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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무렵 시 한잔23-기형도의 대학시절과 100도

조용히 끓어오르지만 차분히 삭이다 결국 100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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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책들이 가득한 은백양의 숲,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는 이 아름다운 숲의 돌층계에서 플라톤을 읽을 때마다 총성이 울린다. 마치 대부 같은 고전 누아르 영화나 사이버펑크 sf영화의 느리게 흐르는 클라이맥스 장면을 직접 몸으로 겪는 시인. 같이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국가의 비밀 스파이라고 털어놓고 존경하는 교수님은 이런 시대상을 다 아시지만 중립의 침묵이 굳건했던, 80년대. 겨울을 몇 번 버티자 외톨이가 되어버린다.


79년에 연세대를 들어가고 연세문학회 동아리에서 시를 쓰기 시작한 기형도. 허나 전두환의 신군부가 80년 광주 학살을 벌이자 급속도로 불이 붙기 시작한 대학가의 바람은 우울하고 연약한 시인의 마음으로 쉽게 받아들이기도 그저 거부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사실 운동권 대학생만이 아니라 대다수 소시민들의 삶의 방식이기도 했다. 이런 그 당시의 대학생과 소시민의 삶을 잘 표현해 낸 수작으론 역시 송곳 지옥으로 유명한 최규석 작가의 백 도씨 떠오른다.






어릴 적 반공소년 웅변대회에 나가 상도 타고 공부도 잘해서 명문대에 들어간 영호. 대학에 들어가면 잘못된 빨갱이 사상에 물든 다른 친구를 자기가 잘 설득해야겠다 생각했지만, 티비에 나오던 편집된 빨갱이들과 대학에서 알게 된 광주 학살의 비극과 진실은 너무나 달랐다. 이 혼란 속에서 영호는 고민을 거듭한다




대학교에선 친구 선배들과 함께 새로운 진실들을 배워가지만 집에만 오면 그런 사회불온자와는 자기는 상관없다는 듯이 일종의 연기를 하는 영호. 선배가 지적하듯 그것은 하나의 위악, 거짓된 악함이다. 학생운동을 하자니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걸리고 안 하자니 양심에 찔리는 이 딜레마에서 그냥 나쁜 사람인척 모르는 일인 척 사는 건 아마 그 시절 대다수의 마음이리라. 그럼에도 하루는 다 같이 시위에 나갔다가 구치소에 영호가 수감되고 영호의 어머니는 아들을 석방하라며 외치다가 자신도 잡혀가게 된다.



영호에겐 형이 있었고 형도 대학을 나왔으나 장남이라는 책임감으로 운동보다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고 대기업에 취직했다. 그리고 그 월급으로 영호를 대학에 보냈으니 영호가 학생운동하다가 잡혀들어가도 형은 그저 묵묵히 응원을 보낼 뿐이다. 자신이 하지 못한 일을 대신해주는 동생 영호를 자랑스러워하기에. 어쩌면 기형도도 그리고 말이 없던 교수님도 그런 태도를 가지고 80년대를 보낸 게 아닐까. 운동도 사실 거리에 나가서 돌과 화염병을 전경에게 던지는 기동전만이 아니라 천천히 꾸준히 넓은 기지를 만드는 진지전도 필수적이다. 또한 이런 운동의 방법론을 둘러싼 수천 년의 논쟁도 스파르타쿠스 노예해방 투쟁부터 2차 대전당시의 안토니오 그람시 그리고 지금의 한국으로도 이어진다...





사회운동의 급진파냐 온건파냐 기동전이냐 진지전이냐 둘 중의 무엇이 더 무조건 옳냐는 논쟁은 사실 무의미할 것이다. 다만 현실에서 한쪽의 투쟁 방법이 지금 한계에 부딪쳤다면 다른 방법을 찾는 지성의 유연함이 모든 사회운동에 필수적이지 않을까. 이 만화에 나오는 총학생회장은 분명 책보다 술이 더 친한 날라리 운동권이었지만 바로 그런 사람이 대표자이기에 군사정권의 치하에서 유연할 수도 있으리라.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을 위해 절대 선제 폭력이 아닌 주장의 순수성으로 평화 시위를 하자는 이 집회에 드디어 평범한 시민들도 공감하고 동참해주기 시작한다.




역사를 보면 모든 사회운동은 결코 일부 운동권 학생들만이 열심히 해서 따낸 투쟁의 성과물일 수 없다. 보통 시민들이 하나 하나 공감하고 지지하고 같이 할 때 진정 불가능해 보이던 군사정권의 철옹성을 넘는 일조차 가능해진다.


우리가 다들 알다시피 이런 투쟁과 박종철 이한열 열사같은 분들의 희생을 거쳐 체육관에서 군인들이 총 들고 거수로 군인 대통령을 뽑던 우스꽝스러운 나라에서 겨우겨우 한 표 겨우 백지 한 장을 얻게 된다...




이 백 도씨 마지막 에필로그의 이름은 축제. 호헌조치 철폐와 대통령 직선제라는 성과를 얻어낸 한국 80년대 시민사회는 지금 봐도 그 역동성과 단합력이 놀라우며 돌이켜보니 그 과정은 하나의 축제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다들 알고 있듯이 직선제 이후 김대중 김영상 양 김은 대통령 욕심에 분열하고 다시 한번 군사정권 노태우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요즘 인터넷 밈처럼 한국의 80년대 그 투쟁들도 축제가 아니라 장례식일까


그렇게 피 흘리는 노력에도 허망한 결과는


많은 시민들을 허탈하고 허무하게 했으리라.


그럼에도 지금 2020년대는 분명 자유로워졌다.


어쩌면 축제가 작은 장례식이고 장례식이 바로 큰 축제일지도 모른다. 삶과 죽음이 분리할 수 없듯이


막걸리집에서 서너 사람 모여서 이야기하면 잡혀간다는 막걸리법의 괴담은 도시괴담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 말하지 말라는 검열이 아니라


너무나 많은 말이 넘치는 과잉의 시대일지도.


조지 오웰의 1984보다 멋진 신세계에 가까운...


그런 세계에서도 여전히 시는 가능한가.


기형도는 여전히 말해준다


플라톤을 읽을 때 울리는 총성은 날카롭고


나뭇잎조차 무기로 쓰여도 시는 아름답다고...


황혼 무렵에 시 한잔...


Fin.





다음 한 잔은 기형도의 질투는 나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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