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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서가 깜빡입니다. 1초에 한 번씩, 규칙적으로. 마치 시계추처럼 시간을 재고 있는 것 같아요. 빈 문서 위에서 홀로 깜빡이는 그 작은 세로선이 오늘따라 유독 도발적으로 보입니다. '뭐라도 써봐' 하고 속삭이는 듯이요.
이것이 작가들의 괴로움일까요. 그들의 발 끝에도 못 미치는 존재이지만 조금이나마 그들의 마음에 공감을 해봅니다. 매일 글을 쓰는데 매일 뭐 할 말이 그렇게 많겠어요?
'써야 한다'는 강박과 '쓸 게 없다'는 현실 사이에서 오늘도 줄타기를 합니다. 평소라면 스쳐 지나갔을 사소한 것들까지 뒤져보게 되죠. 아침에 마신 커피가 너무 뜨거워서 혀끝이 얼얼했던 것, 지하철에서 본 광고 문구, 친구가 보낸 의미 없는 메시지. 이런 것들마저 소재가 될까 싶어 생각하다 금세 포기하고 맙니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어떤 화려한 실패가 아닌 바로 이것일지도 몰라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순간. 머릿속이 텅 비어있다는 느낌. 마치 우물을 들여다봤는데 바닥이 말라붙어 있는 것을 발견한 기분이랄까.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 상황 자체가 이미 하나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더라고요. 창작자라면 누구나 겪어봤을 이 막막함, 이 공허함 말이죠. 영감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며 천장을 바라보던 시간들, 키보드 위에서 맴도는 손가락들,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로 하루를 마감하는 밤들.
어쩌면 항상 무언가 거창하고 특별한 소재를 찾으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을 뒤흔들 만한 통찰이나, 누구도 생각해보지 못한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없지만 글쓰기의 진짜 마법은 평범함을 특별하게 만드는 데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국 글쓰기란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일이니까요. 침묵에서 목소리를 찾아내는 일. 그리고 때로는 '쓸 게 없다'는 그 자체가 가장 솔직한 글이 되는 일.
지금 이 순간, '쓸 게 없다'라고 고민하면서 동시에 그 고민에 대해 쓰고 있는 저는 모순적이지만 묘하게 위안을 받습니다. 빈 종이 앞의 막막함조차 누군가에게는 공감되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으면서요.
커서는 여전히 깜빡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깜빡임이 재촉하는 것 같진 않네요. 오히려 저의 고민과 함께 호흡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오늘은 또 뭘 쓸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쩌면 질문 그 자체 안에 이미 들어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