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타클의 사회, 시각문화 위주의 구경거리로 가득 찬 현대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는 건 일종의 미신으로 여겨진다. 주로 유령이나 영혼 드래곤 같은 상상의 산물들이 진지하게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은 그래 뭐 믿는 건 각자의 자유지 하며 가볍게 넘겨지곤 한다. 하지만 보이지 않아도 존재한다고 현대인도 누구나 당연히 믿는 것도 많다. 신뢰나 사랑 정의 등의 가치가 그러하고 냄새나 소리 또한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데 소리의 뼈라니 교수님은 대체 어떤 강의를 하고 싶으셨던 걸까?
소리의 뼈라는 이름으로 강의를 개설해놓고 강의 내내 침묵으로 일관하는 교수님. 침묵인지 숨겨진 의미인지 고정관념을 깨기 위한 방법론적 비유인지 도무지 강의의 목적을 알기 어렵지만, 그 다음 학기에 모든 소리를 더 잘 듣게 되었다는 놀라운 결과를 학생들에게 남겨준다.
이는 어쩌면 기형도가 살던 80년대보다 온갖 소음과 디지털 공해에 시달리며 디지털 디톡스라는 신조어의 필요성에 다들 고개를 끄떡이는 지금 시대의 사람들에게 더 와닿을 듯하다. 온갖 소음에 노출된 우리의 귀와 뇌는 일상에서 항상 피곤하며 휴식을 취하면 이전보다 훨씬 잘 들리곤 한다. 그러면 만약 애초에 잘 들리지 않는 청각장애인의 경우는 어떨까?이런 의문에 대해 완결된 네이버웹툰 Ho가 나름의 답변을 줄지도?
대학교를 다니다가 입대 전에 돈이 필요해서 학원 선생을 알아본 흔한 남자 대학생인 주인공. 면접도 수업시연도 없이 갑자기 덜컥 수업을 맡기는데 그의 첫 번째 학생은 초등학교 6학년 호, 청각장애인이었다. 당연히 자기가 잘할 수 있을까 의문에 시달리지만 의외로 호 학생은 자기가 서툴게 쓰는 칠판의 수업을 집중해서 잘 따라온다.
3살 때 사고로 청력을 잃고 비행기소리 같은 큰 소리 외에는 거의 듣지 못한다는 호. 하지만 그럼에도 나름의 노력으로 기본 교육과정을 느리지만 하나하나 진도를 따라간다. 게다가 호는 열두 살 초등학생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멋진 취미도 갖고 있다.
그 취미는 바로 영화감상. 어린애라고 디즈니나 많이 봤으려나 생각했지만 짐캐리 주연의 이터널 선샤인 같은 성인들이 많이 보는 명작영화도 즐겨보는 호.디즈니가 아동에게 어필하기 위해 노래 위주의 뮤지컬적인 만화영화를 많이 만들지만 오히려 호는 자막 위주로 영화를 보기에 성인들이 많이 보는 스토리중심의 명작을 즐기게 된 게 아닐까. 그렇기에 자막이 없는 국산영화는 오히려 하나도 볼 수가 없게 되는 아이러니.
이런 와중에 이전에 호를 담당했던 선생님이 주인공에게 말을 건다. 그녀는 나름 내적 친밀감을 형성해 보려고 호 같은 청각장애인을 교육하는 게 힘들지 않냐고 말을 걸지만, 자기가 정상이고 호를 그저 자기보다 못한 장애인으로만 보는 편견이 가득한 말투에 주인공은 눈살이 찌푸려진다. 순간 토해버리고 싶은 듯한 주인공의 기분은 코를 찌르는 듯한 향수 때문만일 리는 없다.
귀가 불편하면 말도 배우기 어려웠을 텐데 호는 대체 어떻게 언어를 배웠을까? 그 답도 매우 단순하다. 세 살 때 다친 호의 귀에 대해 알게 된 어머니가 학습법을 배워와서 발음 하나하나를 가르친 것. 촛불을 후 불게 해서 ㅎ글자에 대해 알려준다는 식으로.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건 누구나 사람이 수천수만 년 동안 새로운 언어를 배운 그 방식 자체일 뿐이다.
어머니이기에 청각장애 아이가 발음을 배울 때까지 더 끈기 있게 인내심을 가지고 반복했을 뿐, 프로이트니 라캉이니 철학자까지 불러오지 않더라도 어머니의 말을 반복학습하며 아기가 언어를 배운다는 건 상식이니까. 지금도 자국의 언어를 모국어라고 부르는 건 그러한 상식의 반영이니까.
주인공은 평소에 자신은 그저 흔해빠진 대학생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우연히 선생과 제자 사이로 만난 초등학생 호 덕분에 영화와 웹툰, 좋아하는 사람 등등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진심으로 이야기를 나눌 사람을 우리는 흔히 친구라고 부르고 그런 친구 하나가 있냐 없냐는 자신을 의미 있는 사람으로 느끼게 할 만큼 굉장히 값진 삶의 가치 그 자체다.나이 차이나 장애유무 같은 세상의 편견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나도 지금은 독일에 유학가 있지만 나보다 8살이나 어리고 몸이 아프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영혼으로 공명했던 내 의형제 태영이를 매일 그리워하듯이
물론 어제 글에서 다룬 후르츠바스켓 만화에도 나오듯 이런 친우와 관계를 맺는 것은 또 사람의 숲에서 상처받고 상처 주는 연습의 과정이다. 40화가 넘는 전체 분량중에 3화밖에 안 되는 초반에 나오는 주인공과 호의 관계는 마치 어린아이 전용 동화처럼 깨끗하고 아름답기만 하다. 그럼에도 첫 화에 나오듯 이 둘은 궁극의 사이까지 나아간다.
3화의 마지막에 이제 주인공은 예정된 대로 군대를 가야 하고 호와 이별의 시간이 다가온다. 2년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만나도 호와 주인공은 이전처럼 아름다운 관계를 잘 유지할 수 있을까? 아니면 선생과 제자 관계에서 결혼까지 하는 궁극의 관계 연인으로 발전하기 위해 남들처럼 수많은 싸움과 부침을 겪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