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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포쟁이 뚱냥조커 Aug 24. 2019

인문학 두쪽읽기 니체35-신암행어사 리뷰1 통수치기

나쁜 놈들은 상상을 초월해서 뒤통수를 친다... 그러면?

세상살이를 위한 책략에 대하여 240-244p


(니체 전집 번역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다수 인용 및 필사함.)

 

무서움에 떨게 하는 것은 산정이 아니라 산비탈이다!

눈길은 아래로 떨어지고 손은 위를 향해 내뻗는 그런 비탈 말이다. 이럴 때 마음은 이 이중 의지로 인해 현기증을 일으킨다.

아, 벗들이여. 너희는 내 마음속에 있는 이중의 의지 또한 제대로 헤아리고 있겠지?

나의 눈길은 산 정상으로 치닫고, 나의 손은 심연을 움켜잡고 몸을 지탱하려 한다. 이것이 나의 비탈이자 위험이다!

나의 의지는 인간에게 달라붙고, 나 사슬로 내 자신을 인간에게 묶어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위버멘쉬를 향해 위쪽으로 낚아채이고 말 것이다. 내게 또다른 의지가 있어 저 위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 장님이 되어 뭇사람 틈에 살고 있는 것이다. 저들이 누구인지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체하면서, 나의 손으로 하여금 뭔가 확고한 것을 잡고 있다는 믿음을 아주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나 너희 인간들을 모른다. 이 어둠과 위로가 때때로 내 주변에 퍼져 있다.

나는 온갖 악한들이 오가는 성문 길가에 앉아 묻는다. 누가 나를 속이려 하는 것이지? 하고.

나 나를 속이도록 내버려둔다. 속이려 드는 자를 따로 경계하지 않기 위해서인데, 이것이 세상살이를 위한 나의 첫 번째 책략이다.

아, 내가 사람들을 경계한다면, 어떻게 저들이 나의 기구를 잡아두는 닻이 될 수 있으랴! 그런 닻이 없다면 나 너무나도 쉽게 저 위로 떠오르고 말 터인데!

조심조심하는 일 없이 존재해야 한다는 섭리가 나의 숙명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 틈에서 허기와 갈증으로 죽지 않으려면 그 어떠한 잔으로든 마실 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 틈에서 깨끗함을 잃지 않으려면 더러운 물로 자신을 씻을 줄도 알아야 한다.

나 위로 삼아 자주 이렇게 말했다. “좋다! 자! 노회한 마음이여! 너는 불운 하나를 면했다. 그러니 그것을 너의 행운으로 받아들여 즐기도록 하라!”

세상살이를 위한 나의 또다른 책략은 이것이니, 나 긍지에 차 있는 사람보다는 허영심에 차 있는 사람들에게 너그럽다는 것이다.

상처 난 허영심이야말로 모든 비극의 어머니가 아닌가? 이와 달리 긍지가 상처받으면, 그곳에서는 그 긍지보다 더 좋은 것이 자라나기 마련이다.

생이 보기에 좋은 것이 되려면 생의 유희가 멋지게 연출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훌륭한 배우가 있어야 하고.

나는 허영심에 차 있는 사람 모두가 뛰어난 배우라는 것을 발견했다. 저들은 연기를 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즐겁게 보아주기를 바란다. 저들의 정신이 한결같이 갈망하는 것이 그것이다.

저들은 손수 연출을 하며, 자신을 꾸민다. 나 저들 가까이에서 생을 바라보기를 좋아한다. 그것이 우울한 심사를 달래주기 떄문이다.

저들이 나의 우울을 치유하는 의사가 되어주고, 나로 하여금 연극에 집착하듯 사람들에게 집착하도록 하기 때문에 나 허영심에 차 있는 자들에게 너그러운 것이다.

그렇다면 그 누가 허영심에 차 있는 사람의 그 겸손의 깊이를 속속들이 가늠하랴! 나 그 겸손 때문에 허영심에 차 있는 자에게 호감을 갖고 있으며 연민의 정을 느끼고 있거늘.

허영심에 차 있는 자는 너희의 도움으로 자신을 얻고자 한다. 그런 자는 너희의 눈길로 살아가며, 너희 손에서 나오는 찬미로 배를 채운다.

너희가 짐짓 듣기 좋은 말을 늘어놓기라도 한다면 그것이 비록 거짓말일지라도 그런 자는 그것을 믿는다. 그런 자는 “나 도대체 무엇이지!”하고 가슴 깊이 탄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유덕하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덕이라면, 좋다. 허영심에 차 있는 자도 자신의 겸손을 알지 못하니!


...










