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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Jun 23. 2023

분노의 무게

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를 읽고

분노할 일이 참 많은 요즘이다.


각종 흉악 범죄는 물론이고 정치인들의 비리, 연예인들의 인성 논란, 집단 이기주의, 소수자 혐오, 온갖 악플과 자살… 하루가 멀다 하고 인터넷에서는 새로 조리돌림 당할 먹잇감이 던져지고, 사람들은 저마다 편을 나누어 시시비비를 따지느라 야단이다. 나는 사소한 일에 죽일 듯 달려드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의 삶의 동력은 분노가 아닐까 생각했다. 나도 괜히 휩쓸려 뉴스에 나오는 범죄자를 향해 돌멩이 하나 던졌다가, 이내 공연히 감정낭비 하기 싫어 신경을 끄곤 했다. 가끔은 이런 시대에 내 세상은 평화롭다는 것에 대해 안일한 안도감과 의아함을 동시에 느끼곤 한다. 어쩌면 내 주변에도 범죄자가 잠재하고 있지만, 단지 내가 무심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지금껏 내 세상에 딱히 악인은 없었다. 덕분에 아직 꽃밭 속에서 살고 있는 나는 성선설을 믿는다. 갓 사회인이 되었을 때, 회사에서 만난 언니 오빠들은 조금만 더 나이 먹으면 내 생각이 바뀔 거라 했었다. 이제는 내가 그 때의 언니 오빠들의 나이를 넘겼지만 아직 내 시선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모든 사람들이 다 한때는 선했는데 살다 보니 유독 악해지거나 사리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멍청해졌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악인과 선인이란 흑백 바둑알처럼 뚜렷히 구분되어 있는 게 아니다. 끔찍한 짓을 저지른 흉악범이라도 그의 생애가 전부 악행으로만 점철되어 있진 않을 것이다. 어릴 때 학교에서 성범죄는 생판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이나 이웃 등 면식범에 의해 가장 많이 일어난다고 배웠다. 주변인들을 조심하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 말에 나는, 범죄자들도 누군가의 가족이나 친구라는 사회적 역할이 있었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범죄는 저지를만한 악인이 저지르게 되는 것일까, 평범한 사람이 어쩌다 우발적으로 저지르게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선인과 악인을 구분 짓는 경계는 무엇인가. 나는, 내 주변 사람들은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없는 선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만 굳이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분노하는 게 더 편하다. 뉴스 기사 한 조각마다 저 사람이 저런 행동을 하게 된 배경이나 경위를 생각해볼 여유가 없다. 아마 그 역시 나만큼 입체적이고 다면적인 사람이겠지만, 어쩌면 그에게도 나름의 동기나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저 처죽이고 싶은 범죄자로 인식될 뿐이다. 화난 우리는 쉽게 그 범죄자를 사형 시키자고 주장하지만, 실제 선고되는 형벌은 피해자가 받은 고통과 우리의 분노에는 항상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다보니 괜히 판사마저 한통속인 것처럼 느껴져서 미처 해소되지 못한 분노의 일부를 돌리기도 한다. "제 자식이 당했어도 이런 판결을 내렸을까!" 하는 판사의 공정성에 대한 의심이 매 흉악사건 때마다 제기된다. 하지만 판사는, 아마 제 자식이 당했어도 그런 판결을 내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책 <어떤 양형 이유>는 범죄에 단순히 분노하기만 할 수 없는, 무거운 책임과 역할을 가진 판사라는 직업에 대한 에세이이다. ‘양형(量刑) 이유’란 형사판결문 말미에 공소사실에 대한 법적 설시를 모두 마친 후 이런 형을 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히는 부분으로, 딱딱하고 엄격한 판결문에 미처 담지 못한 판사의 생각을 그나마 담을 수 있는 곳이다. 저자인 박주영 판사는 본인이 형사재판을 하면서 만났던 사건들의 양형 이유 일부와, 거기에도 미처 눌러담을 수 없었던 많은 감정들을 이 책에 담았다. 그가 부산지방법원, 울산지방법원, 대전지방법원 등에서 형사 재판을 다루면서, 또 부산가정법원에서 소년재판을 담당하면서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느낀 감정들이다.


