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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포쟁이 뚱냥조커 Jul 21. 2019

인문학 두쪽읽기 니체18-에반게리온 스포일러 에세이4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는 짐승


밤의 노래 177-180p

밤이다. 때가 되니 물을 솟구쳐 올리는 우물들이 모두 소리를 높여 지껄여대고 있구나. 나의 영혼 또한 물을 솟구쳐 올리는 우물이다.


밤이다. 이제야 비로소 사랑하는 자들의 노래가 모두 잠에서 깨어나는구나. 나의 영혼 또한 사랑하는 자의 노래다.


내 안에는 진정되지 않은, 진정시킬 수도 없는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이 목청을 높이려는구나. 내 안에는 사랑을 향한 갈망이 있다. 그것이 나서서 사랑의 언어를 속삭이누나.


나는 빛이다. 아, 내가 밤이라도 된다면 얼마나 좋으랴! 나 빛에 둘러싸여 있거니와 그것이 나의 고독이다.


아, 내가 캄캄하다면, 칠흑 같다면 얼마나 좋으랴! 나 얼마나 빛의 젖가슴을 빨려 했겠는가!
저 위에서 반짝이는 작은 별들이여, 그리고 반딧불들이여, 나 너희까지도 축복하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로부터 빛을 받아 복에 겨워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해 나 나 자신의 빛 속에서 살고 있고 내게서 솟아나오는 불꽃을 내 안으로 되마시고 있는 것이다.


나는 받는 자가 누리는 행복을 알지 못한다. 나 자주 훔치는 것이 그냥 받는 것보다 분명 더 복된 일일 것이라고 머릿속에 그려보곤 했지.


나의 손은 베풀기만 할 뿐 쉴 줄을 모른다. 거기에 나의 가난이 있다. 나는 기대에 찬 눈들을 보며 밝게 빛나는 동경의 밤하늘을 본다. 거기에 나의 시샘이 있고.


오, 베푸는 자 모두의 불행이여! 오, 내 태양의 빛을 앗아가는 일식이여! 오, 갈망을 향한 갈망이여! 오, 포만 속에 도사리고 있는 게걸스러운 허기여!


저들은 나에게서 받아들인다. 그렇다고 내가 저들의 영혼에 닿기라도 했을까? 받는 것과 주는 것 사이에는 틈새가 있다. 그리고 가장 작은 틈새가 가장 늦게 다리로 연결되기 마련이니.


나의 작은 아름다움으로부터 허기가 자라난다. 나 내가 빛을 비춰준 바 있는 자들에게 고통을 주고, 내가 베푼 바 있는 자들의 것을 도로 빼앗고 싶구나. 나 이렇듯 악의에 굶주려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손을 내밀기라도 하면 나 내 손을 거두어들이면서, 쏟아져내리면서도 머뭇머뭇거리는 폭포처럼 머뭇머뭇해가며, 나 이렇듯 악의에 굶주려 있는 것이다.


이같은 앙갚음을 나의 충만은 생각해낸다. 그같은 술수가 나의 고독에서 솟아오르는 것이다.


베풂으로서 내가 누리는 행복은 그 베풂 속에서 소멸하고 말았고 나의 덕은 넘치는 풍요로 인해 제 스스로가 지겨워졌으니!


베풀기만 하는 자의 위험은 그가 수치심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데 있다. 나누어주기만 하는 자의 손과 심장은 나누어주는 일 하나만으로도 못이 박힌다.


나의 눈은 더 이상 애걸하는 자들이 느낄 수치심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나의 손은 가득 채워진 손들의 떨림을 느끼기에는 너무나도 굳어 있다.


내 눈의 눈물과 내 마음속의 솜털은 어디로 사라져버렸는가? 오, 베푸는 자 모두의 외로움이여! 오, 빛을 발하고 있는 자 모두의 침묵이여!


많은 태양이 황량한 공간 속에서 돌고 있다. 일체의 어두운 것들에게 빛을 비추어줌으로써 말을 건네고 있지만, 내게는 침묵을 하는구나.


오, 이것이 빛을 발하는 자에 대한 빛의 적의라는 것이다. 빛은 무자비하게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다.


빛을 발하는 자를 마음속 깊이 못마땅해하면서, 다른 태양들에게 냉혹하게 맞서가면서 저마다의 태양은 이렇게 운행하고 있는 것이다.


