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지역명은 그 자체의 역사와 뉘앙스만으로 하나의 시가 되기도 한다. 박준 시인은 마음 한철 시에서 통영이 동양의 나폴리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항구라고 언급하기도 했었지 그런데 함경도 출신인 백석은 무슨 일로 반대편 남쪽 끄트머리 통영까지 갔을까?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이름, 시대가 변하는 역사의 격동기에 살고 있건만 여전히 과거에 붙잡힌 이름, 미역오리같이 보기만 해도 애처롭게 말라서 굴껍데기처럼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 그저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천희 중의 하나를 백석은 오랜 객주집에서 만났다.
그런데 이 오랜 객주집의 마룻방엔 생선 가시가 있다. 생선 가시가 있는 방에서 만난 천희라니 무슨 말일까 아마도 그녀와 당장 함께하고 싶었으나 생선가시가 혀를 찌르듯 걸리는 장애물들이 있었던 게 아닐까 마치 베르사유의 장미에서 미치도록 사모했으나 세상의 끝까지 함께 달려나가고 싶었으나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친 수많은 말 못 한 마음들처럼.
한국판 베르사유의 장미 애니 오프닝 노래가사처럼 너무나 화사한 장미로 태어난 오스칼. 여자들마저 반해버리고 사교계 팬클럽을 만들어 다 같이 흠모할 정도로 아름답게 태어난 그녀이지만, 대대로 프랑스 장군을 해온 자르제 가문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남자처럼 키워져서 어릴 때부터 자수나 꽃꽂이가 아니라 검술과 승마를 배운다. 덕분에 거칠고 덩치 큰 남자들이 득실득실한 군대에서도 오스칼은 검 실력 하나로 부하들을 제압한다.
평생을 그저 자르제 가문의 대를 잇는 장군이 되어 프랑스 왕가를 수호하는 검이 되길 원했던 오스칼. 하지만 스웨덴의 페르젠 백작을 만나고 그가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와 금지된 사랑을 시작했다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 오스칼의 내면에서도 바람이 분다 아니 폭풍이 불고 폭우가 내린다 백석이 통영의 천희를 만난 뒤로 유월의 바닷가에 김냄새나는 비가 매일 내리듯이...
4년 전 처음 만나 영혼이 떨리고 서로를 찾아 울부짖던 사람은 마리 앙투와네트와 페르젠 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스칼은 당시에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페르젠이 스스로 마리 앙투와네트와 거리를 두기 위해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한다고 말하자 자기도 모르게 무관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사랑하니까 거리를 두려는 그의 마음을 그녀도
그것은 단순히 마음을 터놓을 친구가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려고 위대한 결단을 내린 것에 감동하고 슬퍼서 나올 수 있는 눈물은 아니리라.남자가 사랑을 위해 이 이상 고귀한 행동을 하는 건 본 적이 없다면서반드시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라고 기도하는 오스칼.오스칼은 이때부터 페르젠에 대한 자기의 마음을 조금씩 깨닫고 있었던 게 아닐까.
다행히 4년 후 미국 독립전쟁은 프랑스의 도움에 힘입어 승리로 끝낸다. 하지만 페르젠은 바로 돌아오지 않자 오스칼은 전사 보고 같은 건 없었는데 대체 무슨 일이냐고 불안 초조해한다. 마치 천희와 여생을 함께하고 싶지만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리는 백석처럼... 다행히 그저 타지의 열병 때문에 귀환이 열흘정도 늦어질 뿐이었던 페르젠. 그가 돌아오자 오스칼은 인생 최고의 환희를 느끼지만 또한 돌아온 페르젠을 알게 되면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가 이제 또 어떤 행동을 보일지 불안해진다...
그리고 오스칼의 아버지 자르제는 딸의 변화에 무언가 조짐을 느꼈는지 급작스레 오스칼의 정략결혼을 추진한다.
오스칼은 당연히 자신은 평생 자르제 가문의 장군이 되기 위해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결혼하고 얌전히 살라니 무슨 소리냐며 반항했으나...아버지는 조용히 복종하라며 딸의 따귀를 날린다.
마리 앙투와네트와 페르젠에게 날아든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마음의 태풍이 이제 오스칼이라는 섬에 상륙하기 직전이다.
오스칼은 자신의 마음에 솔직해질 수 있을까
아니면 그도 자르제 가문이라는 프랑스 명문가의 무게에 짓눌려 다시 여자로 살아가게 될까
그조차 아니면 이제 작중 시절은 바로 1789년...
프랑스뿐만 아니라 세계사에서 손꼽히는 그 대사건의 소용돌이 속으로 모두가 휘말릴까
옆나라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 말하던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황혼 무렵에 날아오를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