그가 만난 사건들은 다양하다. 가정 폭력, 성폭력 사건, 산업 재해, 소수자 혐오, 소년범, 무고죄… 온갖 이유로 법정에 선 자들의 절규와 원망, 그 속에서의 번민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이에 더불어 판결을 내리는 자로서의 무게와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고뇌까지. 그 중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해 참담한 심정을 담은 부분이 바로 소년범에 대한 단락이었다.


처음 소년범들을 대면한 그는 아이들의 순진한 눈망울과 반성하는 태도에 진심으로 그들을 걱정하고 선처해주곤 했다. 그렇지만 그 아이들은 교화되기는 커녕 재범하여 다시 재판장에 출석하기 일쑤였고, 그는 그들을 보며 슈렉에 나오는 ‘장화 신은 고양이’를 떠올렸다. 그 아이들의 불쌍한 표정과 반성하는 태도가 장화 신은 고양이의 가식적인 눈망울과 겹쳐보였다. 배신감과 무력감에 처음의 의욕이 꺾인 그는 아이들을 교화시키는 것을 포기하고 재판을 대충 빨리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치워가는 재판 뒤에는 공허함과 찝찝함이 그를 괴롭혔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는 아이들이 삐뚤어지기까지 오랜 세월 동안 받아온 무수한 상처에 비해, 자신이 아이들에게 변화를 기대한 시간이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알량한 관심 한 조각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쉽게 바꿀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오만했다. 그는 아이들의 상처가 큰 만큼 치유의 시간이 길어질 것을 각오하고, 조급하지 않으려 스스로를 다잡으며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이 아이들을 포기하는 바로 그 순간, 바로 그 지점이 이 아이들의 미래와 희망이 정지하는 시공”이라고. 장화 신은 고양이는 사악한 게 아니라, 늘 적대적이고 거칠기만 했던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위악을 떤 것이라고.


1년 반의 소년부 판사 시절을 그는 “법정과 기록을 벗어나 구체적인 고통과 슬픔, 번민과 방황을 마주한 시간”이라고 회고한다. 사건이 종결되면 엄청난 분량의 모든 관련 메모를 처리하는 게 보통이지만, 그는 두 상자 가득히 담긴 소년 재판 관련 메모는 차마 버리지 못하고 늘 보관하고 있다고 서술했다. 아이들의 비행을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른들의 악행을 잊지 않기 위해서. 아이들을 범죄를 저지르도록 방치한 어른들에 대한 그의 분노와 책임감이 내게도 깊이 와닿아 박혔다.


    "한 아이를 키우는데 한 마을이 필요하듯, 한 아이를 학대하는 데도 한 마을이 필요하다.” 이 말은 소년범을 대할 때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말이다. 여기에 한 마디 덧붙이자면, 한 아이가 망가지는 데도 온 집안과 마을이 필요하다. 이 아이들이 모두 엄벌을 받아야 한다면, 아이들을 유기하고, 방치하고, 학대하고, 눈길조차 주지 않은 부모와 가족, 그 아이들 중 누군가와는 같은 마을 사람들인 우리도 함께 엄벌을 받아야 한다.


사실 판사가 가장 많이 욕을 들을 때가 바로 소년 재판 사건을 다룰 때이다. 촉법소년에 대한 규정이 느슨한 것을 이용하여 청소년들이 점점 더 악질적이고 엽기적인 사건을 벌이고 있는 요즈음, 사람들은 형벌이 너무 가볍다고 분노한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게, 형사재판 절차는 기본적으로 절대권력으로부터 피고인의 권리 보호를 위해 디자인 된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괴물 같은 아이들이 저지르는 강력사건에 적절히 대처할 필요가 있다. 다만 그 몇몇 아이 때문에 나머지 아이들에 대한 처벌이 덩달아 엄해지고, 그나마 턱없이 부족한 사회적 관심과 배려가 줄어들까 무척 염려된다.


해당 대목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나의 분노가 얼마나 얄팍했는지를 깨달았다. 법이란 마냥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를 응징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판결을 내린다는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 지를, 합당한 벌을 내리는 것보다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는 게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이러한 인간적인 감정과 법의 공정성 사이의 고뇌는 책의 다른 대목에서도 꾸준히 드러난다.

