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살라는 유령이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유튜브에서 베스트셀러에서 유명 셀럽들에게서 다들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건 당신 인생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며 오로지 긍정과 성공을 상상하며 살라는 지상명령이 21세기를 뒤덮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유튜브 스타가 되고 모두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수 있는 사회는 가능할 리가 없다.그렇기에 우리는 긍정과 성공의 전체주의에 지칠 때 만화나 기형도의 시를 읽으며 마음에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우고 어리석게도 쓸데없는 기록들로 우울한 종이들을 채운다.
다들 개처럼 지칠 줄도 모르고 청춘 내내 탄식했으나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제야 내 희망의 내용물은 타인에 대한 질투뿐이었구나 하고 깨닫는다. 나는 미친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노라고... 낮은 후회의 탄식을 흘리는 시인. 흔히 자신을 사랑해야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자기애가 기반이 되어야 타인과도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이제 상식이 되었다.
하지만 기형도는 오히려 자신을 사랑하는 게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지 우리에게 되묻는 듯하다. 이토록 우울하고 희망이라곤 질투밖에 모르는 내가 대체 어떻게 이 못난 나를 사랑하란 말인가? 이 절규에 가까운 시인의 질문에 대해 각자의 답변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3000만부 이상 팔리며 기네스북에 오른, 순정만화의 고전이 된 후르츠 바스켓 이상의 대답을 알지 못한다.
후르츠 바스켓의 주인공 토오루는 현실에서 거의 보기 힘든 천사 또는 성녀의 포지션이다. 사람마다 상냥함의 형태가 다를 수 있다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이 다소 거칠고 어떤 이는 과하게 예의를 차리기도 하지만 그 또한 각자의 상냥함이라고 인정해주고 수용해 주는 굉장한 공감능력, 사회적 지능이 매우 높은 사람. 왠지 이런 사람이라면 험한 사회를 겪어보지 못한 온실 속 화초로 살아온 건 아닐까 의심해 볼 만도 하다. 하지만 그녀는
어릴 적 아버지 없이 어머니랑 둘이서만 살아가다가 아직 성년도 되기 전 고등학생인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여주 혼다 토오루. 물려받은 유산 같은 것도 없이 친척집에서 지내다가 그마저 집을 개축한다고 하니 혼자서 뒷산에 텐트를 치고 낮에는 학교 밤에는 청소 알바를 하는 생활을 시작한다.
누가 봐도 하루하루가 전쟁이나 다름없는 객관적으로 어려운 삶인데 토오루는 어머니의 사진을 소중히 간직하며 씩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온실 속 화초는 커녕 산속의 잡초 그 자체인 여주. 하지만 이 산은 소마라는 가문의 소유였고 그녀는 우여곡절을 거쳐 소마 유키를 비롯한 반 친구들과 같이 살게 된다.
사람과 어울려 사는 일도 사실 연습과 경험이 필요한 것. 수행을 통해 방망이로 테이블을 부술 수 있지만 그 전에 멈추는 힘을 조절할 수도 있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상처입기도 하고 상처주기도 하며 우리는 진정한 배려에 대해 배울 수 있다. 안타깝게도 글로 수영을 배울 수 없고 몸으로 물에 들어가야만 수영을 배울 수 있듯이 우리는 인간군상들 사이에서 몸과 마음으로 부딪치고 생채기를 내야만 진짜 인간관계에 대해, 우정과 사랑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또 우리는 인간관계 속에서 기형도의 시에서 말하듯 쉽게 감당하기 어려운 우울한 심연의 진실을 알아버리기도 한다. 만화에서 그것은 소마 가문이 십이지의 혼령에 씌여서 이성에게 안기면 하나씩 동물로 변신하는 그야말로 만화적 설정이자 저주로 나타난다. 소마 유키는 쥐 소마 쿄우는 고양이...
여주 토오루도 당연히 처음에 굉장히 혼란스러웠지만 우연찮케도 그녀는 어머니에게 들은 십이지 이야기를 좋아했으며 특히 잔치에 가지 못한 고양이를 가장 좋아한다.소마 쿄우는 아까 위의 인간관계에 대한 충고에서 이런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냐고 코웃음을 쳤지만 그 즉시 토오루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언제나 화난듯한 야생의 고양이 쿄우와 언제나 예의 바른듯한 도련님 서생원 유키는 이런 토오루를 만나서 서툴게나마 진짜로 웃는 얼굴을 보여주게 된다. 아니 그것은 웃는 연습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같은 저주를 공유하는 소마 가문 사람들 외의 사람과도 진정으로 친교를 맺고 배려하는 법을 하나씩 배우게 되는 과정. 또 상처받고 상처주기도 하겠지만 서로 존중하고 배우려고 노력한다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작은 믿음.
작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하나 다른 십이지와 다른 사람과도 만나고 마음의 문을 열게 되는 소마 가문 사람들. 그 와중에 소마 유키는 자신도 자기가 싫어서 타인과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한다. 그리고 여기서 바로 기형도의 절규에 답한다... 자신의 싫은 점밖에 모르는데 자기를 좋아하라니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무리해서 억지로 갖다 붙여도 허무할 뿐. 사실은 타인에게 좋아해 라는 말을 듣고서야 처음으로 자신을 좋아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