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포쟁이 뚱냥조커 Jul 19. 2019

인문학 두쪽읽기 니체17-에반게리온 스포일러 에세이3

니체와 신지에게 달콤한 죽음은 있을 수 있을까

니체 전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번역본에서 다수 인용 및 필사함


타란툴라들에 대하여 166-170p

보라! 타란툴라 굴이다! 어디 한번 보겠는가? 여기 거미줄이 걸려 있구나. 줄을 건드려 흔들어보아라. 순순히 기어나오고 있구나. 반갑다. 타란툴라여! 등에 세모꼴 반점과 표정이 까맣게 찍혀 있구나. 나 네 영혼 속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알고 있다.
앙갚음이 네 영혼 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네가 어디를 물어뜯든, 그곳에는 검은 부스럼이 솟아오르지. 너의 독은 앙갚음을 함으로써 영혼에 현기증을 일으키고!


평등을 설교하는 자들이여, 영혼에 현기증을 일으키는 너희에게나 이렇듯 비유를 들어 말하노라! 너희들이야말로 타란툴라요 숨어서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는 자들이렷다!


이제 나 너희 은신처를 드러내고 말겠다. 그래서 나 너희의 얼굴에 대해 나의 숭고한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 너희가 친 거미줄을 찢어내는 것이다. 약을 올려 너희를 허구의 동굴 밖으로 유인할 생각에서, 너희가 내세우고 있는 “정의”라는 말 뒤에 숨어 있는 앙갚음의 정체를 드러낼 생각에서.
앙갚음으로부터의 인간 구제, 이것이 내게는 최고 희망에 이르는 교량이자 오랜 폭풍우 뒤에 뜨는 무지개이기 때문이다.


타란툴라들이 원하는 것은 물론 그와 다른 것이지. “우리의 앙갚음이 일으키는 폭풍우에 세계가 온통 휘말리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는 정의지.” 저들은 서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와 평등하지 않은 사람 모두에게 앙갚음을 하고 욕을 퍼부으려 하지.” 이렇게 타란툴라의 심보는 다짐한다.


“평등을 향한 의지. 앞으로는 이 의지가 바로 덕을 일컫는 명칭이 되어야 한다. 권력을 쥐고 있는 자 모두에 반대하여 우리는 목청을 높이리라!”


평등을 설교하는 자들이여, 무력감이라는 폭군의 광기가 너희 내면으로부터 “평등”을 부르짖고 있구나. 너희가 더없이 은밀하게 품고 있는 폭군적 욕망이 이처럼 덕이라는 말을 탈로 쓰고 있는 것이다!


상처받은 자부심, 억제된 시샘, 너희 선조의 것일지도 모를 자부심과 시샘. 이런 것들이 너희 가슴속에서 불꽃이 되고 앙갚음의 광기가 되어 터져나오는구나.


아버지가 침묵한 것, 그것은 아들에게서 발설되기 마련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폭로된 비밀임을 나 때때로 발견했다.


저들은 열광하고 있는 자들과도 같다. 그러나 저들을 열광케 하는 것은 심장이 아니라 앙갚음이다. 저들이 섬세하며 냉철해질 때도 저들은 섬세하며 냉철하게 만드는 것 역시 정신이 아니라 시샘이고.


저들의 질투심이 저들을 부추겨 사상가의 길을 가게도 한다. 그리고 이것이 저들이 하고 있는 질투심의 징후이니, 저들은 언제나 너무 멀리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친 나머지 눈 위에라도 누워 잠을 청할 수밖에.


저들이 내뱉는 온갖 탄식에서 앙갚음의 음향이 울려나오고, 저들이 하는 온갖 찬미 속에는 화가 입히려는 속셈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판관이 되는 것이 저들에게는 복인 듯하다.


벗들이여, 권하건데 남을 벌하려는 강한 충동을 갖고 있는 그 누구도 믿지 말라!


그런 자들이야말로 열등한 천성에 열등한 피를 타고난 족속이다. 저들의 얼굴에 사형 집행인과 정탐꾼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자신이 얼마나 정의로운가를 과시하기 위해 말을 많이 하는 그 누구도 믿지 말라! 진정, 저들의 영혼 속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은 꿀만이 아니다.


그리고 저들이 자칭하여 “선하고 정의로운 자”라고 할 때 저들에게서 권력을 뺀다면 바리새인이 되기에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잊지 말라!


벗들이여, 나 섞이고 혼동되고 싶지 않다.
생에 대한 나의 가르침을 펴는 자들이 있다. 등의 설교자이자 타란툴라이면서 말이다.


이들 독거미들은 저들의 동굴 속으로 물러나 생에 등을 지고 있으면서도 짐짓 생에 대해서 좋게 말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입히기 위한 술책에서 그리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저들은 오늘날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에게 화를 입히려 든다. 이들에게는 죽음의 설교가 더없이 친숙하기 때문이다.


