막중한 숙명이 어찌 그대에게 더없이 큰 위험이 되지 않으며 병이 되지 않으리오!

보라, 그대가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우리 알고 있으니, 만물이, 그와 더불어 우리 자신도 영원히 되돌아온다는 것이지. 우리가, 우리와 더불어 만물이 이미 무한한 횟수에 걸쳐 존재해왔다는 것이지.

그대는 생성의 거대한 해(年), 거대한 해라는 괴물의 존재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그것이 다시 출발하여 내달리기 위해 모래시계처럼 늘 되돌려져야 한다는 것이지.

그리하여 이들 해 하나하나는 더없이 큰 것에서나 더없이 작은 것에서나 같고, 우리 또한 거대한 해를 맞이할 때마다 더없이 큰 것에서나 더없이 작은 것에서나 같다는 것이지.

오, 차라투스트라여, 그대가 지금 죽기를 바랄진대, 보라, 우리 그대가 그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으니. 그러나 그대의 짐승들은 아직은 그대가 죽기 말기를 간청하는 바이다!

그대는 떨지 않고, 오히려 복에 겨워 안도의 숨을 쉬어가며 말하리라. 엄청난 묵직함과 후텁지근함이 그대를 떠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 더없이 참을성 있는 자여!

‘나 이제 죽어 사라지노라. 한순간에 나 무로 돌아가리라, 영혼이란 것도 신체와 마찬가지로 결국 죽을 수밖에 없으니.’그대는 이렇게 말하리라.

‘그러나 내가 얽혀 있는 원인의 매듭은 다시 돌아오리라. 돌아와 다시 나를 창조하리라! 나 자신이 영원한 회귀의 여러 원인에 속해 있으니.

나 다시 오리라. 이 태양과 이 대지, 이 독수리와 이 뱀과 함께. 새로운 생명이나 좀 더 나은 생명, 아니면 비슷한 생명으로 다시 오는 것이 아니다.

나 더없이 큰 것에서나 더없이 작은 것에서나 같은, 그리고 동일한 생명으로 영원히 되돌아오는 것이다. 또다시 만물의 영원한 회귀를 가르치기 위해서 말이다.

또다시 위대한 대지와 위대한 인간의 정오에 관해 이야기하고, 또 다시 사람들에게 위버멘쉬를 알리기 위해서 말이다.

나 나의 말을 했으며, 그 말로 인해 부서지고 있다. 나의 영원한 운명이 바라는 것이 그것이다. 나 예고하는 자로서 파멸의 길을 가는 것이다!

몰락하는 자가 그 자신을 축복할 때가 되었다. 이렇게 차라투스트라의 몰락은 끝난다.‘“

 

말을 마친 짐승들은 차라투스트라가 저들에게 무슨 말을 하리라는 생각에서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저들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잠을 자고 있지 않았지만, 잠자는 사람처럼 눈을 감고 조용히 누워 있었다. 자신의 영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그토록 말없이 있는 것을 보자 뱀과 독수리는 그를 감싸고 있는 위대한 적막을 기리고는 조심스레 물러났다.










/







중력의 령과의 생사를 건 전투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고향과도 같은 동굴로 돌아와 회복하기 위해 휴식을 취한다. 허나 그는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눈감고 잠든 중에도 자기  내면의 사상, 연민의 정과 싸움을 벌여 더욱 지쳐갔으나 그를 도우려는 짐승들, 특히 그중에서도 용맹하고 영특한 독수리가 양 두마리와 장미사과 등등 과일들을 가져오고 옆에서 계속 말을 걸어주었기에 다시 신체 기운을 회복해간다.


허나 이렇게 회복하는 중에도 자기 내면 깊숙히 있던 연민의 정은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인간의 한계는 보잘것 없고 모든 게 다 허무하지 않냐고, 차라투스트라를 포함해 인간은 아무리 최선을 다해 봤자 참으로 불쌍한 존재라고 속삭이지만... 니체는 그에 대항해서 하나의 위안거리를 생각해낸다. 이 위안은 이른바 영원회귀라고 불린다.


모든 것이 돌고 돌다는 것.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재는 이미 과거에도 존재했다는 것.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인생이 미래에도 영원히 반복되리라는 것. 이 철학적 위안을 니체는 영원회귀라고 부른다. 물론 당연히 의문이 치솟아 오른다. 니체같이 어릴 때부터 영재로 인정받고 겨우 스물다섯에 연금받는 교수 직위를 받은 천재는 자기 인생이 몇번이라도 반복되어도 좋을지 모르지만,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평범한 또는 평균이하의 하류 인생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 인생에 행복보다는 불행이 많았다는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에게는 이런 영원회귀가 그야말로 악몽 그 자체는 아닐까?


