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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포쟁이 뚱냥조커 Aug 08. 2019

인문학 두쪽읽기 니체27-이상한나라의앨리스와 고양이

니체는 왜 고양이를 싫어했을까

때묻지 않은 깨침에 대하여 206-207p

 

어젯밤, 떠오르는 달을 보면서 나는 그가 태양을 낳으려나 보다 하고 생각했었다. 달은 그토록 만삭이 된 배를 한 채 수평선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만삭,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달이 나를 속인 것이다. 나는 달이 여인이 아니라 사내일 것이라고 믿고 싶다.

물론, 몹시 수줍어서 밤에만 돌아다니는 이 몽상가는 그다지 사내답지가 않다. 진정, 면목없어 하면서 지붕 위를 이리저리 거닐고 있지 않으니.

달 속의 저 수도사는 음탕하고 시샘이 많으며, 이 대지와 사랑하는 자들이 누리는 온갖 즐거움을 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다. 나는 지붕 위를 기어다니는 저 수코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반쯤 닫혀 있는 창 주변을 살금살금 기어다니는 것들은 하나같이 역겹다!

그는 경건하게 그리고 조용조용 별들로 총총한 양탄자 위를 거닌다. 그러나 나는 박차 소리조차 내지 않고 살금살금 다가오는 사내들의 발소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정직한 자는 발소리를 죽여가며 걷지 않는다. 그런데 저 고양이, 대지 위를 살금살금 소리없이 걸어가고 있지 않은가. 보라, 달이 저 쪽에서 고양이처럼 눈치를 보아가며 다가오고 있으니.

이 비유를 나 너희 성마른 위선자들에게 들려주는 바다. “순수한 깨침에 이르렀다는” 너희에게 말이다! 나 너희를 되레 음탕한 자라고 부르련다!

너희 또한 이 대지와 지상의 것을 사랑하고 있다. 나 너희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너희가 하고 있는 사랑 속에는 수치심이 있고 양심의 가책이란 것이 있다. 달을 닮아 그런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의 정신을 설득하여 지상의 것을 경멸하도록 해왔지만 너희 오장육부까지 설득하지는 못한 것이다. 너희에게서 가장 강한 것이 바로 오장육부 아닌가!

그리하여 너희의 정신은 너희의 오장육부의 뜻에 따르면서도 그 수치심을 견뎌내지 못하고 뒷길로, 거짓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내게 있어 더없이 이상적인 것은 혀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는 개와 달리 아무 욕망 없이 생을 관조하는 것이리라.” 거짓말을 잘도 하는 너희의 정신은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의지를 죽이고 자기중심적인 음모와 탐욕에서 벗어나 관조 속에서 행복해 하는 것이요, 몸은 차갑고 잿빛이지만 취기 어린 달의 눈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나에게서 더없이 좋은 것은 달이 이 대지를 사랑하듯 이 대지를 사랑하고 눈길로써만 그 아름다움을 더듬는 것이리라.“ 유혹당한 자는 이렇게 자신을 유혹한다.

“그리고 백 개의 눈을 지닌 거울처럼 사물 앞에 드러누울 뿐 그 사물들로부터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때, 그런 것을 나는 온갖 사물에 대한 때묻지 않은 깨침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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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8일 세계 고양이의 날에 우연히도 니체가 고양이에 대해 말하는 구절을 읽었다. 아쉽게도 니체는 나처럼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자기 멋대로고 변덕스럽고 어디로 튈 지 모르는 고양이는 그 자체로 나같은 사람에겐 매력으로 다가오지만 니체에겐 그것이 순수한 체하면서 음탕한 자들에 불과하다고 달에 비유하면서 비판한다.



이런 니체가 비판하는 고양이스러운 속성에 대해 자세히 다룬 매체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고양이일 것이다. 몸이 없이 머리만 나오기도 하며, 아에 사라졌다가 순간이동을 하듯이 확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길을 헤매는 앨리스에게 갑자기 와서 의외의 깨우침을 주기도 하는 신비로운 존재다.



심지어 이 앨리스의 챗셔 고양이를 가지고 서프라이즈에 나온 것처럼 한 물리학자는 물리학 이론을 만들기도 했다.  이미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이 상자 속에 고양이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안 존재하는지는 상자를 열어보아야만 알 수 있다는 모순적으로 들리는 이야기는 과학 상식이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니체로서는 아마 이런 고양이의 모순적인 특성을 좋게 봐주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순수한 인식을 추구하는 자들은 그들의 마음과는 달리 그들의 오장육부를 배반할 수 없다고, 즉 신체의 욕망을 배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비꼬았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난 이번 글에서는 니체에게 반기를 들어보고 싶어진다. 니체는 태양을 사랑하기에 자연스레 달을 태양의 반대항으로 놓고, 여인을 사랑하기에 수코양이를 여성. 즉 니체에게 진리의 반대항으로 놓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니체가 끝없이 말해왔던 것은 자기 자신을 극복해서 자기만의 가치를 창조하라는 것이 아니었던가. 앨리스가 끝없이 저 원더랜드를 헤매면서 자기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것처럼, 우리도 저 빛나는 태양만이 아니라 달을 보며 새벽에 달려보기도 하고 이름도 모르는 수코양이를 쫓아가보기도 하면서 자기 자신을 찾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달을 따라가보든 수코양이를 따라가보든 심지어 니체가 비판하는 순수한 깨침을 얻으려고 노력해보는 것도 단순히 잘못된 것은 아니지 않을까. 이와 관련해서 난 10대 고등학교 시절에 윤리와 사상 선생님께 바보 호떡먹기라는 일화를 배운 것을 떠올린다. 옛날 마을에 한 바보가 배고파서 호떡을 먹으러 가니 다섯 개의 호떡을 먹고나서 배가 불렀는데 갑자기 후회가 막심했다고 한다. 왜 후회를 하냐고 옆에서 물어보니 자기가 다섯번째 호떡을 먹고 배가 불렀으니 이 다섯번째 호떡만 먹었으면 되는건데 바보같이 그전에 호떡을 네개나 먹었다고 돈이 아깝다고 후회했다는 것이다.


니체도 이번 글에선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한 것은 아닐까. 물론 우리는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만 아는 것은 아니다. 직접 경험을 해보기 전에도 알기 위해 이론과 공부가 존재하니까. 하지만 그 이론이 정립되기 위해선 수많은 실패, 시행착오의 체험이 필수적인 것이다. 그리고 인생은 수학과는 달리 더더욱 많은 실패가 아니면 배울 수가 없다. 니체 또한 다른 글에서 자신도 젊은 적 데카당스, 퇴락과 허무주의의 아이였다고 고백한 바 있지 않던가. 결국 중요한 것은 앨리스의 질문에 고양이가 답해준 것처럼. 어떤 길을 가든 꾸준히 포기하지 않고 계속한다는 것이리라. 그래서 나도 딱히 맘에 쏙 들지 않아도 오늘도 이 글을 써서 올린다. 벌써 글을 매일 쓴지 60일이 지났다. 다음달에 100일을 채우는 그 날이 오면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해서 조그만 축배를 들서 니체처럼 웃어보리라.


다음 글에서는 원래 예정대로 아이언맨1편과 니체의 먼 이웃을 사랑하라는 글에 대해서 다룰 예정이다. 그럼 이만 오늘도 안녕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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