사정이 달라진다면, 저들 타란툴라도 달리 가르치리라. 저들이야말로 일찍이 그 누구보다도 세계를 비방했던 자들이요, 이단자를 화형에 처한 자들이었으니.


나는 이들 평등을 설교하는 자들과 섞이고 혼동고 싶지가 않다. 정의가 내게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평등하지 않다.” 고.


사람들은 평등해서도 안 된다! 내가 달리 말한다면, 위버멘쉬에 대한 나의 사랑은 어찌될 것인가?


사람은 천 개나 되는 교량과 좁은 길을 걸어 미래를 향해 돌진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더욱더 많은 전투가 벌어지고 더 많은 불평등이 조장되어야 한다. 나의 위대한 사랑이 내게 이렇게 말하도록 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들의 적의 속에서 형상과 유령을 만들어낼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형상과 유령을 동원하여 서로에 대항하여 최상의 전투를 벌여야 한다!


생 자신은 기둥과 계단의 도움으로 자신을 높이 세우려 한다. 먼 곳을, 복에 겨워하는 아름다움을 내다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기 위해 생은 높이 오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높은 경지를 필요로 하고 있기에, 생은 계단을, 계단과 오르는 자들이 범하는 모순을 필요로 한다! 생은 오르고자 하며 오르면서 자신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런데 보라, 벗들이여! 타란툴라 굴이 있는 이곳에 낡은 성전의 잔해가 위로 치솟아 있으니, 부디 눈을 씻고 한번 보라!


진정, 일찍이 여기 그 자신의 사상을 돌로 담아 위로 쌓아 올린 바 있는 자는 더없이 지혜로운 자가 그러하듯 온갖 생의 비밀을 다 알고 있었으렷다!


아름다움 속에조차 싸움과 불평등이, 힘과 그 이상의 힘을 쟁취하기 위한 전쟁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을 그런 자는 여기에서 우리에게 더없이 명료한 비유를 들어 가르치고 있다.


여기 둥근 천장에 홍예는 실랑이를 해가며 어찌 그리도 거룩하게 서로 맞서 버티고 있는가. 이들 거룩하게 분투하고 있는 것들은 빛과 그림자를 앞세워가며 어찌 그리고 서로에 맞서 분투하고 있는가.


벗들이여, 우리도 이처럼 확실하고 멋지게 서로에 대해 적이 되어주도록 하자! 우리도 서로에게 맞서서 거룩하게 분투해보자!


아! 방금 나의 오랜 적, 타란툴라가 나를 물었구나! 거룩하리만큼 확실하게, 그리고 멋지게 나의 손가락을 물었구나!


“마땅히 형벌이 있어야 하고 정의가 있어야 한다. 그로 하여금 이 곳에서 아무 대가 없이 적대 관계를 예찬하는 노래를 부르도록 해서는 안 된다!” 타란툴라의 생각이다.


그렇다. 그는 앙갚음을 한 것이다! 아! 이제 그는 앙갚음을 함으로써 나의 영혼에까지 현기증을 일으키리라!


벗들이여, 일으키지 않게끔 나를 여기 이 기둥에 단단히 묶어달라! 나는 앙갚음에 대한 욕망의 소용돌이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폐허가 된 신전 기둥에 올라 수행하는 성자가 되고 싶다!


진정, 차라투스트라는 돌개바람도 회오리바람도 아니다. 그리고 그가 춤꾼이라 할지라도 타란툴라 춤을 추는 춤꾼은 더 이상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니체가 평등이라는 관념 자체를 비판한는 것은 1부에서도 드러난 바 있다. 이번 타란툴라들에 대한 장에서는 서로 별거없는 잡스러운 존재가 되자! 하향평준화를 권하는 평등을 정의라고 칭하 이들은 니체가 보기에 사람들에게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과 다름없다며  타란툴라라는 독거미에 비유한다. 그리고 이들의 마음 속 근원이 Ressentiment 르상티망, 번역하면 원한의식 또는 앙갚음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차라투스트라는 분석하고 비판하려 한다.