폭풍과도 같이 태양들은 자신들의 궤도를 날아간다. 이것이 저들이 하는 운행이다. 저들은 저들의 가차없는 의지를 따른다. 이것이 저들이 지니고 있는 냉혹함이라는 것이다.


오, 캄캄한 자들이여, 칠흑같은 자들이여, 너희가 비로소 빛을 발하는 것에서 따스함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오, 너희가 비로소 빛의 젖가슴에서 상쾌한 기운을 빨아들이는 것이다.


아, 얼음이 나를 둘러싸고 있고 내 손은 얼음장 같은 것에 화상을 입고 있구나! 아, 내 안에는 갈증이 있어 너희의 갈증을 애타게 사모하고 있구나!


밤이다, 아, 내가 빛이어야 하다니! 그리고 칠흑 같은 것에 대한 갈증이여! 그리고 외로움이여!
밤이다. 때가 되니 나의 열망이 내게서 샘물처럼 솟아오른다. 입을 열고자 하는 열망이 나를 덮치고 있는 것이다.


밤이다. 때가 되니 물을 솟구쳐 올리는 우물들이 모두 소리를 높여 지껄여대고 있구나. 나의 영혼 또한 물을 솟구쳐 올리는 우물이다.


밤이다. 이제야 비로소 사랑하는 자들의 노래가 모두 잠에서 깨어나는구나. 나의 영혼 또한 사랑하는 자의 노래렷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이전 글에서 니체는 평등이 정의라면서 앙갚음, 원한의식으로 가득찬 자들을 죽음을 퍼뜨리는 독거미 타란툴라에 비유하면서 통렬히 비판했다. 허나 니체 자신 또한 한때는 그런 원한의식으로 가득했었고 타란툴라 춤을 추는 춤꾼이었지만, 이제 더이상 그런 춤은 추지 않겠다고 마지막에 언했다. 그러면 이제 차라투스트라는 어떤 춤과 노래를 할 것인가.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에겐 진정될 수 없는, 막을 수 없는 내면의 소리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사랑, 사랑받고 싶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다. 이전에 1부에서도 니체는 베푸는 덕이야말로 최상의 가치라고 찬양한 바가 있지 않던가. 허나 이 베품은 흔히 기존 종교에서 말하는 선행이나 자비와는 결을 달리 한다. 오히려 니체는 빛을 따라가고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바로 빛이며, 이 빛은 무자비하게 제 갈길을 간다고 말한다. 각자의 태양은 서로 운행 궤도를 달리하며, 이것이 바로 태양들의 냉혹함이다. 이런 냉혹함을 지닌 캄캄한 존재들이 바로 스스로 빛을 내는, 자신을 극복하고 가치를 창조하는 위버멘쉬에 가까워진다고 차라투스트라는 주장한다. 그렇기에 밤이야 말로 낮은 우물에서 물을 퍼올리는 영혼들이 노래를 부르는 시간인 것이다.


 허나 이 사랑을 주는 것과 받는 것 사이에는 틈새가 있다. 그리고 가장 작은 틈새가 가장 늦게 다리로 연결된다고 니체는 말한다. 인간은 위버멘쉬에 이르는 다리라고 니체가 말한 것을 상기한다면, 사람의 마음과 마음 사이에 생기는 가장 사소한 오해와 편견이 바로 인간이 위버멘쉬가 되는 최대의 장애물이라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한계라고 니체가 말한게 아닐까. 니체 뿐만 아니라 수많은 예술가와 시인들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틈새에 대해 노래한 바 있다. 대표적으로 너무나 유명한 정현종의 시 섬이 있을 것이다.







  섬    /    정현종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이 시를 이렇게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는 것은, 각자의 사람이 바로 바다라는 것을 암시한다. 섬은 바다에 떠 있는 존재니까. 나 바다는 태평양과 대서양이 그렇듯이 각자가 너무나 넓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자기인지도 알기 어려운 정도로 크고 넓은 존재이다. 그래서 각자의 바다는 서로의 경계를 확인하고 만나기 위해선 섬이라는 틈새가 필요한 게 아닐까. 그 섬에 가고 싶다는 것은 사실 타인을 만나고 접촉하고 사랑하고 싶다는 인간이 품은 보편적 욕망의 우회적 표현인게 아닐까.



