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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왜 1973년의 핀볼 게임에 집착했을까

숏츠의 시대, 세줄 요약 독서 추천 1

by 스포쟁이 뚱냥조커



이름도 외우지 않는 쌍둥이와 동거하며 살다가


모든 걸 포기하고 1973년의 핀볼게임을 찾는 남자


상실의 시대에서 잃은 나오코를 여기서 또 잃어서?




평소 존경하던 일본의 문학비평가이자 철학자인 가라타니 고진이 지은 하루키의 풍경이라는 작은 비평책을 보다가, 하루키의 소설에는 인물의 내면이라는 것이 사실상 부재하고 그저 이야기의 구조만이 존재한다는 통렬한 비판을 읽고 다시금 하루키의 초기작을 읽어봤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3년의 핀볼은 하루키가 스스로 밝혔듯이 아직 전업 소설가가 되기 전에 부엌에서 쓰여진 초기 소설이다. 사실 난 옛날에, 스무 살 적에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소설을 다 읽었지만 그다지 큰 감흥이 없었고 동시대에 한국의 이영도나 김애란이 문학성 주제의식으로 훨씬 뛰어나지 않나 생각했다. 그리고 거의 20년 가까이 지났지만 지금 다시 읽어봐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 대한 내 평가는 그저 시시하고 두 번 읽을 시간은 아까운 소설로 변함이 없다.


그러나 1973년의 핀볼은 확실히 그의 데뷔작인 바람의 노래보다 몇 수나 위인 소설이었다. 이름도 모르고 304 305 이렇게 숫자로 구분하는 쌍둥이 여자 둘과 동거한다는 자극적인 설정과 묘사로 인한 초반의 소설적 몰입감은 오히려 21세기에 낸 하루키 소설들보다 나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어쩌면 흔한 남자의 판타지 그 자체의 일상인데 소설의 주인공은 그 와중에 갑자기 1973년의 스페이스 쉽이라는 핀볼 게임에 집착하고 그걸 찾으러 쌍둥이가 떠나든 말든 집을 떠나서 모험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가 굳이 그런 쓸데없는 탐험 내지 모험을 시작한 이유는, 소설 초반에 주인공의 나오코라는 여자친구가 자살했다는 이야기로 살짝 나온다. 잠깐 나오코라니 상실의 시대, 노르웨이의 숲으로 하루키를 처음 읽은 대부분의 한국 독자들에게 절대 잊혀지지 않는 이름이 아닌가.


앞서 말한 가라타니 고진도 나오코라는 이름의 존재가 유일하게 소설에서 대체될 수 없는 존재, 고유명으로 작동하며 노르웨이의 숲에서도 그 이름이 나온다는 걸 놓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러한 연인의 상실을 겪은 주인공은 또 쌍둥이 여자를 잃는데도 왜 핀볼에 집착할까? 그 오래된 핀볼 게임 기계를 과연 찾는 게 가능할까?? 이 이상은 독자 여러분의 몫으로...




Ps. 여기까지면 30년이 넘게 지난 하루키의 초기 소설을 굳이 지금 또 읽어볼 이유의 추천사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여기에 아주 조금의 이유를 더 붙인다면, 다수의 일본 비평가들이 지적하듯이 1973년의 핀볼이라는 제목부터 하루키는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오에 겐자부로의 만엔 원년의 풋볼 소설을 의식하고 패러디한 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하루키를 읽자마자 오에 겐자부로를 처음으로 500페이지짜리를 다 완독했는데 실로 노벨문학상을 받을만한 훌륭한 일본 최고의 소설이 아닌가 싶다... 아마 다음 책 추천은 이 풋볼에 대한 소설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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