르상티망, 원한의식 또는 앙갚음은 실로 강력한 에너지의 감정이다. 자신보다 잘난 사람에게 질투심을 가지거나 심지어 바닥으로 끌어내리려고 하는 마음이 바로 원한의식인 것이다. 니체가 보기엔 평등을 설교한다는 자들이 하는 것은 기껏해야 바로 강자, 권력자에 대한 하찮은 열등감으로 앙갚음을 하려 드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이 르상티망, 원한의식에 대해 더 깊이 파고든 후속작 도덕의 계보 에서 니체는 강자에 대한 원한의식에 사로잡히는 노예의 도덕이 아니라 스스로 강자가 되고 삶의 주인이 되라는 주인의 도덕을 설파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좀 더 적극적인 해석을 하자면, 박홍규 선생님처럼 니체는 민주주의 자체에 반대하는 반민주주의 철학이라거나, 니체가 비판하는 타란툴라들은 19세기에 재산의 평등 또는 사유재산 자체의 철폐를 주장한 '사회주의자들' 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니체를 어떤 특정 사상가로 한정하고 규정짓기보다는, 니체를 활용해서 각자가 원하는 욕망대로 가치를 창조하는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 니체도 원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스스로 강자가,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담은 애니메이션이 바로 에반게리온, 특히 구 극장판인 엔드 오브 에바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에바의 주인공인 신지를 불편해하고 심지어 혐오하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특히 엔드 오브 에바에 나오는 신지의 무기력함에 치를 떨어서 그런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사람은 자기가 아는 것에 대해서만 싫어하고 혐오하고 증오할 수 있는게 아닐까. 인간은 자기가 모르는 대상에 대해서는 그저 공포를 느끼고 두려워하지 않던가? 어찌 보면 에반게리온 애니는 니체가 스스로를 너무 일찍 날아온 존재라고 칭했듯이, 그저 너무 일찍 세상에, 한국에 도착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저 신지는 지금의 한국인들에게 굉장히 흔한 정서이며 감정이입을 불러일으키지 않는가. 그래서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라던가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같은 에세이들이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베스트셀러로 신나게 팔리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 아닐까.



 애초에 이 작품의 시작, 세컨드 임팩트가 일어난 반게리온 세계 내에서 신지는 5살때 어머니 유이를 사고로 잃고, 아버지 겐도는 자신을 할아버지댁에 버리다시피 했었다. 그리고 10년 가까이 지나 그 아버지란 작자가 14살에 난데없이 불러내서 정체도 모르는 로봇에 타서 괴물과 싸우라고, 안 그러면 인류가 멸망한다고 협박을 한다... 심지어 네가 타지 않으면 방금 싸우다가 온몸을 다친 소녀가 다시 또 싸워야 한다고 죄책감까지 유발시킨다.


지난 글에서 말한 것처럼, 신지의 아버지 겐도는 인류의 보존이 아니라 인류보완계획이라는 명목으로 오히려 멸망을 바라고 있다. 그가 제레와 다른 점은, 그 과정에서 육체적으로 죽은 자신의 아내 유이의 영혼을 다시 만나고 인간을 이런 운명으로 밀어넣은 아담과 리리스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제레는 지구의 거짓된 주인인 리리스의 자손인 릴림, 인류가 멸망하는 것이 지구의 원 주인인 아담에게 속죄하고 새로이 태어나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허나 겐도는 이 둘 모두를 없애버려야 인류가 진정한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엔드 오브 에바를 보신 분들은 알다시피 겐도의 이런 복수는 딱히 성공적이지 못했고, 아들 신지와 초호기에 의해 겐도는 몸의 절반이 잘려나가며 죽음을 맞는다. 제레의 속죄나 겐도의 복수, 원한의식으로는 제대로 인류가 자기만의 다음 스탭을 밟을 수 없다는 것을 감독인 안노 히데아키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허나 신지의 경우도 그리 다르지만은 않아 보인다. 사도 퇴치 작전중에 겐도의 아들이자 에바 초호기의 파일럿으로서 수없이 죽을 뻔했고, 또한 반 친구 토오지를 죽일 뻔하고 처음으로 편한 마음으로 친해진, 어쩌면 사랑에 가까울지도 모르는 감정을 가졌던 카오루를 사도라는 이유로 죽여버린 이상 이런 세상과 인간 자체에 대한 원망, 원한의식을 떨쳐버리는 것은 매우 어려 수밖에, 아니 그전에 그냥 자살하지 않은게  만14세 중학생치고는 사실 대단한 정신력이 아닐까.



엔드 오브 에바의 후반부에 결국 초호기가 서드 임팩트를 일으키고, 사람들은 육체 속에 영혼을 가둬두던 마음의 벽 AT필드가 무너져서 어머니 리리스에게로 모여 하나로 융합된다. 신지의 의식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하나로 융합되며 온갖 혼란을 일으키자, 그중 강력한 마음 중 하나는 모두 다 죽어버리라는 감정이었다.

손을 잡아주려고 해도 극도로 거부하는 신지. 유일하게 친구라고 받아줬던 카오루가 사도였다는 배신감 이후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그야말로 극한의 냉소적 허무주의라는 늪에 빠져버린 신지.  생명의 나무가 되어 신과 같은 힘을 가졌음에도, 신지 아버지 겐도처럼 자기에게 고통을 준 세상에 복수하고 싶다는 원한의식에 사로잡혀서 결국 아무런 가치도 창조하지 못하고 노예의 도덕에 끌려가다가 인류 전체가 끝나는 것일까?


니체는 이 장 마지막에 차라투스트라가 춤꾼이지만, 타란툴라같은 춤꾼은 '더 이상' 아니라고 강조했다. 니체 또한 한때는 겐도나 신지처럼 세상에 복수하겠다는 앙갚음, 원한의식의 블랙홀에 사로잡혔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니체는, 이제 신지는 어떤 춤을 추고 싶을까


... 계속.



작가의 이전글 자작 시 - 순대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