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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이 Feb 12. 2024

삶은 일단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상담 후기 (2) 양귀자, <모순>을 떠올리며


지난번 상담 이후(위의 글), 본의 아니게 계속 상담을 못 가고 있었다. 상담선생님은 감사하게도 매주 나한테 안부를 물으시며 상담소를 오라는 메시지를 보내셨다. 나는 요즘 바쁘고 몸이 안 좋아서 시간 내기가 힘들다고, 다음 주에는 꼭 가겠다고 대답했다.


그게 어느덧 3주를 넘어가자 선생님이 이대로 상담을 그만두려는 거냐고 물어보셨다. 그래도 어영부영 끝내고 싶진 않았고, 상담선생님께 죄송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최근 상담하고 싶은 내용이 생겨서 이번에는 시간을 내서 상담소를 방문했다. 선생님이 오랜만이라며 반겨주셨다.


어떻게 지냈냐는 말에 나는 상담을 안 간 동안 병가를 고려해서 병원을 가보았다고 얘기했다. 그런데 거기서 의사 선생님께 벽과 대화하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회사에서 스트레스받아서 머리가 아파요."라고 얘기하면 의사 선생님은 "팀장님한테 찾아가서 부서를 바꿔달라고 하세요."라고 대답하는 식이었다. 물론 스트레스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려면 그게 맞는 방법이긴 하다. 그렇지만 그야말로 "의사 선생님 T세요???"라는 말이 절로 치밀어 오르는 대답이었다. 내가 뭐 몰라서 못하나? 나는 상담선생님한테 물어보고 싶었다. 원래 병원은 다 이런 건가요, 아니면 이 선생님이 유독 냉정하신 건가요?


그런데 내 하소연을 듣던 상담선생님이 곰곰이 생각하시더니, “저랑도 전에 비슷한 상황 있지 않았어요?”라고 물어보셨다. 바로 내가 에 쓴 회고의 대화를 말씀하시는 거였다.


그때의 대화가 나에게만 인상 깊었던 건 아니었나 보다. 상담 중 내가 기분 나쁨을 표현한 이후, 상담선생님은 본인도 자신의 대화 방식을 돌아보셨다고 했다. 유독 나한테 원인 파악과 문제 해결에 치중된 질문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내가 이번에 의사 선생님과 있었던 일을 얘기하자, 어쩌면 내가 선생님들한테 그런 방향으로의 상담을 유도하는 걸 수도 있다고 했다. 나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만드는 것 같냐고 여쭤보자, 상담선생님은 나와 대화하면서 왠지 모르게 나한테 효과적인 조언을 해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고 했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상담을 더 이상 안 올 것 같았고, 그래서 어떻게든 나한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와!!!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그야말로 꿰뚫린 느낌이 들었다. 선생님은 나한테 본인이 느낀 게 맞냐며, 처음에 어떤 마음으로 상담소를 방문했었는지 물어보셨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는 문제 상황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으로 방문한 게 맞다고 대답했다. 어쩌면 내가 더 이상 상담소를 찾지 않게 된 것도, 내 상황은 내가 바꿔야 하는 것이므로 상담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꼈기 때문이리라.


상담선생님이 꿰뚫어 보셨듯 나는 사실 수시로 내가 경험하는 것에 대해서 판단한다. 가령, 지난주부터 새로 개강한 금요일 저녁 글쓰기 수업은 선생님의 말하는 방식이 나와 맞지 않았다. 고작 첫 수업을 듣고는 나는 그 수업이 앞으로 12주 동안 매주 금요일 저녁을 바칠 가치가 있을지 저울질했다. 저울의 반대편에는 수업의 커리큘럼과 줌 수업의 간편함 등의 장점을 올려두었다. 고민한 끝에 계속 듣는 게 유용하겠다고 판단했지만, 아마 다음시간 수업이 마음에 안 들면 또다시 그다음 수업 참여 여부를 고민하게 될 것이다.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를 만나서 시간을 보내기 전에 기회비용을 먼저 생각한다. 이때 그 기회비용에는 나의 시간이나 에너지 등이 있고 반대쪽 저울에는 그 사람을 만났을 때 얻을 수 있는 정신적 가치들이나 좋은 감정들이 있다.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더 인색해져서 더 이상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인연들은 그냥 놓아주게 되는데, 매정하지만 그게 자연스러운 거라고 생각했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쓸 여유가 없었다.