그래서 니체의 이 영원회귀 개념은 후대에 실로 큰 논쟁거리를 던져주었다. 니체의 사상에 대한 반대자들은 물론이고, 누가봐도 니체를 적극적으로 계승한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해석이 갈린다. 니체에게서 역사의 계보학을 비롯해 여러 개념을 빌려오는 독일의 비평가이자 철학자 발터 벤야민 같은 경우에는 이 영원회귀를 자본주의라는 화려한 마술환등, 판타스마고리아가 과거나 미래나 끝없이 상품생산과 소비의 순환으로 반복되는, 종말없는 악몽이라고 해석한다. 반면에 또 한명의 적극적인 니체 철학의 계승자인 질 들뢰즈의 경우에는, 분명 모든 것이 반복되지만 이는 마치 주사위 던지기 놀이와 같은 개념으로 본다. 즉 육면체 주사위를 수천만번 던지면 행위 자체는 똑같지만, 1 2 3 4 5 6 이라는 결과는 매번 차이가 생기고, 이 차이로 인해 우리는 효율성과 동일성을 강요하는 이 견고한 자본주의 체제에 틈새를 내고 새로운 체제로 탈주하는 도주선을 긋는 것도 가능하다고, 들뢰즈는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렇게 니체의 영원회귀 개념에 대한 해석들이 니체의 계승자들 끼리도 서로 갈리지만, 나는 누구의 해석이 맞다 라고 선택 정도로 들뢰즈나 벤야민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한다. 위에 써놓은 말도 그저 니체에 대한 해설서에서 본 것을 기억나는 대로 써놨을 뿐, 정말로 벤야민이나 들뢰즈가 영원회귀를 저렇게 평가했는지 논문처럼 원문 인용 페이지를 찾아내며 재평가할 역량이 나애겐 없다.


 그렇기에 나는 영원회귀란 그 못지않게 니체에게 중요한 개념인 위버멘쉬와 아모르파티, 운명애와 연관지어 해석해보는 정도에 머무르고자 한다. 이 시리즈 내내 지겨울 정도로 반복했다시피 니체의 위버멘쉬는 자기 한계를 극복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이고, 운명애란 인간 인생의 모든 행복이든 불행이든 이 운명 그대로를 바로 내가 스스로 선택한 일이라고 받아들이고 사랑하겠다는 인생의 태도다.


이와 연결지어 보면 영원회귀도 시간이라는 변수가 개입되었을 뿐 그렇게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즉 과거에나 미래에나 시간이 아무리 흐르고 반복되어도 나는 나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자 할 것이며, 같은 불행과 행복이 영원히 내 운명처럼 반복되고 나를 속일지라도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내 운명 자체를, 자기 자신을 사랑하겠다는 태도가 바로 니체가 영원회귀를 하나의 위안거리라고 말한 이유가 아닐까. 이런 태도를 지향한다면 어떤 운명적인 비극이나 불행도 우리는 다 내 운명이고 내 탓이라고 역설적으로 삶의 위안을 삼을 수 있는 게 아닐까. 모든 불행이 내 운명 내 탓이라면 반대로 모든 행운도, 심지어 기적도 나의 운명 나의 행동 덕분이라고도 말할 수 있기에.



신암햄어사의 문수도 바로 이렇게 불행과 비극이 영원회귀하더라도 운명을, 자기 자신 사랑하는 삶의 태도를 끝까지 견지하여 결국 자기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존재가 아닐까. 문수는 월향의 죽음으로 각성하여 아지태에게 분명히 타격을 주기는 했지만, 분노한 아지태의 힘이 폭발하여 쥬신은 하루아침에 망해버렸다. 어디론가 멀리 날려간 문수는 일년 내내 걸어서 다시 쥬신으로 돌아오는 중에 이 모든 일들의 원흉이 무엇인지 되새겨보고, 결국 모든 원인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아지태를 해모수에게 소개한 것도 바로 자신, 계월향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새크로피아라는 흑마술을 아지태에게 시켜 자신과 계월향에게 걸도록 한 것도 바로 자신... 이쯤 되면 나같은 평범한 인간은 자살충동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문수는 단지 과거에 대한 후회로 자책하거나 허망해하거나 인생을 포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생에 대한 후회가 싫다면 애초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라는 문수의 말처럼, 우리의 인생은 누구나 후회로 가득차 있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미국 소설의 고전이라 평가받는 '위대한 개츠비'의 주인공 개츠비가 자신이 젊은시절 가난해서 사랑하던 데이지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긴 과거를 후회하고 그 과거를 되돌리기 위해 미친 짓을 벌이는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시험 공부를 좀더 열심히 할 걸, 떠나간 애인에게 좀더 잘해줄 걸, 지금보다 젊고 튼튼할 때 좀더 열심히 놀고 즐길 걸 등등 누구나 사람은 과거에 대해 후회를 한다. 허나 후회없는 인생이란 아에 태어나지 않는 것 이외엔 불가능하다.