    “법은 표적항암제가 아니다. 법은 개개인에게 맞춤 적용할 수 없다.”

그는 판사의 역할을 심판으로, 원고와 피고를 선수로 비유했다. 사회적 약자들이 대형 로펌을 상대로 체급이 맞지 않는 경기를 하더라도, 싸우는 것은 선수들 각자의 몫이기에 심판은 한 쪽의 사정을 봐줄 수 없다. 판사는 객관적인 법 규정과 당사자들이 스스로 입증한 증거를 바탕으로 판단해야 한다. 좀 더 분노하더라도, 좀 더 연민하더라도 법 규정을 취사선택할 수는 없다. 그러기 위해서 법은 중립적이어야 하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보호하는 쪽으로 제정되어야 한다. 법은 분노를 표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수많은 가치와 입장들이 충돌하는 법정에서 법이 일차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가치이자 판단의 기준은 ‘정의’이다. 정의의 사전적 의미는 ‘이성적 존재인 인간이 언제 어디에서나 추구하고자 하는 바르고 곧은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더 나은 선택이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는 수많은 상황이 있다. 대표적으로 한쪽을 희생시킬 수 밖에 없는 트롤리 딜레마 상황에서의 결정은, 어느 선택이든 충분히 납득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무척 아쉬운 선택이다. 판사는 대치하는 여러 가치들 사이의 우위를 결정하고 그 아쉬움을 떠안아야 한다. 그 때 의지할 수 있는 정의는 본인이 합리적이고 이성적 인간이라는 믿음 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정의에 대해 끊임없이 고뇌하게 된다. 본인이 정의를 제대로 이행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걱정한다. 온갖 정의론 가운데 대충 어렴풋하게 그려지는 정의의 확실한 특성은 정의는 최대한 모두에게 최선의 결론을 지어주는 것이다.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이 이로워지는 것, 그럼에도 한 사람의 고통을 폄하하지 않는 것. 때로는 극한의 고통에 빠진 소수자의 편에 서야 하는 게 정의라고 말한다. 결국 잣대 삼을 수 없는 모호한 정의만을 더듬으면서, 그는 어쩌면 “정의는, 목표가 아니라 여정이고, 정의로운 삶을 살려는 열망을 품은 인간 그 자체”가 아닐까 생각한다.