 에반리온 구 극장판, 엔드 오브 에바의 피날레 부분에 자아의 경계가 없어지고 서로 영혼이 융합되는 서드 임팩트를 체험하는 신지의 마음 마치 차라투스트라가 밤의 깊은 우물에서 물을 퍼올려 노래를 부를려고 는 마음이 아닐까. 인간의 마음 밑바닥에 있는 앙갚음같은 악의, 거기에서 자신의 빛을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성장, 니체적 표현으론 인간에서 위버멘쉬로, 어린아이에 이르는 과정인 것이다. 품 중에 지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대놓고 니체의 정신의 세 단계 변화 낙타 사자 어린아이에서 어린아이 개념을 연상시키는, 놀이터에서 모래로 성을 만들고서 부쉈다가도 울면서 다시 모래를 만지며 노는 연출을 보여준다. 이는 에반게리온이 니체의 모티브에서 영향받았음을 밝히는 노골적인 안노 히데아키의 의도는 아니었을까.



신지는 작중에서 힘든 성장 환경을 거쳐왔음에도 아버지 겐도를 이해하려 했고 레이와 아스카를 동료로 친해지려고 했고 카오루를 마음깊이 받아들이려 했으나 현실은 비극적인, 너무나 비극적인 한계들에 부딪치고 말았다. 그래서 타인을 상처입히고 죽이면서까지 에바에 타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나은 것 아니겠냐고 자신의 동료이자 보호자이기도 했던 미사토에게 묻게 된다.



하지만 미사토는 자신도 어린 시절 수많은 시행착오속에서 헛된 기쁨과 자기혐오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럴 때야말로 자신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던 게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들었다고 신지에게 조언해준다. 아니 사실 조언은 너무 부드러운 표현이고 사실상 자신의 신념을 방금 죽을 뻔한 신지에게 강요한 것이나 다름없다. 마치 태양이 각자의 궤도로 운행하며 빛을 내듯이. 그리고 다른 태양에게는 냉혹한 시선을 던지듯이.



목숨걸고 신지를 구하러 와주고 자신의 방식으로 위로해 준 미사토 덕분에 신지는 아주 조금이지만 힘을 내서 에바에 탈 수 있었다. 이런 미사토의 마음을 과연 사랑이라는 감정 이외에 다른 언어로 더 적합한 표현을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미사토 이전에도 사실 신지는 사랑을 주고 받는 경험을 짧았지만 스쳐간 적이 있다. 카오루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지를 좋아한다고 말해주고 심지어 신지를 위해서 사도인 자신의 정체성과 생명마저 포기하고 희생했다. 이를 사랑이라 부르지 않으면 과연 어떤 것을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이것으로 인해 신지는 극도의 무기력에 빠질 정도로 힘들어했다. 나기사 카오루 또한 다른 태양과 다른 궤도를 돌면서 냉혹하리만큼 자신의 빛을 내는 태양이었던 것이다.



이런 사랑의 체험이 있었기에 처음에는 극도의 허무주의로 다 죽어버리리고 말하던 신지는 마지막에 마음을 바꿀 수 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머리말에서 자신도 길동무가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신지에게는  바로 미사토와 카오루라는, 자신을 사랑해 준 길동무가 있었던 것이다. 다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마음의 벽 Alsolute Terror Field, 타인이라는 지옥같은 공포가 생긴다고 할지라도, 시간을 들이면 사람이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 조그만 상상력의 도박에 신지가 배팅을 한 것은 미사토와 카오루의 베풀어  사랑이 아니었다면 절대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는 짐승' 에반게리온 티비판 마지막 26화의 제목은 할란 앨리슨의 SF소설 제목을 빌려왔다. 이 마지막 화는 신지와 미사토 아스카 등의 주요 캐릭터의 내면을 깊이 들어가면서 사실 모두가 마음깊이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화이다. 그리고 구 극장판 엔드 오브 에바의 파이널 씬 제목 take care of yourself. 즉 자기 자신을 아끼고 배려하라는 이 말은, 신지만이 아니라 에반게리온의 모든 독자에게 감독 안노가 보내는 메시지가 아닐까.


다음 글이면 드디어 에반게리온 스포일러 에세이도 마지막일 듯하다. 이번 글에서는 주로 신지와 미사토 카오루의 관계에 대해서 다루었고, 마지막으로는 역시 신지와 떼어서 생각 할 수 없는 캐릭터인 아스카와 신지에 대해서, 특히 엄청난 논란을 발생시킨 구 극장판의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 나름 니체적으로 해석을 접근해보기로 하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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