반대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내가 상대에게 유의미한 사람이기를 바라고 스스로를 검열해 왔다. 내가 상대에게 별다른 효용을 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 나를 위해 시간을 내라고 말하기가 조심스러웠다. 그렇게 나는 나도 모르게 주변 사람들에게 벽을 쌓고 있었다.


상담선생님께 이런 생각들을 얘기하자 선생님이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그건 관계를 맺는 게 아니라, 이용하는 거예요.”


그 말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상담선생님은 우리는 사람이든 사물이든 세상의 것들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건 매 순간 실리를 따지지 않고 그냥 부대끼는 거라고 하셨다. 지금까지 대화를 나눠본 나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 같으면 곧바로 그만두는 단호함을 가졌다고 했다. 그렇지만 굳이 그러지 말고 그냥 관계를 쌓는 게 필요하다고 하셨다. 판단을 유보하고 애매한 상태를 지켜보는 것, 그런 태도를 한 번 가져보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듣자, 어쩌면 내가 지금 회사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그런 사고의 연장선상일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부서장님들을 비롯하여 회사를 오래 잘 다니는 사람들은 보통 “어떻게 버티세요?”라는 말에 “그냥 별생각 없이 다녀요.”라고 대답한다. 나는 별생각 없지 못하는 사람이라 회사에서 내가 얻는 것과 잃는 것도 계속 저울질을 한다. 요즘에는 그 저울이 못마땅한 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에, 그 기울어진 저울이 못마땅해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저울질 자체를 안 하면 스트레스가 덜 하지 않았을까?


그날, 친한 친구들을 만나서 그야말로 나의 사고방식에 대한 유레카였던 그날의 상담 내용을 얘기했다. 그러면서 내가 행동 하나하나에도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것을 깨달았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한 친구가, 자기가 지켜본 나는 타고난 에너지에 비해 하고 싶어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배터리 용량은 적은데 연결된 기계는 여러 대인 것이다. 그래서 늘 5% 정도의 절전모드 상태로 방전되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에너지를 어디에 써야 최선의 선택일지를 고민하게 되는 것이라 비유했다. 그 비유가 너무 공감되어서 웃기면서도 슬펐다.


우리는 언젠가 함께 읽은 양귀자의 <모순>의 문장을 떠올렸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작 중 주인공은 이 문장을 되새기며 머리로 답을 내리는 삶이 아니라 직접 경험해 보는 삶을 택한다. 아마 양귀자 작가님이 소설을 통해 경계하고자 하신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나 같은 사람일 것이다.


나는 한발 내딛기에 앞서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아주 오지게 두드려보는 편이다. 그런데 별생각 없이 일단 발을 내디뎠을 때, 기대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큰 기쁨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사실 그날의 만남도 그랬다. 피곤해서 약속을 파투내고 쉴까 하는 생각이 불쑥 솟았지만 상담에서 얘기 나눈대로 괜히 고민하지 말고 일단 만나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얘기로 새벽까지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아마 만날지 말지 저울질을 했으면 내 마음은 안 만나는 쪽으로 기울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이 벅찬 행복을 놓쳤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바쁘다는 이유로 또 상담을 미루었다면, 이러한 성찰과 깨달음을 얻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동안 나는 내가 똑똑하고 효율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최선의 결정을 내린다고 믿는 나의 오만함을 경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행동의 결과는 내가 미리 머리를 굴린다고 해서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계산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일단 살아보자. 삶은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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