혹자는 판사가 AI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같은 범죄를 저질렀어도 담당 판사에 따라 형이 달라진다면 공정하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본 뉴스에서는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린 사람이 징역 6년을 선고 받았는데, 후에 잡힌 진범은 2년 6개월을 선고 받았다는 황당한 사건도 있었다. 누명을 쓴 사람은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아서 6년을 선고 받았지만 진범은 반성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감형된 것이다. 참 아이러니해보이지만, 단지 '반성하는 태도'를 양형에 참고하였을 뿐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이렇게 객관적으로 정량할 수 없는 요소가 판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판사가 AI로 대체되면 이런 모호한 판결이 줄어들 수도 있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진정으로 반성을 하든 말든 같은 형량을 때리면 되니까. 하지만 나는 그게 좀 더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흔히들 감정은 판단을 흐리게 하고 이성 만이 옳은 선택을 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옳은 선택이라는 게 무엇인가? 감정적 동물인 사람의 일을 다루는 데 감정을 배제하는 것만이 최선은 아닐 것이다. 우리네 삶은 컴퓨터 프로그래밍 함수처럼 X에 대응하는 단 하나의 Y가 존재하는 게 아니다. AI가 사건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요소들을 얼마나 고려할 수 있을지가 걱정된다. 무엇보다, AI는 이 책의 저자처럼 인간 개개인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을 또 하나 꼽자면, 바로 하급심이 기존 대법원 판례를 뒤엎고 성전환자 강간을 인정한 사례이다. 성전환자 강간은 이미 1996년에 형법 제297조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에 따라, 성전환자는 부녀로 볼 수 없기 때문에 강간이 아니라고 부정 되었다. 하지만 2008년에 발생한 사건에서는 성전환자 역시 강간죄의 대상으로 인정 되었다. 재판부는 해당 사건의 판결 이유에 ‘성전환자들에게 발생한 성정체성의 혼란은 그들의 책임이 아니며, 국가가 모든 국민의 인간다운 생활과 행복의 추구를 돕고자 하는 헌법 원리를 실질적으로 구현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이 판결의 영향으로 대법원 선례가 수정되었고, 형법상 강간죄 규정은 ‘부녀를 강간한 자’에서 ‘사람을 강간한 자’로 59년 만에 개정되었다. 이 사건을 담당한 판사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표현한다. “기록이 아니라 인간을, 그중에서도 특히 성소수자를 다감하게 응시한 그의 첫발을 따라 수많은 발자국이 이어지고 있다.” 인간을 다감하게 볼 수 있었던 건 그 판사가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이었기에 기존의 선례에서 벗어나 시대의 흐름에 맞는, 좀 더 소수자의 고통을 생각하는 판결을 내릴 수 있었다. 인간이었기에 저자는 소년범들을 보면서 저지른 범죄에 대한 정량적인 처벌 뿐 아니라 그렇게 되기까지의 상처와 앞으로의 미래를 떠올리고 그들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처음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내린 정의의 정의가 못마땅했다. 바르게 살려는 인간 자체와 그 과정이 정의라고 하는 건 결국 정의에 대한 정의를 유보한 것과 다름없다고 느꼈다. 나 또한 성선설을 믿고 있음에도 저자가 너무 지나치게 인간에 대해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렇지만 이 글을 쓰면서 책의 내용을 곱씹다보니 어느 새 그의 생각에 서서히 동의하게 되었다. 정의란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하나의 가치가 아니라 스스로 떳떳하려고 노력하는 그 마음인 것 같다. 인간이라면 어떤 길이 바른 길인지 가리키는 나침반을 하나씩 품고 있다. 비록 개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어느 정도 방향이 다를 수는 있고, 그래서 누군가의 나침반은 유독 방향이 틀어져있을 수도 있고, 혹은 지침을 알면서도 도덕성이 부족하여 지키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어쨌든 모두의 나침반은 대체로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 그럼에도 약자를 소외시키지 않는 지점, 바로 정의의 그 어드메를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불과 최근 몇 년 사이에도 사회는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게 바로 개개인의 나침반을 따르려는 행동, 정의를 구현하려는 노력 덕분이다. 그래서 나는 각자의 정의를 위해 아둥바둥하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들이 모두 선하다는 믿음이 생긴다.


한편,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정의 또한 법의 최우선 가치는 아니라고 역설한다. 많은 사람을 죽인 악당의 대명사 히틀러도 자신만의 정의를 좇았을 것이다. 그가 바로 정의라는 어떤 특정한 가치를 추구하느라 사람을 등한시하면 안 된다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그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게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고 강조하며 이 책은 끝이 난다.


    소동파의 시구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인자함은 지나쳐도 화가 되지 않지만 정의로움은 지나치면 잔인하게 된다.” 정의는 본질적으로 불의와 부정을 배제한다. 하지만 불의와 부정을 단죄는 해도, 도려내고 폐기해선 안 된다. 거기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다루는 이상 정의는 법의 전부가 될 수 없다. …세상을 하나의 가치로 아우르기 위해 모든 단어를 단 하나의 단어에만 조응시켜야 한다면, 나는 사랑과 짝짓고 싶다.


 책을 덮으니 이 책의 제목 <어떤 양형 이유>가 다시 눈에 들어다. 처음 이 제목을 보았을 때에는 형을 선고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판결문에 가까운 글일 줄 알았지, 이렇게 감정이 넘쳐흐르는 책인 줄 몰랐다. 다시 보니 제목의 어떤 양형 ‘이유’가 한 사람이 죄를 저지르기까지의 과정, 이 세상에서 그 죄를 낳기까지의 사정에 대한 변론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정의에 대한 책임감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담긴 따뜻한 시선에서 비롯된 이해일 것이다. 그의 판결문을 보면서, 이런 양형 이유를 기록하려 노력하는 세상이라면 나는 이대로 안일하고 낙관적이어도 될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예수님처럼 모든 악인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서로에게, 특히 각자의 최선을 다하고 있는 정의로운 존재들에게 좀 더 관대했으면 한다. 소모적이기만 한 분노를 내려 놓자. 세상을 지탱하는 동력은 얄팍한 분노가 아니라 뭉근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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