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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서에 흔히 등장하는 '자신의 성장과정을 서술하시오.'라는 항목은 지겹지 않으래야 않을 수 없는 질문이죠.
화목한 가정에 몇남 몇녀 몇째로 태어나.. 어쩌고... 면접관들이 거들떠도 보지 않을 답변을 구구절절 적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사실 어릴 적부터 거짓말에 능했습니다.
조모님과 부모님, 그리고 남동생 사이에서 K-첫째로서의 의무를 다 하기 위해 자라왔던 것 같습니다. 형편은 좀 어려웠어도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만큼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으나 아쉽게도 그 사랑을 받은 만큼 무럭무럭 키가 크지는 못 했네요.
아무튼, 왠지 모를 K-첫째의 책임감과 사명감에 젖어 가족들에게 기쁨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거짓말이어도 듣기 좋은 말, 예쁜 말만 골라했습니다. 의외로 코가 길어지지 않더라고요. 콧대가 조금은 높아져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이것도 아쉬운 점이네요.
거짓말에 익숙해지는 것의 단점은 정작 진심을 다해 해야 할 말을 하기가 두려워진다는 것이죠.
이를테면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 같은 말들이요. 고마워도 내가 받는 게 당연한 척, 미안해도 당당한 척, 사랑한다는 말은 생각만 해도 부끄러워서 다른 번지르르한 말들로 포장했습니다. 진심을 뱉는 게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 쉬운 일임을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앞줄에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조모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제가 기억이 없던 아주 어린 시절부터요. 그리고 기억이 나는 순간부터 25살이 될 때까지 꽉꽉 채운 추억과 함께했습니다. 할머니는 여느 어르신들처럼 이제 죽어야지, 죽을 때가 됐다. 는 말을 달고 사셨는데 그때마다 눈물을 훔치는 어린 제 모습을 보고 그게 좋아서 일부러 더 하셨더랬죠. 할머니가 옆에 없을 날을 생각하면 너무 슬퍼져서 눈물이 절로 났더랬지만, 이후엔 할머니가 울어! 하면 우는 파블로프의 개가 되었습니다. 그저 할머니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어요. 나중엔 심지어 나 눈물 연기가 좀 되네? 하는 생각까지도 했습니다. 불효자는 웁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서 목에 걸려있던 모든 글자와 말들이 튀어나왔습니다. 그제야 사랑한다는 말을 거짓 없이 뱉을 수 있었어요. 제페토 할머니가 코 짧은 피노키오를 인간으로 만든 순간입니다.
제 거짓말 능력은 사회생활을 시작함으로부터 빛을 발했습니다. 사회는 왜 이리 모질고 비바람이 몰아치는지,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이 나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진심을 뱉을 줄 아는 사람이 되자 가면을 쓰고 벗는 것이 자유로이 가능한 능력치+1을 얻었습니다. 그 말을 꺼내고 스스로 듣는 기분 또한 +1 이 되더라고요.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면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부러 진심을 표현합니다. 뭐든 처음이 어렵다고, 뱉어 보니 이렇게 쉽게 너도 나도 기분 좋아질 수 있는 가성비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강력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