/








니체는 항상 위버멘쉬, 자기를 극복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인간 이상의 존재를 주장했기에 그런 자기 주장의 위험성도 인식하려 한다. 그렇기에 진정 위험한 것은 산 정상이 아니라 산비탈이라고, 눈은 정상을 향해서 위를 보아야 하지만 손은 대지 아래의 심연을 붙잡아야만 하는 이 이중의 의지가 작동하는 산비탈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대지의 심연을 붙잡으려다 보면 세상의 온갖 악한들과 마주치지 않을수 없으리라.

악한들이 가득찬 이 험난한 세상살이를 위해서 이번 글에서 니체는 두 가지의 책략을 제시한다.


첫번째는 나를 속이려 드는 자를 따로 경계하지 않기 위해서 나를 속이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며, 두번째는 긍지에 차 있는 사람보다 허영심에 차 있는 사람에게 너그러워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언뜻 보아서는 과연 이런게 책략인가 세상살이를 위한 지혜라고 볼 수 있는건지 의심스럽다. 니체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설마 호구처럼 사기를 당해주고 남이 온갖 허영심으로 거짓말을 하더라도 다 너그럽게 참아주라는 말일까?  니체의 이 수수께끼같은 책략에 대해서 온몸으로 잘 표현해주는 캐릭터, 아니 배우가 바로 신암행어사 초반부의 주인공 박문수 아닐까.



초반에 몇개 안되는 컷인데도 여기서 문수는 자기의 3류 악당스러운 존재감을 충분히 드러낸다. 어린애에 불과한 촌장의 아들을 자기 손으로 직접 끝장낸다고 총을 들기도 하고, 누가봐도 영주의 횡포에 당해서 감옥에 갇힌 촌장에게 다른 악당들이 몹쓸 짓을 하려고 하자, 이를 말리긴 커녕  똥물에도 파도가 있다면서 다른 악한들을 내보내고 자기가 먼저 나쁜 짓을 저지를듯한 태세를 보여준다.


 이는 사전정보없이 1화부터 봐왔다면 작중 인물들은 물론이고 작품 밖의 독자들마저 깜박 넘어갈만한 연기다. 바로 이런 모습이 니체가 두번째 계략에서 말한 허영심에 차 있는 자들에게 너그러워지는 뛰어난 배우가 아닐까. 이렇게 선한 이 뿐만이 아니라 악한들마저 속여넘길 정도로 뛰어난 연기로 악한에 대항해야 한다고 니체는 말한게 아닐까.



인간은 언제 절망할까. 절망 중에서도 가장 큰 절망은 언제 느낄까. 그것은 바로 미래에 대한 기대, 희망을 가졌다가 그 희망이 부서졌을때 인간은 절망한다. 기대와 희망이 크면 클수록 그 절망의 골짜기는 한도 끝도 없이 더욱 깊어진다. 그래서 영주는 하나의 계략으로 암행어사가 정의를 집행한다는 소문을 풀었고, 사람들은 그 희망에 기대다가 젊은 나그네가 암행어사가 아니라 자신들을 속이고 억압한 영주라는 현실에 엄청난 절망을 맛보게 된다. 문수가 나타나기 바로 직전까지 말이다. 이런 악한들에 대항하기엔 단순히 선이니 정의감이니 하는 정신이 아니라 니체가 말하듯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잔으로든 물을 마실 줄 알아야 하고, 아군마저 속일 수 있는 뛰어난 연기와 책략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사실 문수는 이렇게 마을에서 부두목으로 악당 행세를 하면서 정보를 모으고 있었고, 누가 악덕 영주인지 확실한 정보를 알게 되자 마침내 그 정체를 드러낸다. 마치 그동안 악한들에게 속아준 것을 갚아주기라도 하는 듯이. 니체가 첫번째 계략으로 말한 자기를 속이도록 내버려두고, 더러운 물로도 자기를 씻을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 바로 이러한 면모가 아닐까?악당이 자기 정체를 속일지라도 속아주는 척 하면서 그의 뒤통수를 제대로 칠 기회를 노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문수가 단순히 악당을 속이고 박살내는 걸 즐기는 또다른 악당이 아니라 영웅인 이유는, 이런 책략을 쓰면서도 결코 자기 몸만 아까워하며 부하를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를 미끼로 쓰면서까지 온몸을 다해 악한들과 싸운다는 점에 있으리라. 캡틴 아메리카같은 전형적인 영웅의 형상과는 또 달리, 일종의 다크히어로나 안티 히어로의 모습을 보이는 암행어사 박문수. 니체가 말했던 세상살이를 위한 책략이란 이렇게 악한들과 맞서면서 스스로를 극복하려는 자를 위해서 남기는 지혜가 아닐까.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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