게다가 문수는 장군으로서 자기의 선택으로 인해 자기 부하들의 생명이 수없이 왔다갔다 하는 것을 보아왔고 견뎌왔다. 그렇지만 그런 전장의 고뇌는 아무리 괴로워하고 자기 자신을 연민하고 자책해봤자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다. 그저 자신을 좀먹고 피폐해져서 전장에 죽을 가능성만 더 높아질 뿐. 그리하여 이제 문수는 두번 다시 아무도 믿지 않기로, 더이상 죄의식에 시달릴 바에야 차라리 고독한 소인배 소리를 들으며 악인들을 단죄하기 위해서 악을 자처하는 짓도 서슴치 않기로 한다. 마치 차라투스트라가 최선의 선을 행하기 위해선 최선의 악도 행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듯이. 그리고 만다라케 침의 환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머무르고 싶은 행복한 과거에 도달하지 못한 문수는 더 어린 시절로, 해모수와 계월향과 같이 출입금지된 마을의 어느 동굴로 탐험하던 유년기로 더 거슬러 올라간다.




유년기의 문수와 해모수는 무서운 것에 어쩔 줄 몰라하는 계월향은 동굴 입구에 남겨두고 둘이서 동굴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깊숙히 들어간 동굴에서 무언가 봉인된 악마같은 위험한 존재를 만나는데, 이 척 보기에도 위험해보이는 존재는 자기가 너의 소원을 이뤄줄 수 있다며 순진한 어린아이를 유혹한다. 바로 그때 현실의 문수는 마치 만다라케의 환각제 효과가 끝나가는 듯  고통으로 괴로워하며 몸부림치고 있었고, 꿈속의 어린 문수도 마치 머리속에서 누군가가 자기를 부르는 듯한 소리를 들으며 괴로워한다. 그리고 의외의, 그렇지만 필연적인 인물이 어린 문수의 눈앞에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아지태였다. 그리고 이 아지태는 또다시 해모수의 몸으로 나타나서는 어린시절 해모수가 악마의 봉인을 풀고 소원을 빌었다는 건 문수 네가 멋대로 조작한 기억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사실은 문수 너가 바로 악마에게 소원을 빈 사람이었고 너가 아지태라고. 너의 친구 해모수를 마치 모든 원흉의 씨앗으로 뒤집어 씌우지 말라고 하면서 이 꿈 속에서 문수 네가 안심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고 아지태는 즐거워하며 문수를 놀리듯이 말하는데... 문수는 바로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




그렇다. 아지태는 말 한마디면 사람을 죽일수도 있고 타인의 꿈 속에까지 들어와서 간섭할 수 있을 정도로 신 같은 현실조작의 능력을 가진 존재지만 결코 완벽하거나 절대적으로 미래의 모든 것을 다 아는 존재는 아닌 것이다. 아지태가 자기 입으로 문수 너는 '이 꿈에서 네가 안식할 수 있는 곳은 없다' 라고 말해버렸기에, 문수는 지금 자신이 꿈 속이라는 것을 알아차려 버렸다.


문수는 방자에게 만다라케 침을 자신에게 놓으라고 한 순간부터 이미 이런 순간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예견했던 것이다. 아지태는 그저 재미로 세상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미친놈이니 유일하게 자신에게 타격을 주고 당황시킨 인간, 문수가 꿈 속을 헤매고 있으면 반드시 재미삼아 놀리러 올 것이 틀림없다고, 이미 아지태의 마음 속을 꿰뚫어보고 여러 수 앞을 내다본 것이었다.


또한 문수는 이미 만다라케 침을 맞기 전부터 자신에게 영원히 안식할 수 있을만한 행복한 과거시절이란 없다는 것도 인식하고 있었던 듯 하다. 오히려 그런 불행한 자신의 비극적인 과거를 알기에 문수는 이런 도박적인 수를 던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육면체 주사위를 던져서 첫 번째에 1에서 6 중에 뭐가 나올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수백번 던지고 또 던지면 언젠가는 반드시 6 이 나오듯이, 문수는 자기에게 행복한 과거가 없기에 아무리 만다라케 침을 맞고 과거의 꿈 속을 헤매도 결코 행복하게 안식하질 못할테니 그러면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반드시 아지태가 자기에게 나타나리란 걸, 그리고 건방진 신 놀음을 하면서 자기가 이 꿈을 깨는 계기를 만들어주도록 방심을 부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




이제 문수가 깨어났듯이 건강을 되찾은 차라투스트라의 몰락은 끝나고, 그의 자기 자신을 축복하는 노래는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간다.


춤에 부친 또다른 노래와

일곱 개의 봉인, 네 또는 그렇다 의 노래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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