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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미루기의 달인입니다. 정말로.
미루기에 대한 재능은 타고난 것 같습니다.
어릴 때부터 숙제는 항상 마감 직전에 했고, 방학일기 몰아 쓰기는 기본이요, 대학교 과제는 밤샘의 예술품이었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미루기의 단계를 설명해 보자면, 일단 1단계는 "아직 시간 많아"입니다. 할 일이 생기면 머릿속으로 대략적으로 계산을 해보죠. 마감까지 2주? 충분해. 1주일? 여유롭네. 이 단계에서는 평온합니다. 세상이 아름답고 모든 게 가능해 보이죠.
2단계는 “내일부터 시작하자” 단계입니다. 이제 슬슬 압박감이 느껴지지만 아직 여유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속으로는 완벽한 계획을 세우거든요.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차근차근해나가겠다고. 근데 내일이 오면? 역시나 내일의 저에게 일을 미룹니다. 이 상태가 며칠 반복됩니다.
3단계는 “이제 좀 위험하네” 단계입니다. 마감까지 코 앞에 다가왔는데도 시작은커녕, 조금씩 밀려오는 불안감을 깔고 눕습니다. 다른 일들을 하면서 머릿속 한구석에선 계속 그 일이 맴돌죠. 근데 신기하게도 아직도 시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불안감을 달래려고 다른 일들을 더 열심히 합니다. 집 청소를 한다든지, 갑자기 독서를 한다든지. 그 일을 제외한 모든 일이 재미있어집니다.
4단계는 “진짜 위험하다” 단계입니다. 이젠 진짜 물리적으로 시간이 얼마 안 남았음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직 하루 남았으니까”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죠. 이 단계에서는 스트레스가 최고조에 달하지만, 동시에 아드레날린도 분비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5단계, “지금 안 하면 죽는다” 단계입니다. 마감 코앞이죠.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습니다. 드디어 시작이란 걸 해봅니다. 신기한 건, 이때가 되면 집중력이 엄청나게 높아집니다. 평소 같으면 몇 시간 걸릴 일을 30분 만에 끝내기도 합니다. 아마 뇌가 생존 모드로 전환되는 것 같아요.
미루기는 건강에 좋지 않은 것이 확실합니다. 마감에 쫓기는 마음과 그렇게 발생되는 스트레스는 저 자신을 괴롭게 합니다. 하지만 마감에 쫓기면서 나오는 그 집중력과 창의력도 무시할 수 없죠. 사람들은 “미리미리 해두면 여유롭게 할 수 있잖아”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미루기의 달인인 저에게는 그런 여유로운 상황에서 오히려 집중이 어렵습니다. 물론 모든 일을 미루는 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일이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일은 미루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혼자 하는 일이나 개인적인 일들은… 제 안에 의지라는 놈이 도저히 말을 듣지 않네요.
가끔은 계획적으로 차근차근하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엔 결국 중요한 건 결과물입니다. 미루든 안 미루든, 해야 할 일을 결국 해내면 되는 거 아닐까? 물론 과정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그냥 미루기의 달인이 치러야 할 대가라고 생각하도록 하죠.
앞으로도 저는 미루기의 달인으로 살아갈 것 같습니다. 이 글도 사실 며칠 전부터 써두려고 했지만 지금에야 쓰고 있으니까. 역시 달인은 달인으로 남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